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을 때는 이미 차가 두만강연안을 따라 무산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흐트러진 의식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주지 않았다. 신기했다. 15분전만 해도 젊음으로 의기양양했던 그 기상은 온데간데없어졌다.
온 사지가 통증으로 벅적지근하고 그 시간대에도 뜨거운 선지피는 뒷머리에서 풀떡, 풀떡 거리며 등을 향해 계속 흘러내려왔다. 그나마 코피와 살점이 떨어졌던 이마에서 피는 멈췄다. 하지만 속이 메스꺼웠고 헛구역질에 어지러움과 신음소리는 두툼해진 입술과 부러진 이 사이로 줄줄이 새어나왔다.
“정신을 차렸어!! 짐승 같은 새끼! 너 공무집행을 방해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아까처럼 또 한 번 반항을 해 봐!! 이번에 가차 없이 검정콩알로 네놈의 대갈통을 부셔주지! 너 같은 건 이 땅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야!! 알겠어?”
조수석에 앉은 부장이 계속 뇌까렸다. 그럴수록 나의 심장은 매 맞은 아픔보다 그들에게 벌레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수치심에 더 괴로웠다. 수갑이라는 물리적 기재에 흐르는 피마저 방치해야하는 속수무책이 가득이나 쓰린 가슴에 송곳질을 했다.
차는 계속 달렸다. 타인에 대한 고통 따윈 아랑곳도 없이 구불구불한 비포장도로로 먼지를 날리며 기염을 토했다. 야속한 구동력의 정상운행은 순종과 복종만을 강요하는 이들의 대변인처럼 느껴졌다.
구름 몇 점 없이 청청해져버린 하늘, 그 아래로 첩첩히 놓인 등판과 골짜기는 두만강연안을 따라 내려가면서 더 한층 산산한 녹색의 천국을 이루고 있었다. 4월 말이라 조금만 있으면 이곳도 온갖 생명들의 숨 쉬는 보금자리로 전변될 것이다.
자연의 색다른 조화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나의 머리에 별의별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읍에서 40여리 떨어진 아찔한 벼랑길에 이르렀을 때는 타이어에 공기구멍이 뚫릴 것을 바랬다. 그로 인해 차는 전복되고 총을 쥔 법관들은 다 뒈지거나 병신이 되고 혼자 도망갈 수 있는 기사회생의 기회를 준다면 얼마나 좋으랴? 나는 어느 한 외국영화의 탈출 장면을 그려보며 천지신명을 향해 빌고 또 빌었다.
우리고장에서 무산까지는 180리 길이다. 워낙 생산품이 없어 철도가 들어오지 않은 관계로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철광석기지인 무산을 통해 이 육로로 가능했던 이곳은 해발 천 미터가 넘는 북부산악지대였다.
전후 50년대 말에 북한의 독재자는 이런 곳들을 지배하기 위해 명령 158호를 발표했다. 명령은 전쟁의 상처를 가장 많이 입은 황해도와 강원도, 평안도에서 출신성분이 불결한 사람들을 이주민으로 간주하고 중국공산당을 하늘처럼 믿으며 북부산간지대로 추방하는 것이었다. 대신 북쪽지역에서 출신성분이 좋은 사람들을 남쪽으로 파견했다.
시행착오적인 민족의 대이동이 잘못됨을 느꼈을 때는 이미 일은 그릇 친 뒤끝이었다. 마오쩌둥이 죽고 중국이 개혁, 개방으로 들어가 적국인 대한민국과 국교정상화를 맺었던 것이다. 마음대로 통제하고 감시하려던 구역이 그들의 탈출구가 되어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그 통로로 불법 월경과 자유를 찾아 세상 밖으로 나왔다.
원래 사회의 상부구조로서 정권은 그 형태와 역할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되었다.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 그 외 다른 정권이란 이 지구촌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고대노예소유자사회로부터 이어진 이 명맥을 외세에 의하여 강요된 민족분단의 기구한 역사의 와중에 소련군을 등에 업고 절묘하게 이용한 북한의 독재자는 사회주의 고유의 1국1당제의 원칙에 근거하여 모든 정당, 사회단체들을 와해, 흡수의 비열한 방법으로 말살해버리고는 집권당을 창건하고 핵심계급과 기본계급, 적대계급이라는 인류역사상 가장 악랄한 노선정책을 강구했다. 여기에 전쟁회피는 그 정책의 명분을 세우기에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친일파와 미군, 국군의 방조자였던 치안대가담자들, 그리고 당 정책을 비난한 시비꾼들로서 반동과 역적의 오명을 쓰고 숙청된 일가친척들, 월남도주자, 국군 및 북한군포로들, 또한 법적제재를 받은 전과자들이 적대계급의 주되는 대상이었다.
