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김일성은 진짜가 아닌 ‘가짜’이다!무한하게 많이 훔친 ‘가짜’보다도 더 나쁜 도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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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소련군이 북조선에 진주했을 때 북조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은 조만식이었다. 이에 소련군 대장인 레베데프, 스티코프가 그를 북조선 괴뢰 정부의 수반으로 내세우려고 했는데(만약 그가 여운형, 이승만 같은 인물이었으면 수반이 되었을 것이다.) 서울의 민족주의 계열과 연계되어 있는 조만식이 레베데프, 스티코프에게 협력해주지 않았다. 이에 레베데프, 스티코프가 할 수없이 김일성을 그 수반으로 내세웠다(독립운동 공적에서 친중공파인 무정을 제외시키더라도 친소련파인 김책, 최용건이 김일성보다 앞섰지만 북만주에서 활동한 관계로 조선민중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레베데프가 평양 시민들을 모아놓고 김일성을 소개하자 그들이 가짜라면서 모두 돌아서버렸다. 이에 소련군 정보기관에서 조선민중이 존경하는 김일성과 자신들이 내세운 김일성(김성주)에 대해서 자세히 조사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레베데프, 스티고프에게 보고했을 것이다. 그 내용이 어떤 것인가는, 1992년 송광호 기자가 레베데프 비망록을 발굴하고 1995년에는 스티코프의 비망록도 입수함에 따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민중이 존경하는 전설적 영웅인 김일성은 실존인물이기는 하지만 이미 죽었다. 김성주가 ‘김일성’ 별호를 사용하면서 독립운동을 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김성주를 북조선 정부의 수반으로 내세워도 될 것 같기도 하다.”
해방 후에 소련과 미국의 정보기관이 당연히 전설적 영웅 김일성장군에 대해서 자세히 조사를 했다. 그 조사 내용은 팩트이므로 소련과 미국의 정보기관이 보관하고 있는 것이 비슷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경우에는 얼마 전에, ‘조선민중이 존경한 김일성장군은 김경천’이라는 내용의 군사기밀 해제문서를 공개했다. 소련의 경우에도 소실되지 않았으면 언젠가는(그 내용이겠지만) 공개할 것이다.
유순호
nonfiction novel
만주벌 눈바람아, 이야기하라! -2013년판 最新 金日成評傳 서문에 대신하여 실제 인물과 실제 있었던 사건을 가지고 평전을 만든다는 것은 정말 쉽지가 않다. 그것도 ‘이렇다, 저렇다’하고 말썽이 많은 사람에 대해서일 경우 더욱 그러하다. 분명히 이쪽의 주장과 접근하면 저쪽의 주장과 멀어지기 마련이고, 다시 저쪽의 주장과 비슷하면 이쪽의 주장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미 10여년전에 타계한 북한의 ‘김일성’이 바로 그러하다. 주지하는바와 같이 김일성은 보통 인물이 아니다. 아직도 그를 추종하는 세력 2천만명이 북한 땅에 있으며, 이 2천만명에 대한 생살권을 틀어쥐고 있는 통치집단이 3대째 세습하고 있는 중이다. 이들은 과거 김일성의 생전에도 물론이거니와, 오늘날 까지도 계속 김일성을 ‘조선의 별’로, 나아가 ‘민족의 태양’으로 우상화하기에 여념이 없다. 대신 남한에서는 오래동안 ‘김일성은 가짜’라는 주장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이런 주장을 받침하는 적지않은 증거들까지도 제시되었다. 또 김일성은 가짜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북한에서처럼 우상화하고 있는 그런 백전백승하는 전설의 ‘김일성장군’은 절대 아니라는 것과, 기껏 과장하고 조작해봐야 1930년대 중국공산당이 지도하고 있었던 항일연군의 한 평범한 영급(營級, 대대장급)의 군사간부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김일성의 청년시절에 대한 평가는 남, 북한에서 서로 다른 극단에 처하여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미국 하와이대의 서대숙(徐大肅)과 일본 도꾜대 명예교수 와다 하루끼(和田春樹)의 김일성 연구저서들은 이 두 극단을 서로 통하게 만드는 작용을 하였던 것 같다. 그들의 연구저서에 따르면 ‘김일성은 북한에서 하늘 높은줄 모르게 올리 불고 있는, 그런 전설의 민족영웅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남한에서 매도하고 있는 것처럼 가짜까지는 아니다’는 주장인데, 이에 동조하고 나선 것이 중국 연변의 조선족 학자들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남, 북한이 아닌 중국이라는 제3의 시각은 비교적 사실과 접근하였다는 공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가지고있었다. 