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정권의 첫 기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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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정권의 첫 기만
1945, 8, 15일로 5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전해 오며 민족과 더불어 희로애락을 함께 해온 한반도가 둘로 갈라졌다.
우리 민족은 독립국가로 홀로 서기에는 너무도 약소한 민족이었기에 열강들의 의지에 다라 분열되어 60여년을 흘러오며 세계 18대 경제 강국으로의 부상과 세계 최빈국의 나락으로 대조되는 서로 다른 이념의 자화상을 남기였다.
한 영토에 한 피 줄을 이은 민족일진대 어찌하여 오늘의 판이한 두 현실이 되었는가...?
공산과 자유로 서로 다른 세계를 지향하는 남과 북은 시작부터가 그 진의가 달랐다.
요즘 언론에 어떤 사람은 북한의 “토지개혁에” 대하여 농민들의 숙원을 풀어준 첫 민주개혁 이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몰라도 너무도 모르는 소리라 하겠다.
“토지개혁” 1946, 3, 5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정령으로 실시된 첫 개혁으로서 5정보 이상의 토지 소유자(지주)들에게서 무상몰수 하여 무상으로 땅이 없거나 적은 농민들에게 나누어준 시책으로 북한에서는 첫 민주개혁이라고 한다.
당시 김일성은 갗 해방되어 혼란된 정치정세 속에서 민심을 장악하기 위하여 인구의 80% 차지하는 농민들의 지지가 필요 하였다.
해방후 북한의 농경지는 공산정권에 적대적 이였던 친일세력들이 소유가 많았으며 농민들은 대다수가 빈농과 소작농으로서 매우 열악한 삶속에서 자기의 땅을 절절히 희망 하였다.
이념 자체가 공산을 지향한 북한정권은 이 민심을 이용하여 지주의 땅을 빼앗아 나누어 줌으로서 친일세력을 숙청하고 지지 기반을 구축하려고 하였다.
자기 땅을 가지는 것이 소원이었던 농민들은 북한 정권의 시책을 “세기적 숙망”의 실현으로 열렬히 환영하였지만 이것은 무서운 계급혁명의 시작이었다.
땅을 빼앗긴 사람과 그 땅을 가진 사람... “토지개혁”은 이념을 떠나 사람들에게 증오를 산생 시켰으며 피의 악순환을 불러왔다. 하지만 민심을 이용한 김일성의 전략을 성공적이었으며 그 효과는 6, 25를 통해 드러났다.
농민들은 땅을 준 정권을 위하여 맹목적인 추종을 했으며 그 땅을 다시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그러나 토지개혁의 진실을 밝혀 보면 북한정권은 자신들의 정책실현을 위하여 인민들을 철저히 기만 했다.
무형이던 유형이던 내 것이라면 그 소유권과 결정권은 나한테 있어야 한다.
당시 북한정권은 토지를 나누어 주며 농민들에게 토지를 이용한 착취 현상을 막는다는 미명하에 그 땅에서 대대로 농사를 지을 수 있으나 땅을 다룰 능력이 없으면 전작도 소작도 줄 수 없으며 팔수도 없고 다시 국가에 내어 놓게 법률로 규정 하였다.
이는 따지고 보면 농민들에게 토지 결정권은 없고 경작권만을 부여한 것으로 토지를 국가에 예속시켜 철저히 국유화 한 것이다.
북한정권은 “토지개혁”의 미명하에 농민들을 기만하여 자신들의 정책수행을 위해 이용했던 것이다.
후일 김일성도 북한의 최고 당 교육기관이였던 “김일성고급당학교” 기념 행사에서 연설하며 토지개혁을 철저한 국유화였다고 말했다.
오늘 날 우리는 “토지개혁”으로부터 인민들에 대한 첫 기만을 시작한 북한정권에 대하여 객관적인 시점에서 그 진정성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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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남한의 친북좌파새끼들이 그렇게 둔갑을 시킬뿐이죠.
이제는 모두 지나간 일일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