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량미달者들이 組閣에 참여한다면 능히 빨갱이의 大小 폭동 그 도발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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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4:8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어제는 하나님의 지혜만이 하나님의 지혜를 높일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오늘도 역시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지혜를 온전히 포옹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은 인본주의의 포옹을 원치 않으시고 그것은 도리어 하나님의 요구에 미흡한 것이다. 때문에 인간이 지식을 얻기에 급급한 것은 어리석은 선택이 되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의 후반절의 의미는 ‘when thou dost embrace her.’의 원어는 chabaq {khaw-bak'}이라 발음하고 그 뜻은 ‘to embrace, clasp, to fold one's hands in idleness등을 담고 있다.
사람이 포옹하는 것은 ‘embrace’ 여러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용서의 抱擁(포옹)도 있고 에로스의 포옹도 있고 스톨게의 포옹도 있고 필리아의 포옹도 있고 이타심의 포옹도 있을 것이다. 본문의 포옹은 아가페의 포옹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에게만 만족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인 포옹의 의미는 아가페이다. 하나님의 지혜를 포옹하려면 그 짝된 지혜를 마음에 받아들여 그 지혜로 포옹해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의 짝만이 동질愛(애=아가페)를 가진다. 그 동질愛(애)만이 진정한 포옹을 한다.
누구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사랑이 찾아와서 두드리면 그에게 문을 열어주는 즉시 그 사랑이 들어오고 점차적으로 더 많이 들어오시는데 이를 단쇠의 과정으로 비유한다. 鐵(철)이 처음에 불에 들어 갈 때는 검은색이다가 열의 전이 진행이 높아질수록 붉은색 황금색 마침내 백열상태로 간다. 하나님의 지혜의 포옹의 시작은 비유컨대 불이 최초로 들어가는 상태부터 시작한다. 검은색은 검은색만큼의 그 짝된 지혜가 應(응)한다. 붉은색은 붉은색만큼의 그 짝된 지혜가 응한다.
황금색은 그 색만큼의 그 짝된 지혜가 응한다. 白熱(백열)상태는 그 만큼의 그 짝된 지혜가 응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응한다. ‘I will hear’ 응한다는 의미는 호세아서 2:19-22의 응함을 의미한다. `anah {aw-naw'}는 ‘to answer to make answer, to be answered’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에게만 대답 회답 해답 응답 응하는 본질이시기 때문이다. 'respond' 하나님은 하나님에게만 대답하시고 응하시고 응수하시고 반응하시고 감응하신다. 때문에 인간의 지혜와는 영원한 간격을 가진다.
때문에 인본주의로 가는 기독교는 하나님과 적이 되는 길을 가는 것이다. 그것은 곧 敵그리스도의 길인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testify’, ‘to testify’ 하나님 스스로에게 증명하시다 증언하시다 증인이 되시다 증거가 되시다. 모든 것을 그 정체가 무엇임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께만 ‘speak’ 말을 하고 담화를 하시고 이야기를 하신다. 그분의 언어를 알아들을 존재는 하나님 외에 상천하지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를 품어야 한다. 그 때만이 하나님의 모든 것에 응하게 된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게 ‘shout’ 외치시되 그 외침 환호로 서로에게 응하시고 하나님은 스스로를 큰소리로 부르신다. 하나님은 스스로에 응하기 위해 큰소리를 내다. ‘respond as a witness’ 하나님은 스스로에게 목격자 증거 증명 입증을 하시고 그를 위해 목격하여 대답하시고 응하시고 응수하시고 반응하시고 감응하신다. ‘receive answer’ 하나님은 스스로에게만 모든 것을 받다 경험하여 접수하시고 수취하여 얻으신다. 그 때문에 하나님의 그 짝된 지혜를 품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를 받아 누린다.
하나님은 스스로에게 응하여 노래를 부르고 ‘to sing’ 완전한 가락으로 和應(화응) 和音(화음)한다. utter tunefully 의미의 경지로 들어가려면 그것은 영원히 분리될 수 없는 거처의 합일에 이르려면 하나님의 지혜를 품어야 한다는 의미에 ‘to dwell’을 담고 있다. 성경에는 응하다. 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헬라어 pleroo {play-ro'-o} John 19:36 응하다. 의 ‘fulfilled의 to make full, to fill up, to fill to the full’로 담는 말씀은 예언을 응하게 하다. 이루게 하다는 의미인데, 하나님은 하나님에게 충성되기 때문이다.
‘Joshua 21:45 all came to pass. bow' {bo} 는 ’to go in, enter, come, go, come in‘을 담는 의미는 pleroo와 번역 상 한국어 同音(동음)이지만 `anah {aw-naw'}에 근접한다. 이러하신 하나님의 손발을 맞추려면 인간의 지혜로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에 응하는 `anah {aw-naw'}의 의미는 하나님의 그 짝된 지혜를 품는 포옹인데 [창세기17: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 하라]의 완전 하라. 의 의미와 같다 하겠다.
