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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 대남 특수 공작원 증언
공작원 0 335 2014-09-19 08:53:07

귀순 대남특수공작원 증언

“대남 침투 95% 성공”

요즘 내게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남한으로 침투하기가 별로 어렵지 않은 건가』 동해안 무장간첩 사건으로 대남침투에 관심이 커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충격을 받기도 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들은 『만약 잠수함이 좌초하지 않았던들 지금까지 침투한 사실조차 모를 것 아닌가』 개탄을 하기도 하고, 『잡으라는 간첩은 못 잡으면서 오발사고만 낸다』고 군을 힐난하기도 한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북한에서 대남침투조 교육을 받고 활동했던 내가 보고 들은 바로는 대남침투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북한 중앙당 작전부 산하 사리원연락소에 배치돼 침투를 준비할 때 선배가 한 말이 기억난다.

『95% 성공한다. 실패할 확률은 5%밖에 안된다. 그땐 네가 재수가 나쁘다고 생각해라』

그 선배는 이렇게 덧붙였다.
『설령 재수가 나빠 발각돼도 절대 안 죽는다. 우리는 머리를 들고 쏘고 걔들(국군)은 머리를 박고 쏘기 때문에』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그들은 잘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군대 갔다온 사람, 특히 전방에서 철책 근무를 서 본 사람들에겐 더욱 믿기지 않았던 듯하다. 그들은 『비무장지대에 지뢰가 깔려 있고, 철책에 딸랑이가 붙어 있고, 50m~1백m 간격으로 초병이 지키는데 어떻게 넘어올 수 있느냐』며 머리를 흔든다.

믿건 안믿건 그건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인 것은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안 들키고 몰래 지나갔다면 지키는 사람이야 지나갔는지 아닌지 모를 것 아니겠는가. 잠수함이 좌초하지 않았던들 동해안 사건도 일어났을 턱이 없고, 나라도 이렇게 시끄럽지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내가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마치고 중앙당 작전부 산하 사리원연락소에 침투조(안내조)로 배치됐을 때 침투조 24개조 중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은 사람이 17명이나 있었고, 훈련교관들까지 합치면 38명이었다. 이 영웅칭호는 19회 이상 무사히 침투했을 때 수여받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그 사람들은 최소 19회 차례를 무사히 침투했다는 것이고, 따라서 철책선이든 해안선이든 38회 이상을 무사히 넘었다는 말이다. 개중에는 최고 29차례 침투했던 사람도 있었다. 서너댓번 침투했던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북한에는 사리원연락소와 같이 중앙당 작전부 소속으로 있는 연락소가 청진연락소 원산연락소(고성 소재) 등 동해안에 2개, 남포연락소 해주연락소 등 서해안에 2개, 또 내륙에 사리원연락소와 개성연락소 등 2개가 있다. 이 연락소들은 규모도 비슷하고 영웅 칭호를 받은 사람들의 수에 있어서도 별 차이가 없다. 그 사람들이 침투한 횟수를 헤아려보면 내 말이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중앙당 작전부뿐만 아니다. 중앙당 사회문화부 통전부 대외정보조사부 등도 연락소들을 갖고 침투시키고 있고, 이번에 동해안에 온 인민무력부 정찰국도 여러 지역에 거점을 두고 침투조를 운용하고 있다. 동해안에 내려온 정찰국의 25명도 잠수함의 좌초로 다만 빠져나가지 못했을 뿐, 상륙은 모두 무사히 했던 것이다. 이래도 과연 침투가 어렵지 않다는 말이 믿기지 않는다고 할 것인가.

침투경력 20회 이상도 수두룩

「백 사람이 한 도둑 못 지킨다」는 말이 있듯 숨어 들어오는 사람을 어떻게 막겠는가 생각할 수도 있다. 『너희네들이야 그렇게 훈련받은 사람들 아니냐. 우리가 허술하게 지키지는 않았는데, 너희네들의 침투 기술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얼버무리려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나는 그것도 천만의 말씀이라 생각한다.

