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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공작원에 포섭돼 월북 후 탈출한 경제학자 오길남
United States 작두남 1 411 2011-06-17 08:26:04

[RFA 초대석] 북 공작원에 포섭돼 월북 후 탈출한 경제학자 오길남

2011-05-02

사진제공-월간조선

북조선 공작원에 포섭돼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가 그 이듬해 홀로 탈출한 오길남 박사.

화제의 인물을 만나보는 RFA 초대석,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1985년 말 독일에서 북조선 공작원에 포섭돼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가 그 이듬해 홀로 탈출한 오길남 경제학 박사. 비록 자신은 자유를 찾아 한국땅에서 살고 있지만 한 때 자신의 그릇된 판단으로 20년 간 북한의 요덕수용소에서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거나 죽었을 지도 모르는 아내와 두 딸을 생각하면 하루 하루가 악몽이고 생지옥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목숨만이라도 붙어 있기를 바라는 한 가닥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는 7순의 오길남 씨를 전화로 만나봤습니다.

오 박사는 15년 간 한국의 국책연구기관에서 연구위원으로 일하다 2007년 퇴직했습니다.

전수일: 경제학 박사과정 공부하러 독일에 유학갔던 때가 전두환 군사정권 때가 아니었습니까?

오길남: 아닙니다. 나는 70년에 독일에 갔습니다. 원래 대학에서 독일문학을 했고 독일에 가서 경제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80년대 전두환 정권 때는 해외에서 있었던 민주화운동이라는 것에 이상하게 빨려들어가 윤희상 송두율 그밖의 목사들하고 활동했었습니다. 벌써 26년이 됐습니다만 85년에 브레멘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치고 그 당시 북한 공작에 희생된거지요. 그리고 그 다리를 놓은 공작원들이 저를 포섭하고 유인해 북으로 보냈던 것이죠.

전: 미국신문 워싱턴포스트에는 공작원이라고 나와 있고 월간조선에 의하면 윤이상씨와 송두율씨가 많이 입북을 권했다고 하던데요.

: 네. 윤이상 송두율 그리고 가장 적극적으로 포섭했던 김종한, 지금도 베를린에 있을 겁니다. 그 셋이 공작조로 형성돼 있었고 주로 김일성이나 김정일 명령을 받아 공작업무를 수행한 것이죠. 그런 공작 하는 사람들이 독일에 많았어요.

전:한국에서 음악선생을 하다 도이칠란드에 유학간 윤이상 씨는 1964년 서베를린에 정착해 1971년 독일인으로 귀화했습니다. 1963년부터 평양을 여러차례 드나들며 김일성과 개인적 친분을 쌓았고 1967년 이른바 ‘동백림’ 사건의 주역으로 한국정부에 간첩혐의로 잡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가 1969년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석방된 뒤 서독으로 추방돼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즉 범민련 유럽본부 의장으로 반 한국정부 정치활동을 했습니다. 한편, 1967년 독일에 유학해 박사 학위를 받은 송두율 씨는1973년 평양을 방문해 조선로동당에 가입하고 여러차례 북한을 오갔으며 1974년 독일에서 ‘민주사회건설협의회’라는 단체를 조직해 반 한국정부 활동을 벌였습니다.

전: 북한에 가면 경제학자로서 일자리를 주겠다고 했다는데.

: 내가 세계경제연구소에서 국제경제학도 했으니 북한에 가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며 포섭한 것이죠. 그 당시에는 중국도 개방했으니 북한도 개방 무드를 탈 것이라는 판단은 타당했다고 봅니다. 85년에 북한은 개방 분위기를 탔다가 다시 안되겠다고 해서 그만 둔 것인데, 여하튼 북한이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줄 리가 없지요. 공작 목표에 따라 나를 끌고 들어가 이용해 먹은 것입니다. 딸 둘과 집사람을 함께 데려갔으니 그들을 인질 삼아 내가 꼼짝없이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 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죠.

전: 북에 가면 부인 신숙자씨의 간염 치료도 도와줄 거라고 했다던데요?

: 간염에 전염된 뒤 쇄약해진 상태였습니다. 아내가 독일 병원에서 투석 전문 간호원이었습니다. 거기서 일하다가 원자탄 피폭 받듯이 간염 공격을 받아 전염됐습니다. 피를 다루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하지만 치료를 받은 후 보건당국에서는 그만하면 나은 것이라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쇄약한 상태여서 북한에 가면 치료를 받을 수 있지 않겠냐는 얘기였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한국에 돌아가려던 참이었는데, 그만 내가 당해 버린 겁니다.

