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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제1선 호위병
United States 철갑을 0 289 2014-04-14 20:32:01

김정일 제1선 호위병[2005-12-21 ] [2002년 4월 도라산 전망대 앞 인민군 GP초소를 탈출, 휴전선을 넘어 대한민국으로 귀순한 탈북자 주성일씨의 인민군병영생활 체험기를 연재 합니다. * 편집자 주]

비무장지대에는 북한군 129만 명의 군인들 속에서도 소위 ‘조국의 전초병’, ‘김정일 제1선 호위병’이라고 불리는 1만 8천여 명의 민경들이 있다. 이들은 북한에서 흔히 말하는 ‘특수병종’ 선발자들이고 특수훈련과 정신교육, 세뇌교육으로 철갑을 두른 ‘악질 빨갱이’, ‘진짜 공산주의자들’이라고 자칭하는 비무장지대의 맹수들이다.훈련을 마치고 난 나도 그들 중 한사람이 되었다. 민경 본 부대에 배치 받고 나니 우선 먹고 입을 걱정은 없어서 좋았다. 내가 배치된 부대는 2군단 직속 민경대로서 판문점에서 임진강까지의 비무장지대를 방어하고 있었다. 서부전선이라고 불리는 판문점에서부터 임진강까지 구간에 우리 부대 초소는 15개였고 8개 전투중대가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다.민경근무는 교대제 근무이다. 초소는 소대별 근무인데 4개 중대가 두 달을 비무장지대에서 근무를 서면 다른 4개 중대는 후방계선(판문군)에서 훈련을 받다가 교대로 근무에 진입한다. 보통 한 개 중대는 4개 소대로 구성되어 있고 인원은 200명 내지 230명까지의 전투원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북한군의 중대편제에서 제일가는 숫자이다.민경중대장들은 특수부대 대대장 이상의 대우를 받는데 군사 칭호도 소좌이다. 부대장은 연대장급 대우를 받고 군사칭호는 상좌이다. 지프차도 일반 연대장들은 ‘북경’을 타는데 민경 부대장은 사단장과 같은 ‘우와즈’를 탄다. 모든 소대부(部)는 소대장과 정치지도원, 보위지도원 등 장교 3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중대부(部)는 중대장, 정치지도원, 보위지도원, 군사부중대장, 군의관, 사관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북한에서 제일가는 군사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내가 배치 받고 간 곳이 부대 지휘부와 함께 있는 지휘소대였다. 우리들의 임무는 평시에는 유선통신과 무선통신으로 초소와 초소, 초소와 부대 지휘부, 지휘부와 상급 단위의 통신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15개 초소에는 우리가 항상 통신보장근무를 섰다. 나는 지휘소대에 가서야 ‘부탁자’라는 말도 일리가 있지만 무엇보다 학력을 기준으로 해 뽑혀왔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들은 통신 전문 급수를 무조건 1급 내지 2급 수준으로 도달해야 한다. 통신은 부대의 생명이다. 통신병이 부대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이 북한군의 철학임을 알게 되었다. 통신 소대의 막사마다에는 ‘통신은 부대의 신경’이라는 김일성의 말을 대문짝처럼 써 걸어놓았다.지휘소대에 배치 받은 4명의 병사들은 그때부터 맹훈련에 다시 돌입했다. 훈련소 훈련이 육체와의 싸움이라면 지휘소대에서 받은 훈련은 머리와의 싸움이었다. 병사 한 명에 두 명의 무전수와 유전수가 붙어서 넉 달간 집중훈련을 시켰다. 우리가 휴대한 유선(전화)은 소련제였고 무전기는 단파와 초단파로 된 신형 무전기였다. 적(국군)의 무선통신도 도청할 수 있는 최첨단 장비였고 우리는 암호해독법과 통신결속법, 지휘보장법 등의 훈련뿐만 아니라 통신장비 자체수리 훈련까지 받았다.잠은 훈련소에서보다 더 못 잤다. 수천 가지의 암호와 문장을 외워야 했고 송신, 수신을 익혀야 했다. 