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하나하나 논파해보지. 쫙 보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슨상노빨족들은 거짓과 선동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진실 앞에 무너지기 십상이지.
자 보자~ 우리보다 월등한 화력을 가진 집단이 그것도 연습 비행기밖에 없고 탱크도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더구나 기습공격을 당했는데 국군통수권자가 포로로 잡혀야겠냐? 대통령이 잡혔으면 그 이후 전쟁이 계속될 수 있었을까? 아마 인천상륙작전도 없었을 것이고 한미상호조약도 체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슨상노빨족들의 진심은 그때 이승만 대통령께서 북괴에 잡혀 적화통일 되었길 바라는 심정이겠지 ㅋ
한강철교를 끊은 것은 이승만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결국 이 사건은 당시 폭파 책임을 맡았던 공병감 최창식 대령이 ‘적전비행죄’로 사형당하는 것으로 종결되었지. 그러나 최 대령은 명령만을 집행했을 뿐 실제 조기 폭파를 명령한 자는 채병덕 총장으로 알려져 있다. 오케이?
슨상 노빨들은 자신들도 지키지 못할 지극히 높은 도덕성과 완벽성을 목표로 정해놓고 거기에 맞지 않는 자는 모두 독재자로 매도하지
하지만 그대들은 내용의 진실을 소매치기 하고 감성만을 앞세움으로써 이성의 문을 닫아버리는 자들이기에 구제불능이여~
한 가지만 예를 들어주마
이승만과 거의 같은 시대 대통령을 했던 루스벨트라는 분이 있었단다. 미국 역사상 4선 대통령을 역임한 바 있지. 2차 세계대전 당시 그는 어떻게 해서든 히틀러와 전쟁 중인 영국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애쓰고 있었단다. 그러나 1940년 대선에서 그는 국민들 앞에 나와 ‘여러분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여러분의 아들들을 외국의 전쟁터로 보내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단다.
대통령이 국민을 기만했느냐 안 했느냐의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 중립을 선언함으로써 세계대전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 국민들을 단결하고, 전쟁 때문에 터진 여러 가지 이익을 고스란히 미국 국내로 가져왔단다.
만약 우리들 각자가 루스벨트라면 전쟁이 터지자마자 나가서 싸우자고 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가만해 내버려 두고 챙길 이익은 다 챙겨놓으면서 하는 것이 좋을까? 어느 것이 국가와 국민에게 이익일까? 현실 정치에 들어간 대통령에겐 국가의 이익이 더 중요한 것이란다. 때로 대통령은 교묘하고 섬세하게 정치적인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는 게야.
네가 이 대통령의 심정을 안다면 그렇게 지엽적인 걸을 가지고 시비를 걸진 않을 것이다. 전쟁 중이나 그 후 그가 대한민국의 이익에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는가를 안다면 그런 소리를 못할 것이다.
국민을 상대로 거의 같은 표현을 사용했는데도 미국은 그런 대통령을 4번이나 뽑아주고 훌륭한 대통령이라고 존경하는데 남한의 가축 떼들은 독재자고 거짓말쟁이라고 거장의 뒷꿈치를 물고 난리 부루스를 치는구나 한심한 작자들...
야. 사기치지마. 임마
이 박사께서 달아준 자유민주주의 체제라고? 웃기는 소리하네.
누가 보면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위해 이박사님께서 신개념이라도 소개한 줄 알겠다?
이박사가 무슨 환웅이냐?
너 우리나라 건국헌법 전문 읽어봤어?
1948년 공포된 건국헌법에 이미 우리나라는 '(개인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민주독립국가'라 명시되어 있어.
그리고 그 헌법전문에서 명시된 '위대한 독립정신'인 3.1운동을 계기로 이미 '민주공화국'이란 정체성은 확립된 바 있고 이후 상해임시정부의 헌법에서도 줄곧 '민주공화국'이란 정체성을 확고히 명시하고 있었어.
따라서 이박사가 없었으면 우리가 무슨 왕조시대나 공산독재체제로 바뀌었을 것처럼 말하는 건 웃기는 사기야. 더구나 남한에 미군이 점령군으로 진주한 이상 볼셰베키적 공산독재체제는 성립되기 어려운 일이란 걸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잖아?
너는 북한에 김일성이 없었으면 미국식 자본주의 국가가 들어설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건 어림도 없는 일이야.
그러니 어차피 이박사가 없었어도 우리가 왕조국가나 공산체제가 될 여지는 없었어.
홍준표는당대표라는 자야. 그럼 이승만 대통령의 수많은 업적 중 만분의 일만 얘기해주마~
1953년 당시 남한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4월 26일 판문점에서는 본 회담이 재개됐단다. 이제 협상은 송환거부 포로처리 문제만을 남겨두고 있었지. 중공과 개일성은 물론이고 미국 역시 하루빨리 이 지긋지긋한 6.25 동란에서 벗어나려고 했단다.