평양 근교 산에 「이남환경관」이라는 시설이 있다. 공작원들을 훈련시킬 목적으로 서울의 거리와 똑같이 만들어놓은 곳이다. 산속에 8km 가량의 터널을 뚫어서 양쪽에 상가건물을 지어놓고 공작원들이 실제 서울생활을 연습하고 있다. 그 안에는 웬만한 한국상품은 그때그때 구비돼 있어 공작원들이 돈을 내고 물건을 사는 훈련을 한다.

이 이남환경관 뒤켠에는 거대한 서울시 축도가 만들어져 있는데 그 크기가 폭 1백m, 길이가 1백50m 가량 된다. 서울에 무슨 새 건물이 들어서면 해당되는 자리에 똑같은 모형을 만들어 세운다. 그 위로 사람이 타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기계가 설치돼 있다.

거기서 교육받아서인지 내가 한국에 왔을 때도 전혀 낯선 느낌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서울시에 동(洞)이 몇 개이고, 한강다리가 몇 개라는 등 서울 시민들이 잘 모르는 것을 더 잘 아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이 이남환경관의 교관들이 모두 남한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내가 있을 때 80명 정도 됐는데, 모두 납치해온 사람들이란 말을 들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 납치돼 왔으니까 우리한테 좋은 감정을 갖고 있을 리가 없고, 그래서 피차간에 말을 많이 나누지 않았다.

내가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다니던 때도 이남에 침투해 사람들을 납치해왔다는 소리를 종종 듣곤 했었다. 선배들이 누구누구는 어디서 납치해왔고, 이번에 몇 명 납치해왔다는 얘기들을 자주 들었다. 이남환경관에서 교육시킬 사람으로 쓰기 위해 특정 직업인을 납치해 오기도 했다는 것이다. 내가 물어보니 『해안가에서 텐트치고 자다가 누가 깨우길래 보니까 총구를 겨누고 가자고 해서 황망간에 끌려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과연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넘어갔겠는가. 철책선이든 해안선이든 넘어갔으니까 북한에 있는 것 아닌가. 그들은 훈련받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통과할 수가 있었는가. 그렇게 보면 침투가 어렵지 않다는 내 말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예가 있다. 밀입국자들의 경우다. 중국에서 밀입국하다 잡혔다는 보도가 가끔 신문에 실린다. 밀입국을 시도하는 족족 모두 잡히고 말았다면 중국에서 밀입국을 시도하는 사람이 이제 거의 없어야 옳다. 아직 밀입국자가 잡힌다는 것은 여전히 성공확률이 높다는 점을 입증하는 사례나 마찬가지다. 그러기 때문에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들 역시 침투훈련과는 인연이 전연 없었던 사람들이다.

일본 침투는 「식은 죽 먹기」

이번 동해안 잠수함 침투사건을 두고 장비부족을 탓한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나라 전해상을 감시하는 장비, 즉 구축함 호위함 초계함 등이 기껏 4~5척에 불과하고, 동해에는 1~2척이 뜨는데 그 수의 장비로는 해상과 수중을 완벽하게 감시할 수 없다는 말을 한다. 그래서 장비부터 도입하자는 말도 나오고 있다. 일리는 있는 말이지만, 이 또한 「내탓이오」와는 거리가 멀다.

작년 11월의 일이다. 일본에서 방송에 관계하는 사람이라면서 내게 사진을 들고 온 일본인이 있었다. 그는 열대여섯장의 사진을 꺼내더니 내게 아는 얼굴이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주문했다. 나는 그 사진 중에서 김정일군사정치대학에 다닐 때 본 쾌활하고 잘 웃던 한 남자의 얼굴과 똑같은 사진을 찾아냈다. 그 일본인의 말에 따르면 사진의 주인공이 일본 남쪽 끝인 가고시마 해변가에서 78년에 실종된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내게 그 사람 키가 얼마인지, 어떻게 보게 됐는지, 그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지 꼬치꼬치 물었다.

그는 내게 북한 공작원들이 일본에 침투하는 것이 쉬운지 어려운지를 물었다. 나는 『식은 죽 먹기와 같다』고 간단하게 대답해줬다. 일본에는 1백번을 침투해도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기 어렵다고 말했더니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중앙당 작전부 산하 청진연락소에서 일본 침투를 전담하고 있다. 공작원의 수는 3백명 가량이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다닌 내 동기생 9명도 청진연락소에 배치돼 일본공작을 하고 있다.