왜냐하면 중국의 연변은 청년 시절의 김일성이 직접 활동하였던 무대였고, 1945년 ‘8.15 광복’ 이후에 김일성을 따라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고 연변에서 정착하였던 김일성부대의 연고자들이 적잖게 살고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김선(金善)이나, 김명준(金明俊), 서순옥(徐順玉), 그리고 려영준(呂英俊) 같은 항일연군 제2군 출신의 연고자들은 생전에 모두 회고담을 남겼는데, 이에 대한 정리사업은 국가적인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적지않은 조선족 역사학자들이 직접 그들과 만나 그들의 회고담을 육성으로 듣기도 하였던 것이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살면서, 북한을 자기의 조국으로 간주하였던 이런 연고자들은 북한의 국가주석이 된 김일성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그와 함께 항일투쟁을 하였다는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있었다. 그러니 그들의 입에서 김일성에 대한 나쁜 소리가 나올리 만무했다. 더구나 북한과 중국은 1950년 ‘6. 25전쟁’을 함께 겪으면서 같은 이념의 국가 관계를 넘어 혈맹관계로 발전하여 있었고, 중국공산당의 주석 모택동 본인이 세계 여럿 나라의 국가 지도자들속에서 가장 좋아하였고, 친하게 지냈던 사람가운데는 바로 베트남의 호지명과 함께 북한의 김일성이 들어있었다. 최근에야 모택동의 요리사들에 의해 공개되고 있는 사실인데, 개고기를 좋아하였던 김일성이 중국에 오면 모택동은 특별히 개고기를 마련해서 전문 김일성의 탁상에까지 올려주었을 정도로 김일성을 좋아하였고, 무릇 김일성이 요청하는 일에 대하여 아니 들어주었던 사례가 없었다. 때문에 모택동의 생전에는 김일성의 중국내 항일투쟁 과거사가 아무렇게나 과장되고, 위조되고해도 그것을 문제삼고 나설 수 있는 학자들이 없었다. 설사 있었다고 해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뒷담이나 푸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쯤 김정일이 북한의 후계자로 추대되었을 때부터는 사정이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적지않은 연고자들이 자기를 방문하러 왔던 역사학자들에게 김일성의 흠을 들추는 이야기들을 서슴없이 털어놓기 시작했다. 김정일이가 백두산이 아닌 러시아에서 태어났고, 중국인 남편 우보합(于保合)과 함께 러시아의 하바르프스크에 들어갔던 북만의 항일연군 출신 여대원 이재덕이 직접 김정일에게 자기의 젖을 먹여주었다는 이야기도 그때 이미 연변에서 화자되었던 적이 있었다. 1937년 ‘간삼봉전투’ 때 직접 오성륜을 만난 적이 있었던 김명준(金明俊)은, 이 전투는 오성륜(吳成倫)의 지휘하에서 진행되었으며, 오성륜은 항일연군 제2군의 조선인들속에서 제일 높은 직위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즉 김일성을 비릇하여 최현(崔賢)이나, 안봉학(安鳳學), 박득범(朴得範), 임수산(林水山)같은 사람들이 실제상에서는 모두 오성륜의 부하였다는 것이다. 항일연군에서는 전광(全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던 오성륜은 김일성의 의심할바 없는 직계 상사였고, 남만지방에서는 중국인 사령관이었던 양정우(楊靖宇, 항일연군 제1로군 총지휘)나 위증민(魏烝民, 항일연군 제1로군 정치위원 겸 부총지휘)같은 사람들까지도 아주 어렵게 대하곤 하였던 원로였다. 김일성의 부대가 동만에서 남만지방으로 옮겨온 뒤에는 거의 모든 활동이 전광의 지도하에서 진행되었는데, 1936년 5월, 전광과 리동광의 직접적인 지도하에서 조직되었던 ‘재만한인 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도 북한에서는 모두 김일성에 의하여 조직된 것으로 위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위조 사실에 가장 먼저 발을 묶인 것이 바로 중국의 조선족 역사학계였다. 