협상이 급진전 되자 당대의 전략가였던 대통령은 유엔군에서 한국군을 빼내 단독으로라도 북진통일을 이루겠다고 공언했단다. 한국군을 빼내 단독행동을 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 그것은 단지 말로써 끝나지 않았지.
우선 노 전략가의 움직임을 살펴보도록 하렴~
1953년 4월 29일 중공군 철수가 통일의 선결 조건이라고 천명하셨단다. 5월 8일엔 미 정부에 휴전 수락 거부를 통고했지.
1953년 5월 31일 일요일 이승만 대통령께선 포로 관리를 위해 중립국 군대가 오면 격퇴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셨단다.
소련과 북한의 악선전으로 인해 이승만을 독재자로 보는 나라의 지도자들도 상당 수 있었단다.
그러나 맥아더를 위시한 미군정 출신 장군들은 “이승만이 없으면 전쟁을 할 수 없으며, 그를 대체할만한 인물은 없다”고 했지. 사실 월남에서 미국은 엄청난 전비를 들이고 수많은 생명을 바치게 했지만 패했단다, 그 이유는 월남에 이승만이 없었기 때문이었지. 슨상노빨족들만 인정하고 있지 않을 뿐 이승만은 세계적으로 칭찬 받는 처칠보다 더 훌륭한 인재였단다. 단지 영국은 잘 알려진 나라이고 한국은 알려지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에 이승만이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지.
맥아더 장군은 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지. “전 세계 국가들 중에서 한국만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공산주의와 싸워온 유일한 나라입니다.”라고
뼈아픈 6.25 전쟁을 치르는 동안 이승만은 공산주의를 완전 박멸하고 싶어 했단다. 하지만 한국에서 수많은 생명을 잃은 미국은 북진통일을 주창한 이승만을 ‘귀찮은 존재’ ‘고집 센 늙은이’ ‘독재자’로 비난하며 그를 제거하려 했지. 이승만은 손사래 치며 한국을 버리려 하는 미국의 바지 가랑이를 붙잡았단다. 개인적 자존심으로 말하자면 미국을 당장 떠나라 하고 싶었겠지만 이승만은 미국에 계산 있는 오기를 부렸던 거야.
1951년 7월에 시작된 휴전회담이 근 2년간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던 중, 1953년 6월에 접어들었지. 미국의 뜻대로 휴전이 이루어지면 앞으로의 방위는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6월 6일,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문제에 대한 최종 입장을 발표했지. “우리정부는 유엔군과 공산군이 일시에 한국에서 철퇴하되, 이를 실시하기 전에 한·미 양국 간에 공동방위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승만이 요구한 한미방위조약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휴전회담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포로 송환원칙을 둘러싼 긴 논쟁이 끝나고 1953년 6월 8일, 유엔군. 공산군 양측 간의 포로송환문제가 2년 만에 타결됐단다. 조기 종전을 위한 유엔군 측의 대폭적인 양보가 돌파구였다. 송환을 원하는 포로들은 2개월 내에 맞바꾸고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은 체코. 폴란드. 인도 등 5개국으로 구성된 ‘중립국송환위원회’가 4개월 동안 이들의 귀환을 설득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지.
그러나, 노 투사 이승만은 이에 강력한 제동을 걸었단다. 한국민의 의사에 반한 휴전회담은 있을 수 없는 미국의 횡포라는 것이었지. 이는 한국 전역에 걸쳐 거센 휴전반대 운동을 유발시켰단다.
6월 8일, 한국을 배제한 채, 미국과 북한 사이에 체결된 ‘포로송환협정’에는 귀향을 원하는 포로를 휴전 성립 후 60일 내에 송환하기로 되어 있었어. 그러나 한 ·미 방위조약 체결 전에는 휴전할 수 없다고 반대하던 이승만은 반공 ·애국 동포를 북한으로 보낼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며 그 협정을 묵살했지.
한편 외교의 달인인 이승만 대통령은 슨상노빨족들은 꿈도 꾸지 못할 고도의 전략을 짜고 있었단다. 바로 반공포로 석방이었지. 이는 이승만이 미국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세기적인 대결이었단다. 반공포로! 이게 뭔지 아냐? 한국이 미국의 뜻과 다르게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었단다. 이는 미국이 한국을 지배하고 있다는 세계적 인식을 정면으로 뒤엎는 것이었지. 미국의 세계적인 자존심을 꺾는 것이었단 말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최초 반공포로 석방을 구상한 것은 그들을 공산군에 넘겨줄 수 없다는 인식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 그리고 휴전협상에서 한국의 주장이 고려되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한 것이었어.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은 제네바협정 전문을 검토하여 설사 국군의 지휘권이 유엔군총사령관에게 이양되어 있다하더라도 한국은 교전 당사국으로서 영토적인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보았지.