전: 실제 북한에 들어가려 할 때 부인께서는 굉장히 반대를 하셨다던데.

: 네. 반대했죠. ‘당신 왜 우리 모두 데리고 가려느냐? 당신부터 먼저 가 보고 결정을 하지 왜 그런 경솔한 결정을 하느냐’ 며 반대했죠. 그러나 그쪽 공작지도부나 공작을 담당하는 쪽에서는 가족까지 데려 갈 심산이었던 거죠. 그런데 그런 걸 내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북쪽에서는 저의 가족을 함께 끌고 가야할 상황이었던 거죠. 가족을 인질로 잡으면 나를 충분히 이용해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특히 공작원으로 이용할 셈으로 말입니다.

전: 근데 북한에 도착하자 마자 경제학자로서의 업무를 맡기거나 부인의 치료를 해주는 대신에 김일성 교시부터 교육받았다면서요?

: 네. 들어가니 나한테 사상교육과 김일성 역사교육을 시키고 경제관계는 자신들이 잘 모르니까 교육하지도 않았습니다. 교육받은 장소는 미림초대소라는 곳입니다. 거기에 신상옥이도 있었고 송두율이도 거기에서 지냈고요. 일종의 밀영지이죠. 소나무 숲속에 초대소, 말하자면 안가들이 띄엄띄엄 있는 곳입니다. 위수지역이니까 군인들이 관할하고.

전: 평양 근처인가요?

: 평양 동북부 지역으로 자동차로 30-40분 걸립니다. 도로를 가다가 숲속으로 들어가면 나오는데 해외 인사들을 데려다 거기서 교육시키는 곳입니다. 보통 다른사람들은 최소한 2년 정도는 잡아놓고 교육시킨다고 합니다. 해외에 있는 송두율 김종환 같은 공작원들은 거기서 며칠 간 지내면서 교육받고 지령받고 나가고 들어오고 했었습니다.

전: 그런데 거기서 몇달 간 교육받고 한민전에 들어가셨다고…

: 86년 1월 2월 3월 석달 정도 미림초대소에 있다가 평양으로 나왔습니다. 대남방송으로 구국의 소리 방송과 민중의 메아리 방송이 있는데 구국의 소리 방송으로 보내졌습니다. 그곳은 주체사상을 전파하는 곳인데 한국의 학생운동을 주체사상으로 이끄는 큰 역할을 했습니다. 나는 방송을 편집하는 곳에서 일했습니다. 평양 김일성대학 후문쪽과 주석궁 뒤쪽에 있었는데 칠보산연락소라고 하는 곳인데 조선노동당 중앙위 소속이었습니다. 나는 직접 대남방송을 담당하지는 않았습니다. 방송은 1969년 납북된 KAL (대한항공)기 승무원들이 했습니다. 이대 출신의 성경희 씨, 연대 출신의 정경숙 씨였습니다. 또 남한 문화방송국의 간부로 있던 남성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남녀 목소리로 대남 방송을 했습니다.

전: KAL기 납북사건이란 1969년 12월 11일 강릉을 출발해 서울로 가는 대한항공 여객기가 승객으로 위장한 북한의 고정간첩에 의해 북으로 납치된 사건으로 납북 2달만에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 중 승무원 등12명을 제외한 39명은 송환됐습니다. 북에 남은 승무원 성경희 씨는 2001년 납북 32년만에 평양에서 열린 이산가족상봉에서 남쪽의 어머니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 구국의 소리에 있다가 나는 10월에 다시 중앙당에 소환돼 연락부장 그러니까 대외정보부장 격인 이창선이의 업무지시를 받았죠. 실제 지시를 한 것은 그의 밑에 있는 공작지도부의 지도원 과장이었습니다. 이미 나의 공작임무에 대한 시나리오를 만들었던 것이죠.

전: 방송 한지 얼마 안돼 11월에 독일 가서 남한 유학생을 데려오라고 했다죠?

: 독일로 가는게 아니었습니다. 내가 독일에서 입북했었으니까요. 그래서 덴마크의 코펜하겐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북한 대사관이 있습니다. 독일에서 유학하고 있는 한국 젊은이를 코펜하겐으로 불러 내도록 하라는 지령이었습니다. 불러 내면 북한이 파견한 공작조가 그들을 접촉 포섭토록 한다는 것이었니다. 그런데 내가 코펜하겐 공항에 도착해 입국심사를 할 때 여권심사대 직원에게 도와달라는 쪽지를 건네 탈출한 겁니다. 나 보다 앞서 심사대를 통과한 북한 대사와 북한에서부터 동행했던 공작지도원을 빼 돌렸습니다.