연변에서는 그 많은 항일투쟁사관련 ‘인물사료집’을 책으로 출판하였으면서도 지금까지 전광에 대한 인물 약전(略傳)을 한편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또 중공당 남만성위원회 선전부장까지 되었던 리동광(李東光)에 대한 인물 약전에서도, 그가 ‘재만한인 조국광복회’의 발기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감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 그뿐인가, 조선족 출신 당원 간부들이 거의 멸문지화를 당하다시피 했던 ‘민생단투쟁’에 관련한 연구논문집 한권도 공개발행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은 이 ‘민생단투쟁’에서 역시 피해자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김일성을 거꾸로 ‘민생단투쟁’의 최후의 해결사로 분장시켜놓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내부자료는 민생단으로 의심받고 직위해제까지 당하였던 김일성을 살려주기 위하여 그를 직접 북만의 주보중에게로 피신시켜주었던 사람이, 당시 동만특위 위원으로 있었던 중국인 간부 왕윤성(王閏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이 사실을 ‘조선인민혁명군 제1차 북만원정’으로 위조하고 있는데, 이 원정에 참가하였던 30여명의 대원들가운데서 1945년 ‘8.15광복’ 이후까지 살아남아 북한으로 돌아가 인민군의 고위 장령이 되었던 전창철(全昌哲), 장상룡(張相龍), 이종산(李鍾山)같은 사람들은, 북만에서 활동할 때 모두 허형식(許亨植, 朝鮮人, 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兼 제3군 군장)의 부하였다. 그러나 북한으로 돌아가 회고록을 발표할 때는 허형식까지도 포함하여 그들은 모두 김일성장군의 부하들이었노라고 거짓말하였다. 때문에 김일성에 대한 북한내 연고자들의 회고록은 간혹 사건의 연대나 또는 시간 같은 것을 대조하는데서 참조 계로써 필요할 정도였다. 오히려 어떤 회고록들은 가뜩이나 과장되고 조작되어 있는 김일성의 본래 모습을 더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어놓기도 하였는데, 소도둑 출신이었던 최현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최현은 김일성과 거의 비슷비슷하게 이름을 날렸던 사람이나, 회고록에서는 김일성의 충실한 부하로 자신을 한껏 낮추고 있다. 김일성 본인도 회고록에서 처음 최현과 만났을 때 최현이 자기를 ‘장군님’이라고 불렀노라고 말하고 있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이것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역시 북한으로 돌아간 뒤에는 어쩔 수 없이 김일성을 ‘장군님’이라고 호칭할 수밖에 없었던 김일성의 경위중대장 출신 강위룡(姜威龍)은 ‘8.15광복’ 직후 직방 북한으로 바로 나가지 않고 임춘추(林春秋, 김일성부대 군의관 출신, 광복직후 연변 전원공서 전원이 됨)와 함께 연변으로 와서 한동안 살았다. 강위룡은 연변에서 살 때에 김일성에 관하여 가장 많은 이야기를 하였던 연고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그의 발언은 가장 권위적이었다. 김일성의 회고록에서도 여러번 나오고 있는 강위룡은 힘이 세기 때문에 ‘강곰’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었다. 제1차 북만원정 뒤에 왕청으로 돌아오다가 병으로 쓰러진 김일성을 등에 업고 마촌까지 뛰었던 사람이 바로 강위룡이었다. 그런 강위룡이 연변에 있을 때는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를 지휘하였던 것은 사실이나, 김일성 본인은 압록강을 건너 보천보까지 들어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역사학자들이 이의를 제기하였더니, “이 사람아, 보천보 전투 때 내가 기관총을 잡고 바로 김일성의 곁에 딱 붙어서있었댔네.”라고 대답했다. 강위룡은 일제가 투항한 뒤 한동안 길림성 용정현의 현장직을 맡기도 하였으나 원래 일자무식인데다가 까막눈이다보니 종당에는 화룡현 동성공사(東城公社, 卽今日東城鄕) 과수농장 관리원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러다가 후에 북한특무로 몰리게 되자 아주 북한으로 달아나버렸는데, 연변가무단이 평양을 방문하였더니, 강위룡이 조선인민군 중장견장을 달고 평양위수사령관이 되어 가무단의 배우들을 만나주었다는 일설로 유명하다. 그때 강위룡을 만나고 돌아왔던 지인들이 강위룡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퍼뜨렸는데, 북한의 양강도 혜산시에 세워져있는 ‘보천보전투승리기념관’에서 이 전투의 참가자였던 강위룡을 초청하여 강연해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거짓말을 할줄 모르는 강위룡이 그때도 또 기념관 관계자들한테 “김장군이 보천보까지 들어가지 않았다.”고 말해서 하마터면 큰 경을 치를번 했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의 눈에 나서 끝내 중장견장까지 모조리 뜯기고 평양에서 황해도의 깊은 산골로 쫓겨내려가기도 하였으나, 다행히도 강위룡을 무척 사랑하였던 김일성이 평소에도 뜬금없이 “강위룡이 보구싶은데, 그가 지금 어디서 뭐하고 있느냐?”고 찾곤 해서 강위룡은 다시 평양으로 불려 올라왔다는 것이다. 분명한바, 강위룡이 생전에 북한에서 남긴 회고록은 최현의 회고록이나 마찬가지로 강요받은 거짓말이지만, 그가 중국의 연변에서 남겼던 회고담들은 대부분 진실한 것이었다. 