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의 분신은 김일성 아닌 고려인2세 문일- 북한 건국역사 바로쓰기 >>
광복 후 소련 스탈린이 북한 책임자로 내세운 사람이 김일성이 아니라 고려인 2세인 문 에리크(문일)이라는 증언과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주도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또한 한국전쟁 후 소련국적의 많은 고려인들이 빨치산들에 의해 테러 등 폭살됐다는 것이 다시금 확인돼 광복 후 북한건국의 역사를 재조명할 필요가 높아졌다.
그만큼 고려인들이 북한 건국에 깊숙이 관여했으며 유일지배 체제하에서의 왜곡된 역사적 사실들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하바로프스크 브야츠크 밀영 활동당시 김일성보다 계급이 높았던 문일 소장의 둘째딸 에밀리야(전 카자흐스탄 내무성 근무)의 증언에 의해 알려졌다.
에밀리야는 김일성 주치의였던 고려인 이동화씨의 아들인 이 세르게이(본보 1996년 7월25일)와 함께 김정일의 어릴적 여자 소꿉친구였으며 이들 셋은 광복 후 평양에서도 자주 어울렸다.
문일은 1913년생으로 김일성보다 1살 아래였지만 계급이 높은데다 스탈린의 총애를 받고 있어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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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바 볼리체크리츠스키대(종합기술대)를 졸업한 문일은 우리말과 함께 러시아어 뿐만 아니라 영어,중국어,일본어 등에 능통했다.
김일성은 브야츠크에서 빨치산 활동 때부터 광복 후 북한에서의 생활까지 문일로부터 통역 도움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훗날 통역비서로
세상에 잘못 알려진다.
스탈린은 1940년초 극성을 부렸던 우스리스크강가에 주둔한 일부 조선인으로 구성된 일제 만주제국 특수부대들의 대소련 첩보활동에 대항키 위해 하바로프스크 브야츠크에 88독립여단을 세운다.
많은 고려인들이 이 부대에 배속됐으며 김일성은 뒤늦게 합류했다.
문일은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김일성의 통역비서가 아닌 독립여단 장군으로 러시아어에 능숙했기 때문에 스탈린의 집무실을 무상출입했다.
이런 문일이 통역비서로 잘못 알려진 것은 광복 후 김일성만이 역사에 부각됐기 때문에 문일의 유가족들은 반세기가 훌쩍 넘어서야 아버지의 한과 고려인들의 당시 참상을 밝힌다.
러시아말을 몰랐던 김일성은 스탈린의 총애를 받고 있는 문일과 늘 같이 다녔으며 주위 사람들의 눈에는 통역비서로 보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광복 후 김일성의 유일체제로 바뀌면서 스탈린이 내세운 군부책임자 문일의 존재는 통역비서로 왜곡됐다.
광복 후 많은 고려인들이 군부책임자였던 문일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김일성 또한 이들을 자주 찾았다.
한번은 문일이 스탈린을 방문한 후 받은 선물 중 해군 아동복과 세발 자전거 등을 어린 정일에게 주면서 딸 에밀리야와 사이좋게 지내라고 당부했다. 김일성이 타고 다닌 고급 세단 또한 문일이 북한을 떠나면서 남겼다고 한다.
에밀리야는 스탈린이 광복 후 북한체제를 군부와 정치 두 축으로 나누려 했다는 것.
김일성을 수상 즉 주석직에 오르게 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부가 뒷받침 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고 판단, 문일을 북한군 총사령관으로 내세웠다.
더욱이 스탈린은 정치면에서 문일을 내각수상 비서(수상 김일성)와 함께 노동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위원장 허가이,고려인)으로 임명,‘럭비공’ 같은 김일성을 북한 허수아비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그림자처럼 실행에 옮겼다.
항일 빨치산 출신들과 소련파 즉,고려인 군인들은 세월이 지날수록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북한의 동향 특히 김일성의 일거수일투족이 북한 책임자를 겸했던 문일에 의해 스탈린에 보고 됐기 때문에 항일빨치산 출신들은 문일의 존재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군부 통치권자가 된 문일은 스탈린식 군대 양성에 힘을 쏟았고 고려인들이 대부분의 지휘체계를 장악했다.
고려인과 빨치산들의 갈등이 폭발한 것은 한국전쟁을 전후로 일어났다.