‘Genesis 17:1 and be thou perfect’ 는 tamiym {taw-meem'}라 발음하고 그 안에는 complete, whole, entire, sound healthful, entire (of time), wholesome, unimpaired, innocent, having integrity, what is complete or entirely in accord with truth and fact 등의 의미를 담는다. [잠언2:7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에 나오는 완전한 지혜란 ‘sound wisdom’ tuwshiyah {too-shee-yaw'} or tushiyah too-shee-yaw'}으로 발음한다.
그 안에는 wisdom, sound knowledge, success, sound or efficient wisdom, abiding success, abiding success (of the effect of sound wisdom)를 담는다.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모든 지혜안에서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Proverbs 20:7 in his integrity= tom {tome}으로 발음하고 그 안에는 integrity, completeness, fullness, innocence, simplicity를 담는다. 하나님의 모든 지혜에 응하는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에 짝된 지혜 밖에 없다. 그 지혜로 포옹해야 한다. 때문에 적그리스도의 길인 인본주의적인 포옹은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요한복음15:14-15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의 모든 비밀을 공유하는 단계로 가려면 同質(동질)성을 이뤄야 하는데, 인간이 무슨 수로 동질성을 이룰 수 있겠는가? 전혀 못한다. 그 때문에 하나님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 속으로 오사 거하시고 하나님과 응하게 하신다. 그것이 곧 지혜에 대한 포옹이다.
이 글에서 응한다는 말의 의미를 이미 전술하였다. 응한다는 ‘I will hear’ `anah {aw-naw'} 의미는 ‘embrace’ 포옹한다는 말인데, 완전한 포옹은 백열상태가 絶頂(절정)의 시작이다. 그 마음에 들어온 하나님의 사랑에 응하는 그 짝된 지혜는 그가 하나님의 사랑에 달구어진만큼 응하게 된다. 백열현상에 도달하면 그 때 하나님의 그 짝된 지혜가 그에게 완전하게 안겨진다. 그것을 완전한 지혜의 포옹, 완전한 지혜를 받았다고 한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한 응함이 있는 관계로 가야 하는 것인데 그것을 포옹한다. 기꺼이 받아들이다 껴안다 또는 포착하다 또는 채택하다. 라는 의미로 담아낸다. 그것은 마치도 ‘clasp’의미로 걸쇠 죔쇠 버클 쥠 움켜쥠인데 ‘to fold one's hands in idleness’ 이는 마치도 게으른 나태 무용 무익 무위한 손을 접고 있는 것 같아서 도무지 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는다. 그리하면 그 대가가 주어지는데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의 의미가 주는 상을 얻게 된다. 그러한 영화는 곧 하나님을 분량으로 은혜로 주신다는 의미이다.
‘he shall bring thee to honour’ 는 kabad {kaw-bad'}인데 그 안에는 실로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그 중에 제1 순위의 의미만 본 장에서 밝힌다. ‘to be heavy, be weighty, be grievous, be hard, be rich, be honourable, be glorious, be burdensome, be honoured, be insensible, be dull’ 의미의 賞(상)이 온다. 이런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의 분량을 정하여 주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지혜를 포옹한 만큼 하나님의 분량을 주시는데 아주 무겁게 담아주신다는 것을 영화롭게 한다는 의미로 담아내고 있다.
하나님의 충만은 분량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 분량을 많이 받은 만큼의 영화가 그에게 주어진다는 말이다. 그 때문에 바울은 평생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분량을 높이려고 달음질을 하였다. 그는 그것을 영광의 소망이라고 하였다. 그는 천국에 가서 그 분량이 많은 자들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분량이 많은 만큼의 십자가가 되기 때문에 그만큼 고되고 그만큼 고통이 오고 그만큼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하늘에서 비교될 수 없는 지극한 그의 영광이 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무게가 높은 자들을 등용해야 하나님의 應(응)함으로 형통할 것인데, 하나님의 보시기에 가벼운 자들, 특히 인본주의자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자들인데 이런 함량 未達(미달)한 자들을 데리고 일을 한다면 하나님이 전혀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도움을 입으려면 하나님의 지혜의 무게가 엄청난 자들을 등용해야 한다. 그 만큼 하나님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움직여야 창조미래과학부가 성공하는 것이다. 겨보다 가벼운 인간들을 데리고 무엇을 할 것인가?