강위룡은 그 외에도 김일성과 관련한 많은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는데, 김일성의 첫 부인으로 알려진 김정숙(金貞淑)과 만나기 이전에, 김일성은 이미 한성희(韓成姬)라고 부르는 왕청 여자와 부부가 되어 살았으며, 그 여자는 강위룡의 옛 중대장이었던 한흥권(韓興權)의 여동생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한즉, 이제 김일성과 관련한 가장 사실과 가까운 진실한 이야기는 남한이나 북한의 자료들에만 의거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남한의 대부분 자료들은 중국에서 공식 발간되어 있는 극히 제한된 자료들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감안할 때, 중국에서 살고 있었던 연고자들이 그와 같은 자료들을 제출할 때에, 자료들에 제대로 기록할 수 없었던 자료 바깥, 또는 자료 이면의 또 다른 더 깊은 이야기들을 파고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고보니 오늘 내가 집필하고 있는 이 책은 결코 남한도, 북한도 아닌, 제3의 시각, 즉 만주 중국인의 시각에서, 남, 북한 어느 쪽으로도 편향하지 않고 오로지 있었던 사실 그대로의 김일성을 새롭게 조명하려고 들었다는 감이 없지 않다. 여기서 한마디 더 보충한다면 , 제3의 시각이란 결코 중국 조선족 역사학계의 시각이 아닌, 중국의 한족인들의 시각을 말한다. 나 자신이 오래동안 중국에서 살면서, 비교적 북한 쪽으로 쏠려있는 조선족들의 시각보다는, 위주로 북한과 김일성에게 반감을 품고 있는 중국의 한족인 연고자들의 회고담에 더욱 많이 근거하였기에 든 생각이다. 만약 같은 중국에서 살고 있는 중국 국적의 조선족 역사학계가 김일성에 대한 그들의 시각이야말로 가장 공정하다는 주장을 펼치자면, 그들은 북한의 위조작업에 대하여 당당하게 나서서 비판할 수 있어야 하였다. 그런데 비판은 고사하고 오히려 동조까지 하는 분위기다. 김일성이 북한의 주석이 되고나서 주보중(周保中, 항일연군 제2로군 총지휘, 1940년대 이후 국제교도려 려단장, 김일성은 려단 산하 제1영 영장이었음)은 김일성에게 발라맞추느라고 어느 한차례 회고문장에서 ‘동북항일연군 제2군에는 조선인 대원들이 많았기 때문에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僞證을 하였는데, 조선족 역사학자들은 누구도 나서서 이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반론을 펼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남한의 ‘김일성 가짜설이야 말로 가짜다’는 주장을 펼치는데 남다른 열정과 적극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주장도 결국 오래가지는 못하고말았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공개적으로 김일성은 중공당원이었으며, 중국의 항일연군에서 영급(營級, 대대장급) 군사간부로 복무했었다고 공개하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2003년에 연변의 당문사자료판공실(당시 주임 崔星春)에서 편찬한 ‘연변항일투쟁사문헌휘편’에서는 과거 김일성에 대하여서만은 줄곧 ‘김일성’이라고 함부로 호칭하지 못하던 것을 당당하게 ‘김일성’이라고 호칭하면서 그의 실명을 기록하였다. 이는 가히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문제를 삼기에 따라서는 관방으로부터 문책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다행스럽게도 아무도 나서서 문제를 삼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도 중국의 공개 역사문헌에서 가장 처음으로 김일성의 이름을 직접 호칭한 것은 아니다. 1995년에 중국해방군출판사가 중국문으로 공개 발행한 ‘중국항일전쟁실화총서’ 동북항일연군편에서 제일 처음으로 김일성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면서 ‘조선의 위대한 애국자 김일성이 1933년 9월에 왕청과 훈춘의 유격대를 거느리고 구국군 오의성(吳義成)의 부대와 함께 동녕현(東寧縣)성 전투를 진행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이 전투 때 21세였던 김일성은 보통 전투대원들과 전혀 다를바 없이 목에 작탄 두 개를 메고 가장 앞장에서 적진을 향하여 돌진하였다고 밝혀놓고 있다. (원문:1933年 7月7日拂?、?斗打?、朝??大??者金日成?子上?着炸?、率?炸??、在机?掩?下、?入城外水深及腰的壕?、搭人梯爬上城?、??城?) 