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전 총리(왼쪽)가 자택에서 본사 박보균 편집인에게 6·25 당시를 설명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치밀한 준비의 북한과 대비하지 않은 무기력한 대한민국-. 전쟁 의지를 과시했던 군 리더십과 무방비의 유약한 리더십-. 1950년 6·25 한국전쟁은 그런 구도 속에서 벌어졌다.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북한반 선임 장교였던 김종필(JP) 전 국무총리-. 본사 박보균 편집인이 지난 20일 JP를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만나 대담을 나눴다. 그는 정확한 기억과 자료로 개전 당시의 전황, 지휘부 동향의 진실을 회고했다.
북한의 남침(南侵) 준비는 한 해 전부터 극비로 진행됐다. 하지만 징후는 드러났다.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에서 그것을 탐지했다. 전투정보과는 49년 12월 ‘연말 종합 적정(敵情:적의 정세) 판단서’를 만들어 상신했다. 그 보고서는 ‘남침 임박’이었다. 육본 지휘부는 이를 무시했다. 전투정보과는 적의 동향을 다루는 가장 민감한 신경조직. 과장은 유양수 소령, 핵심 멤버는 상황실장 격인 문관 박정희(좌익 숙군사건으로 무기징역·소령파면 뒤 구제), 북한반 선임장교 김종필 중위, 남한반의 이영근 중위였다. 6·25 때 남침의 성격과 전체 윤곽을 육본에서 제대로, 최초로 파악한 곳이 전투정보과다.
6·25전쟁 초기 김종필 중위(괘도 지시봉 든 이)가 육군본부 상황실에서 적정 상황에 대한 종합적인 브리핑을 하고 있다. [김종필 전 총리 제공]
-적정 판단서의 남침 예보는 정확합니다. 그리고 6월 중순부터 38선 근방 북한군의 동향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24일 토요일 자청해서 전선이 위급하다는 상황보고를 하셨는데요.
“아무래도 불길했지…. 오전 10시에 정보참모 장도영 대령에게 ‘적의 공격이 임박해 보인다’면서 브리핑을 하겠다고 요청했지요. 30분 뒤에 상황실에서 육본 핵심 참모였던 장도영 정보국장, 강영훈 인사국장, 장창국 작전교육국장, 양국진 군수국장, 고급부관 황헌친 대령 등 수뇌부들이 모였어요. 내가 그들 앞에서 적의 공격 징후가 농후하며, 따라서 전군에 비상태세를 걸어야 한다는 내용의 브리핑을 했습니다. 적의 주공(主攻)인 동두천과 조공(助攻)인 개성에 정찰조를 침투시키자고도 했어요. 그리고 작전과 정보가 합동근무 체제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했지요. 그러나 참모들은 다른 데를 쳐다보는 듯 시큰둥했어요. 나중에 장도영 대령만 남았는데, 쓴웃음을 지으면서 ‘우리 할 일만 하자’고 말합디다. 참모들이 내 상황 판단에 동의하지 않은 거지요.”
- 그럼에도 브리핑 직후 정보국 차원에서 비상 작전에 들어갔다고 돼 있습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어요. 오전 근무가 끝나서 육본이 한적하기만 했는데, 바로 폭풍전야의 고요와 같다는 느낌이 왔지요. 아무래도 38선 상황이 긴박해 보여서 북한반 책임장교인 내가 퇴근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당직인 남한반 이영근 중위를 쉬게 하고 대신 당직 근무를 하기로 했습니다.”
-24일 육본 정보국 당직근무자로서 전쟁의 발발 과정을 운명적으로 지켜보시는데요.
“나는 상황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고 판단해서 청단과 백천, 용현 등 10곳의 정보국 파견대(OP)에 1시간 간격으로 상황을 보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동두천 동쪽에 있는 양문리 파견대로부터 25일 새벽 1시쯤에 ‘북한의 전차부대가 기동을 시작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어요. 이어 개성 정면에서도 ‘적군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해요. 2시 지나면서는 모든 파견대로부터 ‘북한군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3시 지나면서는 드디어 동두천 등에서 ‘적의 포탄이 떨어진다’는 얘기가 들어와요. ‘듣지도 보지도 못한 대구경의 포탄이 마구 떨어진다’며 난리였어요. 전선이 끓고 있었던 겁니다. ‘큰일이 벌어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쟁이 터진 거지요.”
