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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대남공작 '본부'가 서울에 있다?
United States 대남공작 1 318 2011-07-31 08:18:52
북한 대남공작 '본부'가 서울에 있다?
[뉴데일리] 2011년 07월 31일(일) 오전 06:50   가| 이메일| 프린트
南韓의 '5만 간첩', 南베트남의 '5만 간첩'   
   北대남공작 '현지본부' 서울에 있다?
金泌材    
 
 保守성향 월간지 ‘한국논단’(발행인 이도형)은 2008년 7월호에서 익명을 요구한 전직 정보요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남한에서 활동 중인 하급공작원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느라 북(北)으로 갔던 시대는 지나갔다”면서 북한의 대남공작 조직이 서울에 있다고 보도했었다.
 
 구체적으로 전직 정보요원들은 북한의 대남공작은 김정일→로동당 대남담당→黨(당) 대남 연락부 비서→통일전선부 작전부→중앙당 35호실이 분담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한국민주전선중앙위원회→남조선문제연구소 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또 북한의 대표적 대남공작 조직인 통일전선부에는 한국사정조사 연구에 수십 년 종사해온 골동품 같은 전문가들이 3,600명 이상 있어 남한사정을 꿰뚫어보고 있다고 했다.
 
 이와 함께 1990년대 들어 남파공작원들이 북한 공작부와 교신한 무선전화는 하루 10만 건 내외였으나 김대중 시대 들어서는 한 때 하루 50만 건을 넘다가 노무현 시대에 와서는 1만 건 이하로 감소했다고 밝혔다.
 
 무선전화를 통한 공작원들의 대북접촉이 이처럼 줄어든 이유에 대해 전직 정보요원들은 “인터넷을 통한 e-메일의 활용과 함께 남한 현지 지휘본부가 서울에 설치되고, 북한 정권에서 서열이 20번 내외쯤 가는 거물책임자가 서울에 상주하게 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들은 이어 1975년 南베트남 패망당시 北베트남 대남공작부가 현지 지휘부를 수도 사이공에 두었던 점, 90년대 초 독일통일 직전까지 서독정부 산하에 1만 명의 동독공작원들이 있었던 점 등을 예로 들면서 “남한의 사정은 越南이나 독일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 “행정·입법·사법·언론·문화 등 각 분야는 물론 심지어 軍部와 정보기관에도 (공작원들이) 침투해 있다”면서 이들이 안주하고 있는 곳은 “각 기관, 시민단체 등 광범위하며 그동안 혁명과업 수행에 바빴다”고 언급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작원들이 안주하고 아지트로 삼고 있는 소위 시민단체는 대체로 XX통일, XXXX청년, XXXX연구소 운운의 간판을 내걸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 아닌 정부, 정부 아닌 공작요원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전-현직 정보요원들과 밀접하게 협조해온 미국 CIA외에는 잘 모르고 있다.”
 
 전직 정보요원들은 “미국의 CIA나 군 정보부대는 김영삼 시대 초까지 긴밀하게 협조해오던 韓美 정보교환을 포기했다”면서 미국을 대신해 “경계의 대상이던 中國공산당 공작원들이 김대중 시대 이래 더러 정보를 교환하는 사이가 됐다”고 증언했다.
 
 김필재 spooner1@hanmail.net
 
  [관련기사] 南韓의 '5만 간첩', 南베트남의 '5만 간첩'
  황장엽 "남한 내 간첩들 권력핵심부에 침투해있다"
 
 "남한 내에 고정간첩 5만 명이 암약하고 있으며 특히 권력 핵심부에도 침투해있다…. 그쪽(한국) 권력 깊숙한 곳에 이쪽(북한) 사람이 있다…. 우연히 김정일의 집무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보았더니 그날 아침 여권 핵심기관의 회의내용과 참석자들의 발언내용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망명 당시 서신)
 
 자유베트남(남베트남)은 시종일관 反美·反戰 데모를 주도했던 간첩과 시민·종교단체의 조직적인 선전선동결과 미군의 전면철수 후 공산화 됐다.
 