이상에서 보다시피 중국사람들의 역사속에는 보통 돌격대원이 되어 앞장에서 적진을 향하여 돌진하는 용감한 청년 유격대장 김일성은 있었지만, 결코 옆구리에는 권총을 차고, 손에는 쌍안경을 들고 전투를 지휘하는 그런 ‘김일성 장군’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조금이라도 역사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중국 관방에서 오늘까지도 육속 공개하고 있는 이와같은 사료들을 한데 모아놓고 이 사료속에서 기록하고 있는 동북항일연군의 김일성과 북한의 조선인민혁명군 사령관 김일성을 동일인으로 등호(等號)를 쳐놓고 보면, 북한에서 김일성의 항일투쟁사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위조작업을 진행하였는지를 금방 알수 있게 된다. 심지어 ‘김일성 가짜설이야말로 가짜다’는 중국 조선족 역사학계의 주장에 동의하고 있었던 나는 점차적으로 이런 주장 자체에 점점 회의적이 되고말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 남한에서 ‘김일성은 가짜다’고 주장하였던 학자들의 주장은 ‘김일성 가짜설이야 말로 가짜다’고 반론하는 학자들에게 여지없이 비판받았는데, 만약 그때 ‘김일성 가짜설’을 주장하고 나왔던 학자들이 오늘날 중국인들에 의해 끝없이 하나, 둘 씩 공개되고 있는 이와같은 역사자료들과 만나게 되었더라면 어떠했을가는 의문도 가져보게 된다. ‘김일성 가짜설’을 들고 나왔던 남한 학자들의 적지않은 자료들이 일본군측의 자료들에서 많이 나왔는데, 그런 일본군이 끝까지 김일성을 붙잡지 못하였고, 또 김일성의 실제 사진도 한 장 변변히 입수하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일본군측의 자료 또한 그렇게 믿을바는 못 되었다. 마찬가지로 하늘 높은줄 모르게 우상화하면서 과장하고, 위조하고 날조하고 있는 북한의 자료들도 전혀 믿을바가 못 되는 대신, 나는 김일성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던 중국인 연고자들의 회고담이나, 회고록들이야말로 가장 진실하고 믿을만한 것들이었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이 평전을 집필하면서 오랜 시절동안 김일성에 대하여 품고 있었던 나의 그나마 잔존하던 崇拜心도 모조리 깨어져 나가고말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북한의 이 김일성, 김정일의 아버지가 되고, 김정은의 할아버지가 되는 김일성은 정말 가짜 김일성이 옳았구나’는 판단으로까지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주변의 여럿 동료 학자와 작가들에게 들려주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시간이 갈 수록 나의 판단에 대한 여러 가지의 확신이 서게 되었다. 특히 김일성은 1937년 6월 ‘보천보전투’ 때부터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고, 그 이전에는 줄곧 김성주로 알려졌다는 중국인들의 사료를 찾아내게 되었다. 또 어떤 사료들에서는 1938년 항일연군 1, 2군을 합쳐 제1로군으로 개편될 때에 1로군 산한 3개의 방면군중에서 제2방명군의 지휘관을 맡았던 김성주가 자기의 이름을 정식 김일성으로 바꿨다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원문: 1938年,金日成任?北抗日??第一路?第二方面?(兵力相?于一??)指?,在此期?他取名??金日成) 때문에 시간적으로 계산하여도 중국사람들이 알고 있는 동북항일연군의 김일성이란, 1937년 6월에 발생하였던 '보천보전투' 때부터 시작하여, 1940년 10월 좌우경에 그들이 아무르강을 넘어서기까지 만주의 동북부 지방에서 약 3년 3개월이라는 시간동안밖에 활동하지 못하였던 김일성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김일성에 대하여 연구하고 있는 중국학자들이 각별히 김성주의 이름이 김일성으로 바뀐 시간을 주목하는 것은 원인이 있다. 1930년대에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던 사람들가운데는 중공당내에 黨籍을 두고 있었던 사람들도 한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한의 학자들이 1920년대 후반기부터 김일성의 이름으로 알려졌다는 '김경천'이나, 또는 '김창희'같은 독립군 출신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공당내에도, 북한의 김일성이 자신이 20세 미만 때에 '한별'(韓星)로 불리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실제의 '한별'이라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한별’을 직접 중공당원으로 발전시켰던 왕경(王耿)이라고 부르는 당 소개인이 중공당 만주성위원회로부터 파견받고 연변에 나왔다는 사실과, 왕경이 ‘한별’과 만났던 시간과 장소까지도 낱낱이 제시하고 있다. 북한에서 만든 영화 '조선의 별'에서는 1부에서 7부까지 20세 이전의 김일성에 대하여 줄곧 '한별'로 호칭하고 있다. 