★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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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도끼만행사건 이라고 아시나요 ?
북한에서는 정보를 빨리 습득할수 없기때문에 . 아마 모르시는분들이 많을껑에요 .
이 사건은 1976년 한반도가 전쟁일보직전 까지도 가게되었던 유명한 사건입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도끼만행 사건 UN군측인 미군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의 제5관측소에서 제3초소와 비무장지대를 관측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한군 3개 초소에 둘러싸인 제3초소 부근에 약 12m에 이르는 미루나무 가지가 무성하여 이를 제대로 관측할 수 없었습니다. 이 미루나무는 공동경비구역에서 오래전부터 자라온 나무로 남과 북 양측이 상대방을 감시하는데에 지장을 주고 있었습니다. (사건의 발단이 된 문제의 미루나무)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경 미군 장교 2명과 사병 4명, 대한민국 국군 장교 1명과 사병 4명 등 11명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UN군측 제3초소 부근에서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의 가지를 치는 한국인 노무자 5명의 작업을 감독·경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측 경비병이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계속하자 인근 초소에 있던 경비 병력을 요청하여 수십 명의 북한군 사병들이 트럭을 타고 달려왔습니다. 나무 밑에 두었던 도끼 등을 빼앗아 휘두르며 기습 공격하였습니다. 이들은 UN군측 지휘관과 장병들에게 집중 공격을 가해 미군 장교 2명 (경비중대장 아서 보니파스 미군 대위와 소대장 마크 배럿 미군 중위)이 피살되었으며, 나머지 9명이 중 ·경상을 입었고, UN군측 트럭 3대가 파손되었습니다.
(도끼만행 사건 당시 모습)
사건 발생 후 주한미군과 한국군은 ‘데프콘 3’(경계상태돌입)을 발령하고 전투태세를 갖추었습니다. 미군은 F-4 전폭기 1개 대대와 F-111 전폭기 1개 대대를 한국에 증파하고, 항공모함 미드웨이호를 한국해역으로 항진시켰으며, B-52 폭격기를 출동시키는 등 강경한 대응을 취했습니다. 문제의 미루나무 절단작업에 나섰습니다. 포드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한미 양국간 협의결정으로 실시된 이 작전에는 건십헬리콥터 26대, B-52 중폭격기 3대, F-4 및 F-111 폭격기 수십 대가 판문점 상공을 엄호하는 가운데 3백여 명의 한미 양군 기동타격대가 투입되었습니다. 더 이상의 무력사태로까지 확대되진 않았습니다. 북한의 김일성이 유감의 뜻을 표명하는 사과문을 국제연합군측에 전달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9월부터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 경비하게 되었습니다. (절단된 미루나무 가지)
도끼만행사건은 남북한의 분단 하의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미연합군에 기세에 쫄아버린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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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진을 하고 오끼나와에서 미군이 증원을 위해 한반도로 이동하는등 ...
겁에 질린 김일성이 유감성명 (사실은 사과였음) 을 발표하고 한미연합사에 사과문을
발표했는데 이후로 절대 미군이나 한국군에게 시비를 거는일조차 없어졌다고 합니다.
결국 평화는 강한힘을 가졌을때 지켜진다는게 입증된것이지요...
김일성이는 미군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를 6-25 전쟁때 몸소 겪어본 사람이기에
잘 알고 있었으며 결국 미군때문에 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못했고 그것은 김정일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군만 없으면 언제고 다시 또 전쟁을 일으킬 놈들이지요.
그래서 좌파들이 극렬데모하면서 미군철수 주장하는것이고요....
저희 학교때 고등중학교 선생이 민경제대군인이었는데,
수업시간에 가끔씩 옛말을 해주는데, 도끼사건 얘기를 자랑삼아 했습니다.....
도끼로 미국놈과 괴뢰군놈을 몇놈 찍었다고.....
한 천발은 떨어뜨려 버렸어야...
도끼 사건이후 나무를 마져 자를때 박정희 대통령은 기회는 이때다 하고 어떡하든지 판문점에서 총을 쏘기를 지시했고 총을 쏘면 북한도 대응하여 사격할거라고 판단하여 전면 전쟁을 할려고 마음 먹고 은밀히 지시를 내렸지요.
그런데 미국에서 그정보를 입수하여 박대통령을 설득하고 또 한국군을 미군이 철저히 감시하여 실패로 돌아 갔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