특히 전건으로 된 타자연습은 오른손뿐만 아니라 왼손까지 능숙히 다를 수 있게 훈련해야했다. 교관들은 우리에게 밥을 먹어도, 화장실에 가서도 입 속으로 글자와 숫자를 조합한 송신, 수신을 하라고 요구했다. 머리가 빠개지는 듯이 아프고 하루에도 두세 번씩 코피를 쏟을 때마다 함께 훈련 받던 동료들은 ‘차라리 전투중대나 갈 것을 잘못했다’고 투덜거리기 시작했다.훈련은 참으로 가혹했다. 송신 전건타자에서 한 번 오타를 내면 5번, 수신에서 한 글자를 틀리면 10번씩 기합을 받아야 했다. 기합도 종류가 여러 가지다. 25킬로그램이 넘는 대형무선기와 무기(통신병은 무기가 접철식 AK 소총이어서 가목식 소총보다 더 무겁다), 그리고 장구류를 지면 50키로가 넘는데 무조건 4킬로미터를 뛰어갔다 와야 한다. 손바닥을 펴고 앞 낙법, 뒷 낙법과 같은 기합들을 받고 나면 앉아 있을 힘도 없어진다. 전건 개머리에 머리가 깨져 피가 나온 것도 몇 번인지 모른다.통신 훈련이 고조될 무렵 우리는 비무장지대로 진출하게 되었다. 처음 나간 곳이 북한에 하나밖에 없는 비무장지대 마을인 판문점리였다. 백동이라는 마을이름도 있는데 유래는 처음에 백 개의 동(100가구)이 있었다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은 1,500명의 주민들이 비무장지대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판문점리에서 농사짓는 땅이 비옥하기로 소문이 났다. 판문점리에서 한해 농사를 지으면 3년은 이곳 주민들이 먹고 놀 수 있다는 통계도 있지만 대부분 군량미로 바쳐지기 때문에 주민들은 하루 한 끼는 죽을 먹고 있다. 이곳에서 기르는 모든 가축 역시 인민군 지원으로 모조리 바쳐진다. 내가 속한 민경부대가 묵은쌀이 아닌 기름기 도는 햅쌀을 먹을 수 있는 것도 다 판문점리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판문점리 철책선 너머에 있는 대성동에 역시 한국측 비무장지대 마을이 있다. 원래 판문점리와 대성동 마을은 전쟁 전 같은 마을이었는데 전쟁 후 38도선을 가르면서 마을까지 갈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판문점리에는 북한에서 제일 토대가 나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동네 출신들도 있지만 멀리 자강도, 량강도, 함경남도, 함경북도에서 끌려온 사람들도 많았다.얼핏 보면 이들이 비무장지대에 있어서 월남하지 않겠는가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수백 명의 민경들이 지키고, 수많은 보위부 요원들과 분주소 요원들이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서로를 감시하는 체계도 완벽할 정도였다. 이들 다수는 월남자 가족이었다. 이들이 비무장지대 밖으로 나가려면 출입증과 농장에서 발급하는 별도의 확인증이 있어야 출입문을 통과하여 개성이나 판문군으로 나갈 수 있다.언제인가 내가 이곳 분주소 소장에게 왜 토대가 나쁜 사람들만 데려다 놨는가 하고 묻자 그는 웃으면서 전쟁이 일어나면 한꺼번에 죽으라고 이곳에 가두어 놓는다고 했다. 그들의 자식들은 모두 군대에 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비무장지대 마을을 벗어날 수도 없었다. 거기에서 농사를 짓고 거기에서 한평생 살아야 했다. 결혼도 같은 처지끼리 해야 했고 어쩌다가 비무장지대 밖에 사는 사람하고 결혼을 하면 그 사람까지도 무조건 들어와 살아야 했다. 여기 사람들은 말이 북한 주민이지 사실상 수용소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그런 사람들에게 우리 통신훈련병들이 두고두고 후회하는 사건을 저질렀다. 그때 우리는 포사격을 대비한 유선(전화)훈련을 하고 있었다. 전화선을 늘여놓고 절단법, 도청법, 그리고 전화선 찾는 법 등을 훈련하고 있었다. 훈련용 전화선이어서 우리는 훈련을 끝내고 전화선을 철수시키지 않은 채 막사로 돌아와 쉬곤 했다.