 남베트남은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당시 기준 세계 4위, 병력 58만 명)에서도 북베트남(월맹)을 훨씬 앞질렀다. 그러나 국가 지도자급 인사의 자제와 돈 있는 집 청년 10만 명 이상이 병역기피 및 해외 유학을 갔거나 군 출신 장군이 운영하는 사기업에서 일했다. 지도층의 사리사욕, 부정축재, 황금만능주의가 체제 파괴세력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일례로 남베트남 대통령 티우는 패망 당시 철수하는 미군을 향해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허겁지겁’ 미군이 마련한 군용기에 몸을 실었다. 티우를 수행한 미국의 CIA 요원은 그의 트렁크를 옮길 때마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금덩이가 한쪽으로 쏠릴 때 나는 소리였다. 미군기는 티우의 금괴를 싣고 첫 망명지인 대만으로 날았다. 티우는 이란의 팔레비나 필리핀의 마르코스에 앞서 스위스 비밀은행계좌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197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미군과 한국군이 전면 철수 하자 사이공에는 100여개의 애국단체, 통일 운동단체들이 수십 개의 언론사를 양산해 베트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다.
 
 이들은 베트남 전쟁은 민족 간 내전으로 미국 등 외세가 내정 간섭 할 문제가 아니라면서 미국을 고립시켰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수많은 간첩을 파견, 동조자를 포섭하고 각 분야에 간첩을 침투시켜 혼란을 조성하는 등 정부가 힘을 집중시키기 못하도록 했다.
 
 1975년 남베트남은 북베트남 정규군의 무력침공과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패배한 것 이상으로 이들 100여개 이상의 좌익 단체의 선전전에 당했던 것이다. 패망 당시 베트남에는 공산당원 9500명, 인민혁명당원 4만 명, 즉 전체 인구의 0.5% 정도가 사회의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5만 명의 월맹간첩들은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로 위장한 채 시민·종교단체는 물론 대통령비서실장과 장관, 도지사 등 권력핵심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미군의 전면철수 후 베트남패망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간 이후에나 확인됐다. 1967년 치러진 베트남 대통령 선거에서 차점으로 낙선된 야당지도자 쭝딘쥬도 대표적 간첩이었다. 그는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조상들이 얼마나 슬퍼하겠냐"면서 월맹에 대한 ‘포용정책’을 주동했다.
 
 간첩들이 가장 많이 침투했던 것은 시민·종교단체의 부패척결운동과 反美·反戰평화운동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선전선동을 통해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대해가면서, 국방과 안보를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또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반공을 외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애국인사, 언론인들이 다음날이면 시체로 발견됐고, 이들의 가족-친지들이 사회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베트남은 공산화 이후 지식인, 공무원, 군인, 종교인, 부유층, 그리고 자유 베트남 정부에 협조한 사람들은 전부 재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적대(敵對)계층으로 분류됐으며 조국을 배신한 배신자로 간주되어 승자의 보복대상이 됐다.
 
 탄압과 차별, 학대와 폭정이 자행되었고 전국 각처에 재교육 수용소가 설치되어 적대계층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잡아 가두고 공안경찰을 증원(增員)하여 국민의 일상생활을 감시하고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것을 통제했다.
 
 특히 가혹한 육체노동을 강요했다. 노동을 최고의 가치로 규정하여 "부모의 흘린 피와 땀, 자식이 흘린 피와 땀이 합쳐야 나라가 번영한다"고 선전하면서 무자비한 노동을 강요했다.
 
 논과 밭은 국유화되고 영농은 철저한 3모작을, 일반 국민은 헌금을 강요받았으며 돈이 없는 자는 노력봉사를 해야만 했다. 노동자는 한 달에 15kg의 쌀을 배급받아 생활해야 했고, 전쟁부채 상환비, 전비(戰費)기금을 내야 했다.
 
 먹는 것을 철저히 통제하고 수중에 돈이 없게 하여 국민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는 철저한 국민재교육을 시행했다. 또한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종래 부를 축척한 모든 것을 부정해 자살을 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공산주의자들의 국민 재교육은 "공무원(公務員)은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경찰(警察) 및 정보요원은 제국주의의 도구(道具)로, 군인(軍人)은 무력으로 총을 가지고 대항했던 사람으로, 문예(文藝)인은 민족정신을 교란시킨 사람으로, 종교인(宗敎人)은 국민을 유혹하여 미신에 빠지게 하고 우매하게 만든 사람으로, 자본가(資本家)는 국민을 착취해 강압적 노동을 시켜 반혁명에 앞장을 섰으며 국민에게 피의 부채를 지고 있다"는 죄를 물어 재교육을 시켰다.
 