전: 그래도 그들이 바로 옆에 붙어 있었을 텐테 어떻게 용케 빠져 나오셨습니까?

: 덴마크 가기 전에 동베를린의 북한 공작 총책임자의 집에서 숙식했습니다. 거기서 공작원들이 행선지를 확실히 대 주지는 않았지만 이런 소리 저런 소리를 하는 중에 덴마크로 갈 것같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그때 정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탈출 대비용으로 사전에 짤막한 글로 도움을 요청하는 쪽지를 작성했습니다. 영어와 독일어로 적었습니다. 헬프 미 헬프 미, 힐페 힐페 라고요. 사람 살려달라는 말이죠. 덴마크 사람들은 독일어를 잘 하니까요. 그리고 내가 갖고 있는 여권은 내 것이 아니라는 말도 적었습니다. 독일 정부가 발급한 내 진짜 여권은 이 놈들이 압수해 갔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탈출에 성공했습니다만 덴마크에서 감옥 생활을 했죠.

전: 왜 감옥에 갔습니까?

: 왜냐면, 덴마크 경찰당국은 형사적인 문제는 처리할 수 있었지만 외부 공작원 사건은 처리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경찰은 나를 미군에 넘겨주려고 그랬던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내 신변을 보호하려 했던 것이죠. 북한 공작원 4,50명이 거기에 있었던데다 김정일 지시를 받고 덴마크 주재 북한 대사도 내 신원 보증을 위해 나왔던 상황이니까요.

전: 탈출에 성공한 오길남 씨는 독일에서 5년동안 살면서 윤이상 씨에게 북의 가족을 송환해 달라고 여러차례 간청했지만 윤이상 씨는 1987년과 1988년 두차례 부인의 편지만을 전해줬다고 합니다. 1991년에는 윤 씨가 아내와 딸들의 육성이 녹음된 녹음테이프와 가족사진을 전하면서 다시 월북할 것을 종용하자 오길남 씨는 가족의 상환이 어려울 걸로 판단하고 그 다음해 주독일 한국대사관에 자수하고 5월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그는 입국 후 가족 구출운동의 일환으로 ‘김일성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했습니다.

전: 아내와 딸들을 도와달라는 책을 펴 내셨는데 그에 대해서 북한에서는 대응이 없었다죠?

: 대응이 있을 리 있습니까? 거기서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대응을 해야 그게 가능합니다.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못합니다. 김정일이가 죽어야 이 문제가 풀릴까. 아니면 북한 체제가 붕괴하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전: 근데 박사님이 86년 남한 대학생을 유인하러 갈 때 부인은 남은 가족 죽은 줄 알고 돌아오지 말라고 했다죠.

: 네. 아내 말이 그놈들 시키는 짓이 결국 이런 거 아니냐. 그러면서 다 같이 죽든지 아니면 당신 혼자 가서라도 살라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하고 혼자라도 가서 살아라 하고 말입니다.

전: 박사님 아내와 딸 2명이 요덕수용소에 있다는 소식을 들으셨다는데…

: 네. 거기 혁명화 구역에 있다가 이제는 더 심한 곳 (완전통제구역)으로 갔다고 합니다. 이제는 가족들이 기적적으로 벼룩같은 생명체라도 유지할 수 있다면 다시 원상을 회복할 수 있으니까 그것만 바랄뿐이지요.

전: 언젠가는 돌아 올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는 않고 있는 것이겠죠?

: 짐승꼴이 되어서라도 살아 있어만 준다면 하는 바람뿐입니다. 그러면 다시 구해 낼 수 있으니까요. 지금 가족의 상태야 어디 인간이겠습니까? 죽지 않았다면 그런 상태, 둘 중에 하나겠죠. 북한에 먹을 게 있겠습니까?. 그래서 살아 있어도 짐승도 제일 하층 짐승의 상태로 돼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살아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RFA 초대석, 이 시간에는1985년 말 독일에서 북조선 공작원에 포섭돼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가 그 이듬해 홀로 탈출해 서울에서 살고 있는 오길남 경제학 박사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저는 전수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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