사건이 일어난 어느 휴식일, 우리는 오전에 쉬고 전화선 점검을 해보았는데 통화가 되지 않았다. 대번에 전화선이 절단된 것을 알아차리고 전화선 복구에 나갔다. 훈련용 전화선이어서 그리 바쁘지도 않았고 그 날은 시간이 느긋했던 탓으로 고구마를 캐서 구워먹으며 늦게야 그곳에 도착하였다. 전화선은 10미터 정도가 잘려 나갔다. 잘려져 나간 전화선을 찾으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우리는 한 농부가 땔감용 풀을 베는 것을 목격하고 그곳에 갔다.아니나 다를까, 농부는 전화선으로 풀단을 묶어놓고 있었다. 다짜고짜 그 농부를 추궁하는데 농부는 우리에게 울면서 비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비무장지대 규정에 대하여 잘 몰랐던 우리는 왜 농부가 그토록 애원하는지 몰랐지만 규칙대로 상부에 보고를 했다. 오랫동안 그곳에서 살아온 농부는 우리보다 비무장지대 규칙을 통달하고 있었다.보고를 하고 나서 우리의 일은 끝난 듯싶었다. 하지만 며칠 후 부대 보위부에서 처형 군중심의에 참가하라는 전달이 왔다. 우리가 왜? 그것도 아직까지 훈련병이나 다름없는 우리들이 군인을 처형하는 것도 아니고 민간인을 처형하는 자리에 참가하라는 것이 의문스러웠지만 참가하고 나서 내막을 알게 되었다. 그 농부를 총살하는 것이었다. 순간 우리는 너무나 당황했다. 일이 그토록 험악하게 번져질 줄을 몰랐던 것이다.중앙에서 내려온 인민배심원들과 판사들이 그의 죄행을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비무장지대는 아직 적후(敵後)지역이고 적과 싸우고 있는 전선지역이다. 그런데 고××는 군부대의 통신선을 고의로 잘라 군인들의 전투행동에 지장을 주고 나아가 사회주의 우리 조국을 위험에 빠뜨리려고 했다. 고××는 6.25때 국군을 따라서 월남한 고××의 아들로서 평소에 당과 조국에 도전하는 일들을 거리낌 없이 했으며”다는 이해할 수 없지만 판사의 말은 그가 월남자 가족이고 이번 일은 의도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마땅히 공화국 헌법에 의해 처형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농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지만 그때 통신선은 분명히 훈련선이라고 상부에 보고했다. 훗날에야 그곳 분주소 소장이 자기의 출세를 위하여 그때 일을 조작하고 과장했다는 사실을 군 보위부 지도원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그 농부가 사람이기보다 빨리 죽기를 바라는 하루살이 같은 존재였다는 것이 내가 군사복무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북한에서는 공공연히 ‘전쟁이 일어나면 정치범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과 빨간 전과자 딱지의 사람들, 그리고 월남자 가족들부터 먼저 죽인다’는 말이 안전원들과 보위부원들의 입을 통해 나돌고 있다. 아직도 나의 눈앞에는 총살을 당한 그의 모습보다도 갓 눈을 뜨기 시작한 아이를 엎고 쓰러져 오열하는 그의 딸 모습이 어른거린다. 의도된 것은 아니었지만 영원한 죄책감으로 남아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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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일성노예들 ip1 2014-04-15 00:44:42

    -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4-04-15 10: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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