휴전회담장에서 포로교환 협정이 체결된 날인 1953년 6월 8일 이 대통령은 원 장군의 보고를 받고 즉시 “오늘부터 모든 헌병은 헌병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들어갈 것”을 명령하고 또 그 자리에서 반공포로 석방 명령서도 하달하였단다.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은 1953년 6월 9일 육군헌병사령관 석주암 준장, 부사령관 송효순 대령 등을 호출하여, 반공포로 석방계획을 설명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결정하였지. 그는 거사 일을 ‘6.18.24;00시’로 결정하고 광주· 마산· 부산· 영천· 논산 각 지구별로 밀사를 선발하여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단다.
한편 포로 송환 문제가 타결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휴전협상 자체를 맹렬히 반대해온 정부와 국민들의 분노는 절정에 달했지. 송환위원회가 친공적인 데다 반공포로들이 6개월 동안이나 이들의 설득공작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란다. 1953년 6월 11일 부산 학생들이 정전회담 반대 시위를 벌였지.
1953년 여름, 1년간 계속되어 온 6·25전쟁의 휴전회담은 막바지로 접어들었지. 38선 일대에서는 좀 더 많은 땅을 확보하기 위한 남북 간의 전투가 더욱 치열해졌단다. 북진통일을 주장해 온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지. 미국도 고민이었단다. 이승만 대통령을 끌어안을 것인가 말 것인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저울질을 계속하고 있었단다.
이런 와중에 이승만의 지시로 반공 포로가 석방되었는데 이 반공 포로 탈출 작전을 총괄 지휘한 사람은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이었단다.
판문점에서 휴전 회담이 급진전되는 가운데 이승만은 미국이 주도하는 휴전에 반대하며 최후의 저항으로 반공 포로 석방을 준비하고 있었지. 1953년 6월 18일 새벽 2시 부산, 마산, 논산 등 전국에 산재한 포로수용소에서 2만 7천여 명의 반공 포로들이 탈출했단다. 포로수용소는 국군의 관할이 아니라 미군의 관할이었어. 다만 미군의 지휘 하에 국군의 경비 부대와 헌병이 경비를 맡고 있었던 거지. 그런데 원용덕의 지시로 포로수용소를 경비하던 한국인 병사들이 같은 시각에 전국의 포로수용소 철조망을 뚫고 전등을 꺼 반공 포로들의 탈출을 방조했던 것이란다.
27,000여 명의 도주 포로 중 931명만이 유엔군에 의해 재수감됐지.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 소식에 세계는 경악했지. 아이젠하워는 우방을 잃는 대신 적을 하나 얻었다고 개탄했고, 영국 수상 처칠은 이승만을 배신자라며 비난했단다. 한편 공산 측은 미국이 포로 석방에 공모했다고 비난하며 휴전회담을 즉각 중단했지. 그러나 이들보다 우리의 대통령은 단수가 훨씬 높았단다. 이들이 빨리 휴전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도박을 한 것이니까...
다음 날 이승만은 자신이 반공포로 석방을 명령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단다. 이승만은 반공 포로를 석방함으로써 어떤 일이든 그의 바람대로 관철되지 않으면 미국의 허락 없이도 단독행동을 할 수 있다는 그간의 경고를 입증한 셈이었지. 사실 반공포로 석방은 강대국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로서는 상상하기 매우 어려운 강력한 조치였단다.
한미관계는 극도로 악화됐지.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은 전쟁 직후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넘긴 대전협정을 위반한 것이었기 때문이지. 미국은 52년부터 검토한 이승만 제거 계획에 재시동을 걸었단다. 이 계획의 목표는 쿠데타를 감행해 이승만을 감금시키고 휴전협정을 매듭짓는 것이었지.
「사실 1952년 봄에 부산에 있는 미 대사관 직원들이 쿠데타 계획을 실행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미군에 의해 저지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군은 38선 뒤의 정치적 분열이 걱정되었고 미군이 손을 떼면 한국 정부가 전복돼 정부 지도부가 바뀔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국이 기꺼이 이승만에 동조했습니다.」- 윌리엄 스툭 미국 조지아대 교수
미국은 반공 포로 석방이 휴전 회담을 파국으로 몰고 갈 것을 우려했지. 또 1950년 7월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미군에 이양할 것을 천명한 대전(對戰) 협정을 위반한 것에 대해서도 예민하게 반응했단다. 즉 미군에 전혀 알리지 않고 국군이 반공 포로 탈출 작전을 수행한 것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했던 것이지. 미군이 탱크와 헬기까지 동원했지만 주민들이 이들에게 옷을 갈아입히고 침식을 제공하며 돕는 데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지. 3만 5,600여 명의 반공포로 가운데 자유를 찾은 포로가 2만 7,400여 명이나 됐단다.
1953년 6월 23일 피어슨 유엔총회 의장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반공포로 석방에 항의하기도 했단다.
1953년 6월 24일 외교의 신 이승만 대통령께선 현 상태에서 휴전이 되면 국군은 유엔군 사령관의 휘하에서 철수하겠다고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에 통고했지.