 이와 함께 "우리 공산당은 반역자들을 재교육 과정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에 동참할 선량한 국민으로 개조하고, 사회에 필요한 사람으로 선도할 것이며 노동을 경험하게 하여 자력갱생(自力更生)의 길을 열어준다"라고 선전했다.
 
 한 수용소에 2000명 정도 수용했으며 성(省) 별로 1개 이상이 있고 사이공 주변 등 도시 주변에는 대상자가 많음으로 여러 곳에 설치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밀림지대에 위치시켜 탈출을 방지하고, 나무를 벌목하여 수용소를 짓고 개간하면서 식량은 월 9kg을 지급하고 나머지는 현지에서 자급자족하도록 했다.
 
 수용소 방침 자체가 체형(體刑) 및 학대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어 있었고, 작업 실적에 따라서 수용소장의 재량으로 급식의 양을 결정했다.
 
 따라서 제거해 버리고 싶은 적대계층의 사람은 굳이 사형을 집행하지 않더라도 제거할 수 있게 제도를 만들었다. 가족이나 다른 국민들, 외국(外國)의 항의를 벗어나기 위한 교묘한 방법을 강구해 냈다. 수용소 기간에는 면회가 일체 사절되었고, 편지도 1년 또는 2년에 한번 보낼 수 있었으며 의료혜택은 전무하여 병에 걸리면 바로 죽는 것이었다.
 
 말라리아 등의 열병과 뱀 전갈의 독충과 영양실조 및 미래에 대한 포기는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혁명에 방해가 되는 사람을 제거했다.
 
 즉결처분된 사람들을 포함, 그 인원은 최소 30만에서 최대 20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정확한 통계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군 출신의 경우 하사관 및 초급장교까지 수용소로 보냈으며, 공무원 종교인 경제인 월남 정부 협조자와 그 가족까지를 포함하면 최소한 100만 명 이상의 인원이 재교육을 받았다고 판단된다.
 
 공산치하에서 살기를 거부한 수많은 남부 베트남인들은 즉각 해외 탈출을 시도했다. 철수하는 미군을 따라 망명길에 올랐던 1세대 탈출자들은 미국 등 서방으로 이주하여 비교적 쉽게 그곳에서 정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6년부터 탈출한 대부분의 베트남인들은 안전한 이주 및 재정착의 보장 없이 무작정 국경을 넘거나, 배를 타고 공산베트남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다른 나라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고, 동남아 일대의 바다를 정처 없이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들이 바로 보트피플(Boat People)이라 불리는 베트남 난민이다.
 
 1976 년부터 1992년 말까지 동남아지역으로 탈출한 사람들의 수는 총 792,893명에 이르렀다. 1979년부터 1992년 말까지 동남아국가들의 난민 수용소를 거쳐 최종적으로 난민자격을 인정받아 서방 등 제3국에 정착한 난민 수는 438,436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정일은 “한반도 적화(赤化)통일 달성 시 1천만 명은 이민 갈 것이고, 2천만 명은 숙청될 것이며, 남은 2천만 명과 북한 2천만 명으로 공산국가를 건설할 것”이라고 했다. 북한 공산집단의 이 같은 주장을 절대 흘려들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운명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명 및 재산을 수호하는 것은 미국과의 방위공약도 아니고 공산당과의 협상도 아니다. 북한 공산 집단에 맞서 우리의 자유를 지키겠다는 의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전쟁은 결국 ‘의지의 대결’이다. 한반도에서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북한은 핵무기를 기반으로 본격적인 ‘강성대국’ 진입시기인 2012년부터 한미연합사가 해체되는 2015년을 ‘남조선 혁명의 성숙기’로 보고 있다. 북한 급변사태에 앞서 북한에 의한 남한 급변사태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전면전(全面戰)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오히려 위험한 생각이다. 군사 안보전략은 반드시 비관론적 가정에 근거해야 한다. 근거 없는 낙관론을 배격해야 한다. 지금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철통같은 총력안보태세를 다짐해야 할 때다. (조갑제닷컴)
 
 김필재 기자 spooner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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