- 적정 판단서도 무시되고, 24일 아침 보고도 외면당했습니다. 그런 실망과 허탈 속에 적의 전면 남침을 보고 어떤 심경이 들었습니까.
채병덕(1914~1950)(左), 신성모 (1891~1960)(右)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실망과 허탈감도 없지 않았지만, 너무 큰일이 벌어졌다는 생각에 가능하면 침착하게 전선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파악하려고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어요. 함께 적정 판단서를 만들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28일 후퇴하던 수원에서 나를 보더니 ‘아우님, 우리 예감이 맞긴 맞았는데, 불행한 일이야’라고 하더군요.”-전쟁 직전 우리는 일선 사단장을 대거 교체했고, 비상경계를 풀어 6월 23일에는 장병의 3분의 1을 외출과 외박으로 내보냈습니다. 전쟁 발발 하루 전에는 육본에서 술과 댄스파티가 있었습니다. 이런 인사 난맥, 적정 혼선, 지휘부 무기력에는 북한의 공작과 간첩 침투 때문이라는 의심이 있습니다.
“군사적인 분야에서 그런 정황은 없다고 봐요. 가장 큰 원인은 인민군이 쳐들어올 리가 없다는 맹신이었습니다. 49년 연말에 작성한 정보국의 전쟁 발발 가능성 경고도 그래서 무시했습니다. 저들이 쳐들어올 리 없다는 전제 하에 지휘관을 교체하고, 비상경계도 풀면서 사실상 전선을 공백 상태로 만든 겁니다. 24일 밤 사단장급 지휘관들은 대부분 새로 만든 장교 구락부에 가서 파티에 빠져 있었습니다.”
- 파국(破局)이 너무 쉽게 다가왔습니다. 군 지휘부에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육본 총참모장에 오른 채병덕 소장(병기 장교 출신)은 전선 경험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6월 10일에 교체된 사단장들은 현장에도 잘 있지 않았어요. 자신이 새로 부임한 부대의 현황도 파악하지 못한 채 전쟁을 맞았다고 보면 됩니다. 유양수 과장도 6사단 참모로 전근명령을 받았지요.”
-전쟁이 벌어지자 군 리더십이 우왕좌왕한 모습이 많이 눈에 띕니다.
“어떤 참모는 전날 열렸던 장교 구락부 파티에 참가한 뒤 계속 술자리를 즐기다가 늦게 귀가한 모양입니다. 집에 전화도 놓지 않은 상태여서 연락이 한동안 두절됐어요. 헌병이 지프를 몰고 그 집 근처에 가서 가두방송을 해 겨우 찾아내기도 했습니다. 핵심 참모가 북한군이 개성을 점령한 오전 10시 넘어서 자리에 복귀한 겁니다. 전방부대 사단장들과 다른 참모들도 대부분 전날 파티로 소속부대를 떠나 비상령 하달과 방송을 듣고 10시 전후 육군본부나 소속 부대에 도착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육본 요원들은 오후 2시 넘어서야 집합을 완료할 정도였습니다.”
- 군 지휘부가 속수무책이었지요. 패주와 후퇴, 혼돈과 지리멸렬, 집단 불안과 공황(恐慌)에 빠져 있던 것으로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육본 당직사령에게 내가 가서 급히 ‘전군에 비상을 걸어라’고 했더니 ‘내가 무슨 권한으로 그런 걸 해’라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총참모장에게 보고했으니 비상 걸어야 한다’고 재촉했습니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파티에 참석했다가 새벽 2시에 귀가해 잠을 자다가 5시에 당직사령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상황을 알았답니다. 채 총참모장이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를 않아 장관 숙소로 찾아가 상황을 보고했대요. 육본으로 돌아온 채 총참모장은 아침 7시에야 전군에 비상을 내렸습니다.”