제거가 아니면 타협이었단다. 휴전을 낙관하던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의 동의 없이는 휴전이 어렵다는 것을 절감했단다. 당대 최고의 귀재 이승만 대통령의 전략이 적중한 것이지. 미국은 클라크 사령관과 로버트슨 특사를 파견해 이승만과의 타협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단다. 전쟁 발발 3년이 되는 1953년 6월 25일 로버트슨 특사가 한국에 도착했지. 이튿날부터 외교의 신이라 불리우는 이승만과 로버트슨 사이에 작은 휴전 회담이 시작됐단다.
보름간 14차례의 줄다리기 끝에 7월 10일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으로부터 상호방위조약과 한국군(정규 20개 사단. 예비 10개 사단과 이에 해당하는 해. 공군) 계속 지원, 그리고 10억 불의 경제 원조를 보장받는 대신 휴전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단다. 사실 미군이 철군하고 나면 중공의 위협이 상존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지. 위기를 기회로 바꾼 이승만의 외교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아니더냐.
휴전을 놓고 이승만과 대립했던 로버트슨 미국무부 차관보는 훗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단다.
“이 대통령은 전 국민을 분발시켜 공산주의와 싸우도록 만들었습니다. 세계의 그 어느 나라 지도자들에게도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한미상호조약이 북괴와의 대결 속에 대한민국에 얼마나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했는지는 정통 애국세력이라면 모두 감사하고 있는 일이란다.
다음은 위대한 근대화의 영도자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진실을 밝혀주마. 그러기 전에 일단 팩트를 가지고 정확히 말해주기 바란다. 난 두루뭉실 어쩌고 하는 것에는 질색이거든
어디서 자료를 주워들었는가 본데, 물론 이 베어울프님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 그런데 홍준표는당대표라는 자야. 우선 북괴에 박통께서 극비리에 미국보다 먼저 북한에 유신을 알린 날짜를 먼저 얘기해주렴. 그럼 내가 그 시점부터 전후를 모두 밝혀주마 ^^
네 글 보니까 이건 뭐 신앙간증도 아니고 손발이 오그라든다.
대전에 도망가서 자기가 서울에서 끝까지 지킬테니 걱정 말라던 연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고 묻지도 않은 반공포로 얘기는 끝이 없구나. 나도 반공포로 부분에 대해서는 좋게 생각하니 일절만 해.
그리고 박정희에 대해서 역시 내가 먼저 운을 떼었으니 모두 밝혀주마라고 큰소리만 치지 말고 성의는 보여봐라. 네가 말하는 팩트 좀 보고 얘기 나눠보자 응?
야~~~~ 이 멍청한 놈아.
내가 말한 날짜가 그냥 남북대화나 그딴 거를 도모하기 위해 물밑 접촉한 거를 말하는 건 아니잖아. 이 놈 정말 머리가 모자라는 놈 아냐?
내가 말한 접촉이란 건 유신헌법 개정에 대해 북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했다는 점이야. 북괴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야 하는 긴급상황이라고 구라치고 독재적 헌법개정까지 강행하면서 밑으로는 몰래 적국인 북한에게 양해를 구하는 게 정상으로 보이냐?
한심한 놈.
너 말하는 거 보니 너 좋아하는 팩트도 제대로 모르고 하는 소리같다. 안타깝네.
방북은 왜 한다는 것이고?
돼중, 뇌물현과 다를 바 없는 자임
지금 대한민국엔 기회주의자들만 득실거리고 있다. 다시 한 번 21세기형 이승만, 박정희 같은 위인이 나와야 이 나라는 진정 일류 선진국가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다.
- 홍준표는당대표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1-09-29 04:47:29
홍준표가 북한 가는 게 그의 독단적 판단이라 생각하나?
이승만, 박정희같은 위인이라고? 웃긴다.
북괴가 남침하자 저 혼자 살자고 대전으로 튄 것도 모자라, 대전에서 서울시민들에게 자기는 서울에서 끝까지 서울을 사수할 것이니 걱정말라 했지. 그러고는 피난민들 들끓는 한강철교 끊어버리고... 참 대단한 위인이구만.
박정희는 북괴의 위협을 막아야 하는 위급한 상황이라며 전격적으로 유신헌법으로 개정했는데, 알고 보니 사전에 극비리에 미국보다도 먼저 북한에 그 사실을 메시지로 알렸더라. 이건 명백히 간첩질이잖아.
근데 왜 알렸을까? 그런 건 생각해 봤나?
어디 하나하나 논파해보지. 쫙 보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슨상노빨족들은 거짓과 선동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진실 앞에 무너지기 십상이지.