그는 내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날 그가 묻고 내가 대답한 것을 대충 옮기면 이런 내용이 된다.

-일본 침투는 주로 어디로 하는가?

『침투루트는 자신의 생명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얘기 안한다. 내가 사리원연락소에 배치됐을 때 베테랑 선배들한테 물었는데, 그들은 스스로 찾아야 된다고 말했을 뿐 알려주지 않았다. 일본은 한국보다 경계가 심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곳으로 들어갈 수 있고, 침투조에 따라 애용하는 루트가 몇 개씩 있을 것이다』

-일본에 침투경험을 가진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가?

『한둘이 아니다. 일본 침투 기념으로 일본 물건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일본 해안에 접근하는데 일본 배에서 뭐라 뭐라 물어서 얼버무리느라고 혼이 났다는 그런 얘기는 선배들한테 많이 들었다』

-일본인을 납치해 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나?

『일본 내에서 납치한 사람을 작전조와 접선해 북한으로 가는 배에 실어 보냈다는 말을 일본에 고정간첩으로 있다가 재교육 받으러 북한에 돌아오는 사람들한테서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일은 어렵지 않다. 작전조가 일본 해안에 접근하면 해안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납치한 사람을 넘겨준다. 만약 저항하면 눈과 입을 가리고 묶어서 고무보트에 태워보내기도 하는데 조용히 따라가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북한에서 본 일본인으로 기억나는 사람은?

『김정일군사정치대학에 다닐 때 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던 선생이 일본인이었다. 당시 57,8세였는데, 이름을 한금실이라고 해 학생들이 「한선생」이라 불렀다. 일본에 남편과 두 아들이 있다고 하면서도 어떻게 북한에 오게 됐는지는 말해주지는 않았다. 그녀는 70년대 후반에 왔다고 했는데, 명절 때면 특히 적적해 했다』

-혹시 그녀가 재일교포 귀국자이지 않나?

『아니다. 한선생은 우리말을 전혀 못했다. 귀국선을 탄 사람이면 우리말을 벌써 배웠을 것이다』

-그녀는 어디에 살았나?

『전에는 대학 부근에 살았는데, 그후 만경대구역으로 이사해 광복동거리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 아파트는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는 곳으로 한국에서 납치된 사람들도 거기 살고 있었다. 출입을 엄하게 통제했다』

-일본에서 한해에 1만명 정도가 북한을 방문하는데, 그들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전할 수도 있을 텐데?

『그녀가 사는 아파트는 이웃끼리도 서로 접근하는 것을 꺼린다. 김정일군사정치대학에 있는 사람이나 아파트에 사는 극소수를 빼고는 아무도 그녀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녀가 외출하면 반드시 감시인이 따라붙는다』

-그 밖에 일본인을 본 적은 없나?

『대학에 다니면서 내가 본 일본인은 한선생을 합쳐서 20명 정도 된다. 그들은 모두 납치돼 왔다고 생각한다』

일본 역시 뻥 뚫려 있는 것이다. 일본의 해상자위대가 보유한 장비가 부족해서 일본 침투가 「식은 죽 먹기」가 된다면 더이상 할 말이 없어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국방비를 지금의 몇배로 증가시켜도 감당할 수 없다는 결론이 된다. 침투방지는 현 우리 경제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돼버리고, 나아가 일본같은 경제력을 갖는다 해도 여전히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늘 장비부족을 탓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동해안 사건이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의 소행으로 밝혀졌을 때 내 머리를 스친 생각이 있다. 「군부의 입김이 세졌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작전부 대외조사부 사회문화부 통전부 등에서 다양하게 대남작전을 펼치고 있는 중앙당 3호청사에 비하면 인민무력부 정찰국은 대남작전 경험이 별로 없고, 더욱이 최근에는 별로 침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번처럼 동해안 사건이 일어난 것은 『대남작전은 중앙당 독점물이 아니다. 우리도 하자』는 식으로 인민무력부가 영향력 증대를 배경으로 활동범위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부산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후략...>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611/nd11_17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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