인구밀도의 10%밖에 안 되는 핵심계급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대상으로 적대계급을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가운데 놓인 기본계급은 자기들의 동조대상이었다. 따라서 절대다수에 속하는 기본계급을 어떻게 쟁취하는가에 따라 자기운명이 결정된다고 북한의 독재자는 판단했다.
자산계급에 외국출신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우리 집안은 겨우 적대계급을 면할 수 있었지만 기본계급에서 핵심계급으로 되긴 불가능했다. 그 깊이를 알자면 냉혹한 현실체험과 삶의 지혜가 나로서는 짧았던 것이다. 하지만 설사 과거의 역적질이 어두웠다고 밝은 21세의 오늘에도 어두워야 한다면 인생은 너무도 허무한 것이 아닌가?
당사자만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대를 이어가는 치욕의 굴레는 누구보아도 상식 밖의 일이었다.
무산은 인접 군에 해당되지만 그렇다고 일반주민들이 마음대로 다니는 곳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앞길에 네 개의 국경검문소가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성차지 않아 때 없이 지역 분주소(파출소)에서 이동식검문을 차려놓으면 주민들의 수족은 더 불안해졌다.
노동당간부들에게는 어께에 폼만 넣을 호화호식의 법적공간일지는 몰라도 지역이동자체가 법으로 금지된 일반주민에게는 늘 불안과 공포의 대상으로 다가오는 곳이 바로 국경검문소다. 신분증 외에 증명서를 더 소지해야 통과할 수 있는 외나무다리여서 그 두려움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걸리면 빼도 박도 못하고 그들의 선택여하에 따라 고통과 불행의 그래프가 달라졌다.
단 한 가지 다른 방법이라면 검문을 담당한 검열원에게 뇌물을 주는 것이었다. 뇌물도 중국산 담배 한 통으로 일반주민의 생활비 한 달분에 해당되는 값어치였다. 쌀 1킬로그램하고도 맞먹는 만만치 않은 금액이어 당사자들은 모두가 감히 그 선택을 겁냈다. 그것도 한 개의 초소가 아니라 4개, 심지어는 5개까지 될 때면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한 마디로 말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만큼이나 힘든 곳이 바로 북한 전역에 거미줄처럼 포진되어있는 검문소였다.
이런 관계로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혁명의 수도이며 북한의 심장인 평양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수많은 기본계급과 적대계급출신들이 수십 년을 살면서 제 나라의 수도를 밟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평양뿐만 아니라 전방과 해안, 국경지역에 발톱까지 무장한 100만의 대군이 일반주민들의 이동을 막아섰다. 이 땅은 결국 하나의 거대한 감옥이었다.
삼엄한 이 검문소를 내가 탄 차는 이상하게 무사통과했다. 조수석에 앉은 부장이 빨간 증명서를 보이면 야무진 거수경례까지 취하며 검열원들이 올려주는 차단 봉은 새털처럼 가벼웠다. 무산까지 네 개의 검문소에 설치된 차단 봉들 모두가 하나와 같이 일사불란했다. 우리에게 맹수처럼 달려들던 그들의 눈빛은 역겨울 정도였다. 이상한 검열원들의 행동은 나의 궁금증을 더해만 주었다.
저 빨간 증명서가 과연 무엇이기에 일반인은 반드시 지참해야 할 신분증도 필요 없단 말인가?
“부장동지! 어디로 가겠습니까?”
쉼 없이 달리던 차에서 하사계급의 운전기사가 즐비하게 늘어선 10층 이내의 단층짜리 아파트건물들로 도로주변을 장식한 읍 시가지를 통과하며 입을 열었다. 차창너머로는 아지랑이에서 피어난 꽃망울들이 살구나무의 가지들마다 한 가득씩 매달려 서로마다 제 아름다움을 자랑하려 키 돋음 하고 있었다.
“비밀아지트로!!”
북한에서 만든 <대덕산>이라는 권연을 깊숙이 빨며 지그시 눈을 감았던 부장이 누런 이를 드러냈다. 마치 그의 자세와 태도는 누구보아도 무소불위를 지닌 강자에게서만 나오는 거만함이었다.
무산군 논급에 위치한 그들의 비밀아지트는 읍 중심지인 역전에서 5분 거리였다. 줄을 맞춘 3층짜리 건물가운데서도 마지막 호동의 맨 위층에 위치한 아지트는 얼핏 보아 일반 주민이 사는 집과 특별한 점은 없었다. 단지 특징이라면 현관문의 5미터거리에서부터 콩기름으로 마늘을 태우는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주린 창자를 허빈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방문을 열고 들어간 집안의 풍경은 허기진 나를 미칠 지경으로 몰아갔다. 절반 먹다버린 두부 탕과 쌀밥 그릇들이 두 개의 밥상을 가득 채웠던 것이다. 특히 눈이 뒤집힐 정도로 즐비한 반찬들은 산나물들과 육류, 고급어족들로 만든 값비싼 요리들이었다.