자 보자~ 우리보다 월등한 화력을 가진 집단이 그것도 연습 비행기밖에 없고 탱크도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더구나 기습공격을 당했는데 국군통수권자가 포로로 잡혀야겠냐? 대통령이 잡혔으면 그 이후 전쟁이 계속될 수 있었을까? 아마 인천상륙작전도 없었을 것이고 한미상호조약도 체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슨상노빨족들의 진심은 그때 이승만 대통령께서 북괴에 잡혀 적화통일 되었길 바라는 심정이겠지 ㅋ
한강철교를 끊은 것은 이승만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결국 이 사건은 당시 폭파 책임을 맡았던 공병감 최창식 대령이 ‘적전비행죄’로 사형당하는 것으로 종결되었지. 그러나 최 대령은 명령만을 집행했을 뿐 실제 조기 폭파를 명령한 자는 채병덕 총장으로 알려져 있다. 오케이?
대한민국이 조선왕조야? 대통령이 왕이야?
만약 대통령이 적에게 잡힌다면 일시적인 지휘체계의 타격이야 있겠지만 왕조의 왕이 잡힌 것도 아닌데 나라가 망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하나?
그리고 이승만이 대전으로 도망가서 자기도 서울에 있고 서울을 꼭 사수할테니 서울시민들은 아무 걱정말라고 방송한 것은 분명한 사실 맞지?
왜 댓글에서 그 내용은 말 안해? 대답해 봐.
그리고 총장이 한강다리를 끊으라는 명령을 내렸고 현역 대령이 그 임무를 수행했는데 그런 중대한 결정을 국가원수인 대통령은 몰랐다고?
당신은 그걸 믿나? 참 대단한 믿음이네. 신앙이야. 신앙.
어디 볼까나?
조선왕조? 엥??? ㅋㅎㅎㅎ
이놈이 갑자기 돌아버렸나?
야 이놈아 일단 산수 좀 배워보자
넌 2011년 10월 달에 살고 있지?
너 같은 가축 떼도 이 박사께서 달아준 자유민주주의 체제란 간판 때문에 그나마 61년째 그 체제 하에서 자유를 떠들며 살고 있는 게야
어쩜 이렇게 슨상 노빨들은 대가리가 안 돌아가고 모든 것을 지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만 볼까???
1950년 당시면 쨔샤~
조선왕조가 멸망된 때로부터 40년 지난 시점이야. 오히려 조선왕조와 더 시간적으로 가까운 시기란다. 그 당시 국민 수준이 그랬던 게야
머지리 놈아 그리고 1950년이면 울나라 5천년 역사상 민주주의란 걸 시작한 지 2년도 안 된 시점이란다.
지휘체계에 타격만 있겠냐? 넌 그럼 그 당시 누가 이승만 대신 대통령을 대신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냐? ㅎㅎㅎ
윤보선이, 장면이?
과연 그들이 한미상호조약 같은 것을 얻어낼 수나 있을까? ㅎ
하지만 그대들은 내용의 진실을 소매치기 하고 감성만을 앞세움으로써 이성의 문을 닫아버리는 자들이기에 구제불능이여~
한 가지만 예를 들어주마
이승만과 거의 같은 시대 대통령을 했던 루스벨트라는 분이 있었단다. 미국 역사상 4선 대통령을 역임한 바 있지. 2차 세계대전 당시 그는 어떻게 해서든 히틀러와 전쟁 중인 영국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애쓰고 있었단다. 그러나 1940년 대선에서 그는 국민들 앞에 나와 ‘여러분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여러분의 아들들을 외국의 전쟁터로 보내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단다.
물론 그 후 국민을 속이고 전쟁에 참전했지.
만약 우리들 각자가 루스벨트라면 전쟁이 터지자마자 나가서 싸우자고 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가만해 내버려 두고 챙길 이익은 다 챙겨놓으면서 하는 것이 좋을까? 어느 것이 국가와 국민에게 이익일까? 현실 정치에 들어간 대통령에겐 국가의 이익이 더 중요한 것이란다. 때로 대통령은 교묘하고 섬세하게 정치적인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는 게야.
네가 이 대통령의 심정을 안다면 그렇게 지엽적인 걸을 가지고 시비를 걸진 않을 것이다. 전쟁 중이나 그 후 그가 대한민국의 이익에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는가를 안다면 그런 소리를 못할 것이다.
국민을 상대로 거의 같은 표현을 사용했는데도 미국은 그런 대통령을 4번이나 뽑아주고 훌륭한 대통령이라고 존경하는데 남한의 가축 떼들은 독재자고 거짓말쟁이라고 거장의 뒷꿈치를 물고 난리 부루스를 치는구나 한심한 작자들...
이런 유교적 근본주의에 빠진 나라들이 공산주의가 되는 것이 자명할 진대 우리에겐 이승만 대통령이 있었기에 아시아 대륙에서 유일하게 공산화가 되지 않았지. 정말 하나님이 보우하사다 ^^
슨상노빨인 너와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전혀 달라. 전혀 공약수가 없어 보이는구나~
니가 채병덕 총장을 알기나 하냐? 모자란 인간~
뚱뚱했던 그는 전쟁이 발발한 날도 6시간이나 잠을 잤던 인간이다. 결국 신성모 국방장관의 명으로 선두에 서서 독전할 필요가 있다는 편지를 받고 나갔다 결국 전사했지.