김일성 본인도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동지들이 나의 별명을 한별로 지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조공당과 중공당을 통 털어 만주에서 ‘한별’로 불리었던 조선인은 오로지 김인묵이라는 사람 뿐이었다. 역시 북한의 김일성과는 같은 평안 남도에서 태어났는데 일찍 러시아에서 이르꾸쯔크파 고려공산당에 참가하였고 1926년에 간도로 나왔다가 1930년 11월에 일제경찰에게 체포되기전까지 약 4년이라는 시간동안 ‘한별’이라는 별명으로 만주의 동북부 지방을 휩쓸고 다녔던 것이다. 후에 그는 코민테른의 '일국일당주의' 원칙에 의해 조공당원들속에서 가장 먼저 중공당으로 당적을 옮겼고 1930년 5월의 ‘붉은 5월 투쟁’과 ‘5. 30폭동’ 등 굳직굳직한 사건들의 실질적 조직자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런데 김일성과 북한은 이 '한별'의 실제 인물인 김인묵에 대하여서는 ‘좌경맹동주의자’라고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으면서도 김인묵이 사용하였던 '한별'이라는 별명만은 아무런 '염치지심'(廉恥之心)도 없이 넙적 훔쳐버린 것이었다. 여기까지 김일성이 같은 조선인 김인묵의 별명 '한별'을 훔친 것에 대하여 중국 사람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지만, 유격대가 만들어지고나서, 이 유격대가 동북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으로 확충 개편될 때에는 줄곧 김일성을 부하로 데리고 다니면서 김일성에게 직접 군사도 가르쳐주고, 또 작전하는 법도 배워주곤 하였던 중국인 항일장령 진룡(陳龍)의 항일투쟁 업적을 모조리 자기의 것으로 훔쳐간데 대하여 몹시 분개하고 있다. 중국 흑룡강성의 작가 수래영(修來榮)에 의해 집필된 진룡장군의 전기(陳龍傳)가 최근에 중국의 군중출판사(群?出版社, 2011. 8)에 의해 공개 출판되었는데, 1994년부터 중국사회과학출판사에서 육속 번역출판되고 있는 김일성의 중국문판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世?同行)를 읽었던 중국사람들은 기절초풍하도록 놀라게 되었다. 진룡장군의 본명은 류한흥(劉漢興)으로써 1949년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뒤, 중국정부에서 가장 높은 직위에 올랐던 몇몇 안되는 생존자들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에 중국 공안부 정치보위국 국장이 되었다가 2년뒤인 1952년에는 공안부 부부장직에까지 올랐지만, 바로 그 이듬해인 1953년 11월에 북한의 내각 수상과 원수(元帥)의 자격으로 북한대표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하였던 김일성과 만나지 못하였다. 김일성이 가장 만나기 싫어하고, 또 외우기 싫어하는 사람가운데 '한별'의 실제 인물이었던 조선인 혁명가 김인묵과 함께 중국인 혁명가 류한흥의 이름도 들어있었다. 왜냐하면 류한흥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이 창건되었을 때 군(軍, 卽軍團長) 참모장이었고, 김일성이 정치위원직을 담임하고 있었던 3퇀(연대)과 4퇀을 직접 데리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당시 군 산하의 4개퇀 가운데서 1, 2퇀은 군장 왕덕태의 친솔부대였고, 3, 4퇀이 군 참모장 류한흥의 친솔부대였다. 김일성은 1935년 6월에 류한흥을 따라 북만의 액목과 영안쪽으로 나갔던 적이 있는데, 북한에서는 이에 대하여 '조선인민혁명군 제2차 북만원정'이라고 이름 짓고 '조선인민혁명군은 사령관 김일성장군의 인솔하에 북만으로 제2차 원정을 진행하였다.'고 위조하고 있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류한흥의 이름이 몇번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비참하게도 그에 대한 소개는 ‘전문료리사들도 깜짝 놀라게 할 음식솜씨를 가지고 있는 중학출신의 지식분자’가 고작이었다. 북만으로 나갈 때에 류한흥이 무슨 직책에 있는 사람인지, 지어는 그가 어느 나라의 사람인지에 대한 자세한 교대도 없이, 다만 김일성 등이 술을 한잔 정도 마실 때에 그는 석잔씩 마셨다는 대주가로 소개하는데 그치고말았다. 그러나 오늘날 항일연군투쟁사를 연구하는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김일성이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창립초기 류한흥의 직계 부하로써 활동하였고 제2군이 북만으로 진출할 때에 류한흥의 곁에서 그림자처럼 붙어 따라다녔다고 한결같이 입을 모으고 있다. 북경에서 살고 있는 류한흥의 딸 류소화(劉小樺)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이 북만의 액목지방에서 정안군(靖安軍) 한 개 중대를 소멸하는 전투를 진행하였고, 이 전투는 북만원정부대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자기의 아버지 류한흥의 지휘하에 진행되었다고 밝혔다. 