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계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현행대로 A등급으로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데에는 북한 김정일 정권의 붕괴로 인한 통일 가능성 등 지정학적 리스크가 크다는 판단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유럽 재정위기로 인한 세계적인 경기 둔화 흐름에도 올해와 내년 4%대 성장을 이어갈 정도로 우리나라가 견조한 성장 흐름을 이어갈 것으로 보이지만, 북한 체제의 급속한 붕괴 가능성 등 지정학적인 불확실성이 커서 등급을 올리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S&P는 17일 서울 명동 은행연합회관에서 열린 ‘한국 신용등급 전망’ 세미나에서 통일이 내년에 이뤄진다는 가정하에서 나온 경제적 영향의 추정 결과를 발표했다. 신용평가사가 일어나지 않은 일을 전제로 가정한 추정치를 발표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로 평가된다.
S&P는 이날 발표자료에서 “만약 내년에 통일된다면 1인당 GDP는 올해 2만2000달러에서 1만2000달러로 하락할 것”이라며 “북한에 대한 막대한 재정지출은 올해 GDP 대비 약 2% 수준의 재정 흑자가 내년 3% 수준의 재정 적자로 전환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1인단 GDP(국내총생산)이 반토막 나고 1년 사이에 50조원 가량의 재정 투입이 필요하다는 게 S&P의 계산이다. 통일 이후 GDP대비 재정적자 비율은 5.7%까지 확대될 것으로 전망됐다.
S&P는 이런 전망치를 ▲전쟁없는 북한 정권의 자체적 붕괴 ▲한국의 북한 행정 통제권 확보 ▲국경 폐쇄 통한 북한 주민들의 유입 통제 ▲통화ㆍ재정ㆍ금융 시스템의 완만한 통합 등을 전제로 깔고 도출했다. 1인당 국민소득(GDP)도 올해 2만2800달러인 한국과 1인당 GDP가 920달러로 추정되는 북한 경제가 단순 결합한다는 걸 전제로 한 것이다.
S&P측은 강력한 수출 경쟁력을 발판으로 하는 한국 경제의 경쟁력이 통일 이후 2~3년 가량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내놨다.
킴엥 탄 S&P 상무는 “원화는 15% 정도 평가 절하 될 것이지만, 한국의 수출 점유율이 크게 늘지 않고 수년동안 경상수지 적자를 겪게 될 것”이라며 “경제부문의 경우 통일 후 지속가능한 공공재정, 균형잡힌 경제적 성장, 쇼크로부터의 견고함을 갖추고 있긴 하지만 통일 이후 약 2~3년간은 불확실성이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통일 이후 막대한 정부 지출 증가는 대외 채무 증가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그는 “통일 이후 2012년~2015년 경상수지 적자가 GDP의 17%에 육박할 것”이라며 “대규모 투자자금 조달 위해서 금리가 급격하게 인상될 가능성이 있고, 외국인 투자 자금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외채가 급증해 현재의 순채권 국가 지위를 잃고 순채무 국가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이에 반해 통일 이후 기대되는 북한 노동력의 저임금 효과는 통일 이후 10~15년 이후에나 가능하다는 분석도 나왔다. 킴엥 상무는 “통일 후 입법 및 계획된 정책 실행의 시간이 걸리고 계획 경제가 시장 경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단기적으로 여러가지 혼란이 생길 것”이라며 “독일이 통일된 이후 동독 총생산이 (통일 이전보다)30% 가까이 감소한 것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S&P측은 통일 이후에는 한국의 국가신용등급 하향이 불가피하다는 점도 피력했다. 킴엥 상무는 “통일 후 한국의 신용등급은 현재의 'A'에서 한단계 정도 낮은 수준인 'A-'~'BBB+' 수준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S&P 측의 주장에 대해 상당수 전문가들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장 빠른 경제회복세를 보이는 한국에 대해 신용등급을 올리지 않는 이유를 해명하기 위한 논리라는 시각이 있다. 통일 이후 등급 하향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등급을 올리기 부담스럽다는 S&P의 속내를 보여주는 것이란 설명이다.
일각에서는 미국 등 선진국 신용등급을 강등한 ‘신용평가 저승사자’인 S&P가 한국만 신용등급을 올리기 부담스러워 ‘북한 지정학 리스크’를 필요 이상 강조한다는 시각도 있다. 재정부의 한 관계자는 “재정 위기 이후 선진국 신용등급이 대체로 내려가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만 등급 상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면서 이런 시각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