어찌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과 슨상, 놈년이 국민을 위해 저지른 대국민사기와 비교를 할 수 있으리...
슨상, 노빨의 신앙에 빠진 자들은 절대 궤도수정을 하지 않을려고 하지 ^^
네 놈은 동문서답하는게 특기야?
왜 묻는 말에는 대답않고 딴 소리만 길게 해?
그니까 대답해 봐.
이승만이 한국전쟁나고 그러니까 정확히 6월 27일 새벽2시에 대전으로 도망가서 서울을 사수할테니 동요말고 안심하라는 방송한 게 사실이야? 아니야?
딴 소리 말고 그거나 대답해 봐.
이 박사께서 달아준 자유민주주의 체제라고? 웃기는 소리하네.
누가 보면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위해 이박사님께서 신개념이라도 소개한 줄 알겠다?
이박사가 무슨 환웅이냐?
너 우리나라 건국헌법 전문 읽어봤어?
1948년 공포된 건국헌법에 이미 우리나라는 '(개인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민주독립국가'라 명시되어 있어.
그리고 그 헌법전문에서 명시된 '위대한 독립정신'인 3.1운동을 계기로 이미 '민주공화국'이란 정체성은 확립된 바 있고 이후 상해임시정부의 헌법에서도 줄곧 '민주공화국'이란 정체성을 확고히 명시하고 있었어.
따라서 이박사가 없었으면 우리가 무슨 왕조시대나 공산독재체제로 바뀌었을 것처럼 말하는 건 웃기는 사기야. 더구나 남한에 미군이 점령군으로 진주한 이상 볼셰베키적 공산독재체제는 성립되기 어려운 일이란 걸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잖아?
너는 북한에 김일성이 없었으면 미국식 자본주의 국가가 들어설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건 어림도 없는 일이야.
그러니 어차피 이박사가 없었어도 우리가 왕조국가나 공산체제가 될 여지는 없었어.
1953년 당시 남한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4월 26일 판문점에서는 본 회담이 재개됐단다. 이제 협상은 송환거부 포로처리 문제만을 남겨두고 있었지. 중공과 개일성은 물론이고 미국 역시 하루빨리 이 지긋지긋한 6.25 동란에서 벗어나려고 했단다.
협상이 급진전 되자 당대의 전략가였던 대통령은 유엔군에서 한국군을 빼내 단독으로라도 북진통일을 이루겠다고 공언했단다. 한국군을 빼내 단독행동을 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 그것은 단지 말로써 끝나지 않았지.
우선 노 전략가의 움직임을 살펴보도록 하렴~
1953년 4월 29일 중공군 철수가 통일의 선결 조건이라고 천명하셨단다. 5월 8일엔 미 정부에 휴전 수락 거부를 통고했지.
1953년 5월 31일 일요일 이승만 대통령께선 포로 관리를 위해 중립국 군대가 오면 격퇴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셨단다.
소련과 북한의 악선전으로 인해 이승만을 독재자로 보는 나라의 지도자들도 상당 수 있었단다.
그러나 맥아더를 위시한 미군정 출신 장군들은 “이승만이 없으면 전쟁을 할 수 없으며, 그를 대체할만한 인물은 없다”고 했지. 사실 월남에서 미국은 엄청난 전비를 들이고 수많은 생명을 바치게 했지만 패했단다, 그 이유는 월남에 이승만이 없었기 때문이었지. 슨상노빨족들만 인정하고 있지 않을 뿐 이승만은 세계적으로 칭찬 받는 처칠보다 더 훌륭한 인재였단다. 단지 영국은 잘 알려진 나라이고 한국은 알려지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에 이승만이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지.
맥아더 장군은 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지. “전 세계 국가들 중에서 한국만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공산주의와 싸워온 유일한 나라입니다.”라고
1951년 7월에 시작된 휴전회담이 근 2년간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던 중, 1953년 6월에 접어들었지. 미국의 뜻대로 휴전이 이루어지면 앞으로의 방위는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6월 6일,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문제에 대한 최종 입장을 발표했지. “우리정부는 유엔군과 공산군이 일시에 한국에서 철퇴하되, 이를 실시하기 전에 한·미 양국 간에 공동방위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승만이 요구한 한미방위조약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휴전회담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포로 송환원칙을 둘러싼 긴 논쟁이 끝나고 1953년 6월 8일, 유엔군. 공산군 양측 간의 포로송환문제가 2년 만에 타결됐단다. 조기 종전을 위한 유엔군 측의 대폭적인 양보가 돌파구였다. 송환을 원하는 포로들은 2개월 내에 맞바꾸고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은 체코. 폴란드. 인도 등 5개국으로 구성된 ‘중립국송환위원회’가 4개월 동안 이들의 귀환을 설득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지.
그러나, 노 투사 이승만은 이에 강력한 제동을 걸었단다. 한국민의 의사에 반한 휴전회담은 있을 수 없는 미국의 횡포라는 것이었지. 이는 한국 전역에 걸쳐 거센 휴전반대 운동을 유발시켰단다.