-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은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신성모 장관은 오전 10시에 경무대(현 청와대)를 찾아갔으나, 이 대통령은 경복궁 경회루인가, 아니면 창덕궁인가에를 가서 낚시를 즐기고 있었어요. 30분 후에 집무실로 돌아온 대통령에게 신 장관이 보고를 하자 침통한 표정을 짓던 이 대통령은 ‘탱크를 막을 수는 없을 텐데, 그놈들 장난치다가 그만 두겠지’라고 했답니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이어 오후 2시에 열린 각의에서 ‘전면 공격은 아닌 것 같다. 후방 사단을 동원했으니 적을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허황된 보고를 했대요.”
- 개전 초기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길고 처절했던 나흘이었지요. 우리 지도부가 드러냈던 가장 허약한 모습은 무엇이었습니까.
“전쟁 발발 사흘째인 27일 채 총참모장이 나더러 의정부 7사단에 가서 유재흥 사단장을 만나 편지를 전한 뒤 전황을 파악해 오라고 하더군요. 돌아와서 ‘오늘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온다’고 보고했습니다. 채 총참모장이 ‘알았네’라면서 주머니에서 미국제 럭키스트라이크 담배를 꺼내 내게 건네는데 그 손이 마구 떨려 담배가 한 개비씩 그냥 밀려 나오더라고요. 마구 떨리던 손이 지금까지도 가장 뚜렷하게 기억납니다.”
김종필 중위가 본 27일 창동 전선
1950년 6월 27일 정보국 북한반 선임장교였던 김종필 전 총리가 창동 전선으로 향하고 있다.
서울에 남느냐, 수도를 버리느냐. 6·25전쟁이 터지면서 북한군이 거침없이 밀고 내려오자 정부와 군 수뇌부는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26일 오전 3시30분쯤, 국방장관은 같은 날 오후 2시에 각각 서울을 떠났다. 남은 것은 군 수뇌부였다.채병덕 육본 총참모장은 27일 오전 9시 “정보국에서 똑똑한 사람 하나 데려오라”면서 김종필 정보국 중위를 사무실로 불렀다. 밀봉한 봉투를 건네면서 “창동 전선을 방어하고 있는 유재흥 7사단장에게 편지를 전하고 회답을 받아오라”고 지시했다. 봉투에 든 편지의 내용은 지금의 서울 도봉구 창동 전선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는가였다. “정부는 남하할지라도 군은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다짐했던 군이었지만 역시 서울에서 떠날 생각을 품었던 것.
김 중위는 지프를 타고 포탄이 떨어지는 수유리를 지나 창동으로 갔으나 7사단은 이미 지리멸렬한 뒤였다. 적진에서 날아오는 포탄으로 논의 진흙이 이리저리 튀어 김 중위의 옷에 달라붙었다. 겁도 났지만 김 중위는 “차라리 적과 싸우다 죽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더 전진했다. 그러나 유재흥 사단장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적군에 밀려 쫓겨오는 국군 장병들은 차라리 몽유병(夢遊病) 환자와 같았다고 했다. 이들의 후퇴를 막기 위해 헌병 독전대(督戰隊)가 총을 들이댔지만 국군들은 그 총구를 손으로 밀면서 그저 내빼기에 바빴다. 헌병 저지선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군대 밥차가 있었지만, 후퇴하는 장병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도망치고 있었다.
김 중위는 7사단장 부관을 만나 편지를 건넸다. 돌아오는 길에 김종갑 7사단 참모장을 만나 상황을 물었다. 그는 “오늘 밤도 지탱하기 어렵다”고 했다. 정릉 쪽에서는 새로 수도 방위 임무를 맡은 이용문 대령을 만났다. 그가 가리키는 북쪽 산허리에는 이미 인민군들이 넘어오고 있었다. 김 중위는 돌아와 이런 상황을 채 총참모장에게 보고했다. 그는 당황하기만 했다. 담배를 꺼내는 손도 떨었다.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했던 육군본부는 27일 오후 1시30분 서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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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유광종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