중국의 사료들에서는 직접 전투에 참가하였던 부대도 방진성(方振聲)과 김일성이 인솔하였던 제3퇀이 아니고, 후국충(候國忠)과 왕윤성이 인솔하였던 제4퇀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보다시피 중국에서도 김일성에 대한 연구는 더 이상 금구가 아니다. 직방 김일성을 거론하지는 않아도, 김일성과 관련이 되고 있는 사람들과 사건들의 본래 모습을 공개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게 되었다. 8월에 공개 발행된 진룡장군의 전기에 이어서 또 언제 어디서 누구의 회고록이 불쑥 공개될지 모를 일이다. 류소화뿐만 아니라 주위(周偉, 주보중의 딸), 풍송광(馮?光, 풍중운의 아들), 장탁아(張卓亞, 이조린의 딸), 한소명(韓小明, 한광의 딸), 마계민(馬繼民, 양정우의 아들), 진홍(陳紅, 조일만의 손녀), 팽월관(彭越關, 팽시로의 아들), 리배적(李培迪, 리연록의 손자), 포홍빈(包洪濱, 장란생의 아들) 등 40여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는 '동북항일연군후대연의회'(東北抗聯後代聯誼會)라는 단체의 모임에 가서 이것저것 따지고 묻다보면 북한과 김일성이 자기들의 아버지나 또는 할아버지의 항일투쟁사업적(業績)을 훔치고 있는데 대하여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은 또 한편으로 그런 사람들의 불만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쓴 감도 없지 않다. 그야말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사실대로 말하면, 실제 모습 그대로의 김일성도 얼마든지 화려한 항일투쟁의 영웅으로 각광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김일성과 북한의 관계자들은 반드시 그것에서 만족하여야 했다. 그런데 만족하지 않고 너무 욕심을 부렸기 때문에, 나중에는 남의 것 까지도 모조리 자기의 것으로 훔쳐오는 커다란 우(愚)를 범하였던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오늘의 김일성은 안드레센의 동화에서 나오는 '벌거벗은 임금님'(Kejserens nye Klæder)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모든 것이 들통이 나버리게 된 마당에서 누구라도 나서서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진실을 말해 줄 일만이 남아있을 따름이다. 곧이어 길거리의 다른 사람들도 모두 함께 '벌거벗었다'는 진실을 말할 수 있게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거리바닥에 나선 ‘벌거벗은 임금님’ 꼴이 되어버릴 김일성과 북한의 망신은 남, 북한 할 것없이 모든 조선인들의 망신이고 나아가 중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인(족)의 망신이 될 수밖에 없다. 과거 구 소련이 붕괴되면서 줄곧 남한과 미국이 북한을 침략했다고 우겨왔던 1950년 ‘6. 25전쟁’의 비밀이 모조리 세상밖으로 드러났을 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북한과 중국의 국가적 도덕성이 풍비박산이 났던 전례가 있었던 것 처럼, 언젠가는 직접 중국인들에 의해 김일성의 신화가 풍비박산이 나게 될 날이 오리라는 것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나는 그것을 같은 조선인으로써 우리가 먼저 우리의 손으로 깨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중국의 조선인(족)들이 앞장에서 깨야한다.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는 용기 있는 한 소년의 외침이 중국 사람들보다 먼저 우리 조선인들속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는 것이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역사와 민족 앞에서 덜 부끄러워지고, 덜 비참해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나는 1999년부터 중국에서 동북의 항일투쟁사와 관련한 전기문학 작품들을 집필하였는데, 처음으로 동북항일연군의 제3군 군장이었던 중국인 항일장령 조상지(趙尙志)의 전기(비운의 장군, 연변인민출판사, 1999)를 중국에서 출판할 때에, 출간기념식을 사회하였던 최삼룡(조선족 평론가, 전 연변사회과학원 문학예술연구소 소장)선생이 ‘저자가 장차 김일성전기를 쓰기 위하여 산더미같은 자료를 준비하고 있다.’고 기념식 참가자들한테 발표하였던 적이 있었다. 