6월 8일, 한국을 배제한 채, 미국과 북한 사이에 체결된 ‘포로송환협정’에는 귀향을 원하는 포로를 휴전 성립 후 60일 내에 송환하기로 되어 있었어. 그러나 한 ·미 방위조약 체결 전에는 휴전할 수 없다고 반대하던 이승만은 반공 ·애국 동포를 북한으로 보낼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며 그 협정을 묵살했지.
이승만 대통령이 최초 반공포로 석방을 구상한 것은 그들을 공산군에 넘겨줄 수 없다는 인식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 그리고 휴전협상에서 한국의 주장이 고려되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한 것이었어.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은 제네바협정 전문을 검토하여 설사 국군의 지휘권이 유엔군총사령관에게 이양되어 있다하더라도 한국은 교전 당사국으로서 영토적인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보았지.
휴전회담장에서 포로교환 협정이 체결된 날인 1953년 6월 8일 이 대통령은 원 장군의 보고를 받고 즉시 “오늘부터 모든 헌병은 헌병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들어갈 것”을 명령하고 또 그 자리에서 반공포로 석방 명령서도 하달하였단다.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은 1953년 6월 9일 육군헌병사령관 석주암 준장, 부사령관 송효순 대령 등을 호출하여, 반공포로 석방계획을 설명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결정하였지. 그는 거사 일을 ‘6.18.24;00시’로 결정하고 광주· 마산· 부산· 영천· 논산 각 지구별로 밀사를 선발하여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단다.
한편 포로 송환 문제가 타결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휴전협상 자체를 맹렬히 반대해온 정부와 국민들의 분노는 절정에 달했지. 송환위원회가 친공적인 데다 반공포로들이 6개월 동안이나 이들의 설득공작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란다. 1953년 6월 11일 부산 학생들이 정전회담 반대 시위를 벌였지.
이런 와중에 이승만의 지시로 반공 포로가 석방되었는데 이 반공 포로 탈출 작전을 총괄 지휘한 사람은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이었단다.
판문점에서 휴전 회담이 급진전되는 가운데 이승만은 미국이 주도하는 휴전에 반대하며 최후의 저항으로 반공 포로 석방을 준비하고 있었지. 1953년 6월 18일 새벽 2시 부산, 마산, 논산 등 전국에 산재한 포로수용소에서 2만 7천여 명의 반공 포로들이 탈출했단다. 포로수용소는 국군의 관할이 아니라 미군의 관할이었어. 다만 미군의 지휘 하에 국군의 경비 부대와 헌병이 경비를 맡고 있었던 거지. 그런데 원용덕의 지시로 포로수용소를 경비하던 한국인 병사들이 같은 시각에 전국의 포로수용소 철조망을 뚫고 전등을 꺼 반공 포로들의 탈출을 방조했던 것이란다.
27,000여 명의 도주 포로 중 931명만이 유엔군에 의해 재수감됐지.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 소식에 세계는 경악했지. 아이젠하워는 우방을 잃는 대신 적을 하나 얻었다고 개탄했고, 영국 수상 처칠은 이승만을 배신자라며 비난했단다. 한편 공산 측은 미국이 포로 석방에 공모했다고 비난하며 휴전회담을 즉각 중단했지. 그러나 이들보다 우리의 대통령은 단수가 훨씬 높았단다. 이들이 빨리 휴전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도박을 한 것이니까...
다음 날 이승만은 자신이 반공포로 석방을 명령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단다. 이승만은 반공 포로를 석방함으로써 어떤 일이든 그의 바람대로 관철되지 않으면 미국의 허락 없이도 단독행동을 할 수 있다는 그간의 경고를 입증한 셈이었지. 사실 반공포로 석방은 강대국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로서는 상상하기 매우 어려운 강력한 조치였단다.
「사실 1952년 봄에 부산에 있는 미 대사관 직원들이 쿠데타 계획을 실행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미군에 의해 저지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군은 38선 뒤의 정치적 분열이 걱정되었고 미군이 손을 떼면 한국 정부가 전복돼 정부 지도부가 바뀔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국이 기꺼이 이승만에 동조했습니다.」- 윌리엄 스툭 미국 조지아대 교수
미국은 반공 포로 석방이 휴전 회담을 파국으로 몰고 갈 것을 우려했지. 또 1950년 7월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미군에 이양할 것을 천명한 대전(對戰) 협정을 위반한 것에 대해서도 예민하게 반응했단다. 즉 미군에 전혀 알리지 않고 국군이 반공 포로 탈출 작전을 수행한 것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했던 것이지. 미군이 탱크와 헬기까지 동원했지만 주민들이 이들에게 옷을 갈아입히고 침식을 제공하며 돕는 데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지. 3만 5,600여 명의 반공포로 가운데 자유를 찾은 포로가 2만 7,400여 명이나 됐단다.
1953년 6월 23일 피어슨 유엔총회 의장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반공포로 석방에 항의하기도 했단다.