김일성과 문일은 모든 업무에 있어서 시기나 방법 등에 대한 의견 조율이 제대로 되지 않았으며 심하게 다투기도 했다.
스탈린의 집무실을 들락날락했던 문일은 김일성에게 많은 요구를 했으며 그 성과에 대해서 스탈린에 즉각 보고했다.
한국전쟁 발발도 바로 이같은 북한 두축의 갈등의 골이 문일과 김일성 쌍두마차의 ‘물귀신 작전’ 때문에 결국 한쪽 바퀴(김일성)가 남으로 향하는 촉매제가 된 것이라고 한다.
결국 전쟁은 종식됐고 문일과 김일성은 나란히 정전 담판장에 나타나 미군과 서명한다.
종전 후 결과에 대한 책임이 가려지자 김일성과 문일의 갈등은 첨예하게 대립한다.
스탈린은 문일에게 군부장악을 새롭게 지시하면서 김일성에 대한 경계를 강화토록 지시한다.
북한 내부가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문일의 측근들이 테러 등으로 하나둘씩 폭살당한다.
불행인지 1953년 3월 스탈린이 죽자 이런 일은 드러내놓고 발생한다.
평양의 한 군중집회에서 김일성이 연설도중 고려인 단상으로 폭탄이 떨어져 많은 사상자를 냈고 앞쪽 군중석에 참석했던 문 에밀리야는 어머니의 보호아래 무사했다는 것.
그 후 문일의 운전수 또한 제거되고 문일을 그림자처럼 보호했던 군감찰책임자이자 내각 부수상 등 당정 고위직을 지냈던 박창옥(유가족 카자흐스탄 거주)도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이처럼 문일을 측근에서 보좌했던 군부와 내각 및 당에 배속된 고려인 지도자들 중 알게 모르게 폭살을 당한 인원은 50여명에 가깝다고 한다.
김일성과 빨치산들의 이같은 행동으로 소련과 북한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한다.
김일성의 유일지배체제 속도는 가속화됐고 문일과의 관계는 급기야 결별로 이어진다.
어느 날 김일성과 문일의 독대가 밤새도록 이뤄지고 술자리에서 두 사람은 “모양새 좋게 헤어지자”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결국 문일은 평양을 떠나 모스크바로 돌어가면서 많은 고려인들과 그들 자녀들의 안전을 염려해 이들과 함께 동행한다.
북한에서의 고려인과 빨치산들의 지리한 싸움은 문일의 모스크바행으로 종식된다.
소련군부는 문일과의 독대에서 군대에 복무할 것을 권하지만 문일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제 쉬고 싶다고 말한다.
1958년 여름 문일은 희망대로 고려인 집거지구였던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났지만 날씨가 너무 더워 카자흐스탄 알마틔에 도착한다.
에밀리야 아버지 문일(1968년)과 어머니 남웨라(1984년)는 모두 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자녀들에게 광복 후 북한에서의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얘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 들어 김일성이 비공식 원동(연해주)을 방문하면서 문에밀리야를 만나려 했지만 소련 KGB의 보호아래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회피했다.
김정일의 어릴적 소꿉친구였던 에밀리야는 1986년 평양을 관광차 방문하여 안내원에게 정일을 만나고 싶다고 말한다.
이튿날 북한 주재 소련대사관에서 브야츠크에서 같이 생활했던 노인만을 상봉시키고 정일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소꿉친구 정일 지도자는 지금 지방 출장 중이라 만날 수 없다”고 전했다.
문일의 유가족들이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안 북한은 주재 대사관 직원을 통해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북한과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됐던 1970년대 레베데프 장군은 김정일의 소끕친구 에밀리야를 찾아와 당시 평양에서의 사진과 김일성 집안에 대한 비공개 사실 등을 알려주길 원한다.
북한 역시 4번 이상 찾아와 자료사진 등을 요구하며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말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많은 귀중한 사진들이 다른 가족들에 의해 김일성과 레베데프에게 들어가 양국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되면서 일부가 남한으로 흘러들어왔다.
소련은 김일성의 치부와 각종 악행 및 집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공개하려 했고 김일성은 이런 사실을 사전에 기를쓰고 막기 위해 에밀리야 가정에 대한 각종 회유와 협박을 일삼았다고 한다.
邂꼴◁黎袖/nc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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