동료들가운데는 반신반의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대부분이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8년 뒤인 2009년에는 동북항일연군의 제3군 군장 겸 제3로군 총참모장이었던 조선인 항일장령 허형식(許亨植)의 전기(만주항일파르티잔, 도서출판 선인, 2009)를 한국에서 출판하였는데, 그것이 중국의 조선족사회로 전해져들어가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나의 동료들과 나의 역사책을 읽기 좋아하는 독자들은 심심찮게 편지를 보내와 ‘언제면 김일성에 관한 최신 평전을 읽을수 있게되는가?’고 물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기대하는 ‘김일성 최신평전’이란 전혀 남한에서처럼 아니고, 또 북한에서처럼도 아닌, 말그대로 ‘벌거벗은 임금님’ 그대로의 김일성이었다. 일단은 내가 10여년 전에 이미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왔기 때문에, 나는 결코 어느 쪽의 눈치를 볼 것도 없고, 또 굳이 어느 쪽으로도 편향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된 것은 얼마나 큰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위인 전기란 반드시 어떻게 어떤 식으로 써야한다거나, 또는 쓰게 된다는 상식과 통념의 기본 잣대를 버린지가 무척 오래되었다. 그동안 여러권의 논픽션작품을 집필하면서 내가 가장 경계하고 조심해왔던 부분은 논픽션이 혹시라도 논문집이나 또는 정보책처럼 되어버리는 경우였다. 때문에 뭐니뭐니해도 논픽션 역시 문학속의 큰 갈래의 하나라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되고, 그의 대중성에 집착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항상 나의 독자들이 나에게 당부하는 부탁이 있다. “같은 역사책도 제발 재밌게, 편하게 읽을 수 있게끔 써달라.”는 것이었다. 바로 사실 위주의 정보책이나 논문집처럼 만들지 말아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러나 자칫 이런 부탁에 잘못 副應하여 너무나도 대중성을 꾀하다가 정확성을 우선시하는 논픽션의 본질을 상실당할 수도 있다는 점에도 경각성을 높여야 했다. 비록 평소 내가 논픽션을 쓸 때에 항상 지켜왔던 내 나름대로의 습관과 풍격대로 써내려가기는 하였지만, 적이 염려되는바도 없지않다. 때때로 사실 우선주의 빠져 주제 의식과 관점 등 면에서 그것이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만이 아닌 현재의 거울이어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감에는 제대로 다다르지 못하지 않았나는 자책감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오로지 모두 나의 문채(文彩)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일 따름이었다. 이 글을 쓴 나에게도 목적과 바램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북한의 김일성은 진짜가 아닌 ‘가짜’이며, 완전 ‘가짜’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남의 것을 무한하게 많이 훔친 ‘가짜’보다도 더 나쁜 ‘도둑’이라는 사실만큼은 세상에 제대로 잘 알려졌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둑이 지금 ‘벌거벗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중에는 나도 들어있었음을 세상에 알리고 싶을 따름이다. 김일성의 추종자들이 어떤 식으로 나를 보복할지는 아직 알수 없는 일이지만, 김일성에게 항일투쟁 업적을 도둑당한 많은 열사들의 영혼은 반드시 나에게 감사하리라 믿고 있다. 나는 그것이면 족하다. 비록 우리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나는 영혼이라는 이 비물질적 실체가 반드시 존재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마음이 한결 든든하다. 2013년 6월16일. 미국 뉴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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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하나님으로 군림하였던 김씨왕조가 통치하는 독재자의땅에서 40년넘게 살아온 한 인간으로써 지금도 북녘땅에서 그들을 신으로 섬기는 불쌍한 우리형제들도 하루빨리 눈을 떴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 책이완성되면 어떻게 볼수있을가요? 알려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