1953년 6월 24일 외교의 신 이승만 대통령께선 현 상태에서 휴전이 되면 국군은 유엔군 사령관의 휘하에서 철수하겠다고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에 통고했지.
보름간 14차례의 줄다리기 끝에 7월 10일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으로부터 상호방위조약과 한국군(정규 20개 사단. 예비 10개 사단과 이에 해당하는 해. 공군) 계속 지원, 그리고 10억 불의 경제 원조를 보장받는 대신 휴전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단다. 사실 미군이 철군하고 나면 중공의 위협이 상존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지. 위기를 기회로 바꾼 이승만의 외교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아니더냐.
휴전을 놓고 이승만과 대립했던 로버트슨 미국무부 차관보는 훗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단다.
“이 대통령은 전 국민을 분발시켜 공산주의와 싸우도록 만들었습니다. 세계의 그 어느 나라 지도자들에게도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한미상호조약이 북괴와의 대결 속에 대한민국에 얼마나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했는지는 정통 애국세력이라면 모두 감사하고 있는 일이란다.
다음은 위대한 근대화의 영도자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진실을 밝혀주마. 그러기 전에 일단 팩트를 가지고 정확히 말해주기 바란다. 난 두루뭉실 어쩌고 하는 것에는 질색이거든
어디서 자료를 주워들었는가 본데, 물론 이 베어울프님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 그런데 홍준표는당대표라는 자야. 우선 북괴에 박통께서 극비리에 미국보다 먼저 북한에 유신을 알린 날짜를 먼저 얘기해주렴. 그럼 내가 그 시점부터 전후를 모두 밝혀주마 ^^
대전에 도망가서 자기가 서울에서 끝까지 지킬테니 걱정 말라던 연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고 묻지도 않은 반공포로 얘기는 끝이 없구나. 나도 반공포로 부분에 대해서는 좋게 생각하니 일절만 해.
그리고 박정희에 대해서 역시 내가 먼저 운을 떼었으니 모두 밝혀주마라고 큰소리만 치지 말고 성의는 보여봐라. 네가 말하는 팩트 좀 보고 얘기 나눠보자 응?
들어왔져?
며칠만에 들어왔더니 역시 똥을 싸놓았군 ^^
내 입장은 위에 있으니 읽어보렴
감정은 체험이라고 반역질을 해서 피해자로서 당한 원한과 복수심이 에너지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대한민국에서 시대적 상황을 무시한 채 건국대통령의 꼬투리를 도덕성의 잣대를 들이대며 그렇게 폄하할 수가 있을까?
복수심에 물들기 시작하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기 때문에 이성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법이지.
ㅎㅎ
박정희 얘기는 똥만 싸대지 말고 그 날이 언제였는지 팩트를 말해달라니까?
그럼 성의 보여준다니깐 ^^
1972년 10월 16일, 17일, 18일에 걸쳐 접촉했어.
자 이제 성의를 보여 봐.
1972년 10월 16일, 17일, 18일에 걸쳐 접촉했다구?
접촉이야 뭐 그때뿐이었겠냐?
60년대 빼더라고 그 당시와 가장 가까이는 이미 1971년에도 있었잖아
1971년 9월 20일부터 공식적인 판문점 예비회담이 있었을 정도니까
왜 그랬는지 설마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ㅎㅎ
그리고 동방정책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의회해산이라는 승부수를 던진 해인 1972년 5월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이후락 중정부장이 북괴에 다녀왔잖아~
정확한 팩트를 얘기해봐~
내가 참고로 얘기해주마
우리나라는 10월 유신 전에 이미 김종필 국무총리가 필립 하비브 주한 미국대사에게 다음날 박정희 대통령이 발표할 비상조치의 내용을 통보했단다. 물론 주한 일본대사에게도 ...
단지 김종필 총리가 이 내용을 앞으로 24시간 비밀에 부쳐줄 것을 요청했을뿐...
그리고 북괴에 알린 것이 반역질이라고?
네 머리에선 그런 생각이 들겠지
ㅎㅎ
1972년 11월 2일부터 남북 조절위 위원장 회의를 위해 북괴와 접촉은 한적이 있다.
그런데 뭐가 이상한대? 응?
자 팩트 하나 던졌으니 너도 성의 보여주렴 ^^
내가 말한 날짜가 그냥 남북대화나 그딴 거를 도모하기 위해 물밑 접촉한 거를 말하는 건 아니잖아. 이 놈 정말 머리가 모자라는 놈 아냐?
내가 말한 접촉이란 건 유신헌법 개정에 대해 북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했다는 점이야. 북괴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야 하는 긴급상황이라고 구라치고 독재적 헌법개정까지 강행하면서 밑으로는 몰래 적국인 북한에게 양해를 구하는 게 정상으로 보이냐?
한심한 놈.
너 말하는 거 보니 너 좋아하는 팩트도 제대로 모르고 하는 소리같다. 안타깝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