화려한 스펙으로 얼굴을 가려도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면 너무나 가볍다. 악마의 입김에 영혼을 쉽게 팔아버리는 인간들이 된다. 나라가 어려워도 하나님을 움직일 수 없으니 이를 어찌하랴. 대통령이 그들을 그 위급 중에 몰아낼 수도 없고 가벼운 자들은 작은 환란의 바람에도 태풍처럼 생각하고 그 바람에 소스라치는 것이 아닌가? [시편 1:4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가벼운 인간들이 국가대사를 논하는 자리에 앉으면 결국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예레미야 13:24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초개 같이 흩으리로다] [시편 83:13나의 하나님이여 저희로 굴러가는 검불 같게 하시며 바람에 날리는 초개같게 하소서] 이런 가벼움의 극치를 가진 함량미달한 자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믿음에 의심을 짙게 가진 자들이다. [야고보서 1:6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인본주의가 그렇게 해서 출발한 것이다. 스펙이 그의 함량을 높여주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含量(함량)을 높이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지혜를 그 짝된 하나님의 지혜로 포옹하는 것에 있다. 그렇게 무게가 높은 인생들이 되어야 하는데, 악마의 입김에 그 선전선동에 놀아나는 인간들이 가득하다. 오호라! [마태복음 11:7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악마의 그 입김에 자지러지는 세상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우리의 무게를 높이는데 게으른 자들임을 한탄한다.
우리가 이 나라를 지켜내는데 무게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무게가 높아야 악마의 입김에서 나오는 바람에 흩어지지 아니한다. 나라를 지켜낼 수 있는 것이다. 오늘도 언론 방송 포털에서 대한민국을 망하게 하는 입김들이 그 바람들이 가득하다. 여기에 충동 선동되는 인간들이 어떻게 자유대한민국을 守護(수호)할 수 있으랴? [예레미야 49:36하늘의 사방에서부터 사방 바람을 엘람에 이르게 하여 그들을 사방으로 흩으리니 엘람에서 쫓겨난 자의 이르지 아니하는 나라가 없으리라]
[이사야 7:2혹이 다윗 집에 고하여 가로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山林(산림)의 바람에 흔들림같이 흔들리는 세상이 된다면, 이제 또 다시 광우 뻥 같은 폭동이 일어나면 어찌 감당할 수 있으랴? [예레미야 22:22네 목자들은 다 바람에 삼키울 것이요 너를 사랑하는 자들은 사로잡혀 가리니 그 때에 네가 반드시 네 모든 악을 인하여 수치와 욕을 당하리라] 그 바람에 나라가 무너지면 지도자들이 다 잡혀 죽을 것이 아닌가?
[유다서 1:12저희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의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그 속에 하나님의 무게가 전혀 없어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처럼 된 자들이 목자라는 직함을 가지고 세상을 망하게 하는 종북의 도우미 짓을 하고 있다. 그들이 지금 하는 짓들은 아님 말고 식의 폭로를 가지고 장난치는 것인데, 결국 대한민국을 망하게 하는 견인차 역할 징검다리 역할이 아니겠는가? 참 고약하다.
김일성과 김정일을 신으로 섬기는 자들이 얼마나 가벼운가? 결국 그들은 망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이사야 57:13네가 부르짖을 때에 네가 모은 우상으로 너를 구원하게 하라 그것은 다 바람에 떠가겠고 기운에 불려갈 것이로되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 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악마의 입 기운에 놀아나는 이 땅이 아니 되려면 하나님과 응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짝된 지혜를 抱擁(포옹)하는 길임을 오늘의 본문은 강조한다.
[레위기 26:36너희 남은 자에게는 그 대적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으로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 [이사야 40:24그들은 겨우 심기웠고 겨우 뿌리웠고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의 부심을 받고 말라 회리바람에 불려가는 초개 같도다] 얼마나 가벼우면 바람에 날린 잎사귀 소리에 놀라 도망치랴! 하나님이 충만하여 그 무게가 높은 자들은 참으로 복된 자들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마태복음3:12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지혜를 포옹한 자들은 살고 그렇지 못한 사람과 국가는 망한다. [다니엘 2:35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무게가 충만한 자들만이 세상을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이다.
그들만이 하나님과 겨뤄 이긴 '이스라엘' 진정한 勝者(승자)이기 때문이다. [이사야41:15-16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 같게 할 것이라 네가 그들을 까부른즉 바람이 그것을 날리겠고 회리바람이 그것을 흩어버릴 것이로되 너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겠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인하여 자랑하리라] 그렇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 함량이 미달된 자들을 밀어내는 인사청문회가 되어야 하는데,
도리어 중도실용 그 가벼운 자들을 세우고 있다. 이는 김정은의 세상을 만들고자하는 음모이다. 조금이라도 무거우면 그들이 감당치 못하기에 가벼운 인간들을 찾아내려고 한다. 참으로 어리석고도 어리석은 망국행위인 것이다. 대통령이 가는 길에 하나님의 무게로 비중이 높은 인물이 둘러싸여 있어야 평탄할 것이다. 그들이 그 발로 모든 질려와 형극이라는 붉은 가시잡초를 짓이기고 길을 낼 것이기 때문이다. 도리어 조그만 가시에도 겁먹는 자들이 그 곁에 있다면 공포제조기 확대기 역할을 하여 마침내 그 정권을 恐惶(공황)에 빠뜨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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