양반관료들만 먹던 그 옛날의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나에게 있어 이런 음식문화는 30년 동안을 살면서 손가락을 꼽을 정도였다. 매 맞은 어혈보다 참기 어려운 군침이 위를 자극했다.
내가 더 놀란 것은 나라의 법관이라고 자처하는 7명이의 장교들이 백주대낮부터 술에 취해있는 것이었다. 개기름에 번들거리는 그들의 이마에는 너털웃음이 가득 차 있었다. 아지트와 멀지 않는 재래시장에서는 지금 이 시각도 수백, 수천의 백성들과 거지들이 굶주림으로 시달리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 상대적이었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도 반백년을 살면서 시키는 일만 강요당하다가 3년 전에 굶어 돌아가셨다. 그때 운명의 목전 앞에 비낀 아버지의 모습은 노련한 백정의 솜씨를 발휘해 살이 발리어 몇 근 발라내기 힘들 정도로 야윈 깡마른 체구였다. 보태지 않고 뼈에 가죽만 씌어놓은 처참한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우리 집만 아니라 동네의 여기저기에서 수많은 아사자들이 하루가 멀다하게 발생했다. 이런 엄혹한 시기를 외면하는 인간들, 특히 나라의 주인들라고 자처하는 그들의 존재에 대하여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나였다. 어리석은 나 자신을 깨우쳐 주는 듯 시간이 지날 수록 충격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지트의 목적은 중국을 활동무대로 이 지역에서 자기들의 수사망에 걸린 사건대상자들을 체포, 구금하기 위한 것이었다. 군복탈피를 위한 위장은 물론 필요하다면 중국에까지 진출하여 목적을 달성하는 해외첩보기관의 연락 장소, 북한군보위사령부의 작전반경은 나의 상상을 초월했다.
당시 독재자가 죽자 그의 아들은 선군정치라는 이상한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는 고난의 행군을 알리는 장엄한 서곡이기도 했다. 그 중심에 바로 북한군총정치국장이 섰고 북한군보위사령부가 척후병으로 등장했다.
새 독재자의 위임으로 저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북한군보위사령부는 북한전역에 걸쳐 정계, 사회계, 학계, 법계, 예술계, 스포츠계를 비롯한 모든 조직들과 행정기관들을 한 손아귀에 장악하였다.
그들에 의해 합법적 절차도 없이 체포, 구금, 사형과 같은 포악무도한 행위들이 도처에서 이어졌다. 일반주민들에게 우쭐거리던 안전원(경찰관)들과 보위부(국정원)원들도 꼼짝을 못했다.
오직 그들의 눈만 보석이었고 다른 사람의 눈은 유리알이었다. 벽창호와 같은 그들의 고집에 많은 사람들이 간첩, 역적, 반역자로 분류되어 처형되거나 비밀리에 사라졌다. 옆에서 발생되는 몇 백만이 아사는 그들에게 한갓 평범한 일상이었을 뿐이다.
1998년까지 기록만 보더라도 겁에 질린 국가안전보위부장이 자결하였고 사회안전부[경찰청]총정치국장인 최문덕이가 그들의 손에 걸려 처형되었다. 보위부장의 옆집에 살던 최룡해는 다행이 좌천되었고 노동당 농업비서인 서관히는 극형에 속하는 간첩의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졌다.
그들은 황해제철소가 있는 송림 시와 남포시를 숙대 밭으로 만들었으며 내가 살던 양강도의 도소재지인 혜산에도 몇 개월 동안이나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수많은 인사들과 기술자들, 일반인들을 체포했다. 하루에 몇 명씩을 공개처형하는 야만적인 행위도 그들은 서슴지 않았다. 암튼 새 독재자의 비위에 거슬리는 인간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 둘씩 제거되었다.
북한의 독재자는 자기의 기반구축이 끝나자 1998년8월31일, 대포동1호라는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고난의 행군을 종결했다. 외부세계에는 인공지구위성이라고 떠벌렸다.
결국 고난의 행군은 자기가 시작해서 지가 끝낸 여정이었다. 그에게 있어 백성들의 기아와 굶주림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가 말하는 고난의 행군은 곧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숙청작업일 따름이었다.
모든 것의 정리에 강한 자신감을 가진 북한의 독재자는 2000년5월, 드디어 러시아방문길에 올랐고 같은 해 6월에는 대한민국대통령을 평양에 불러들여 정상회담을 벌리는 제스처를 취했다. 외교전으로 돌입한 그의 행동에 전 세계가 놀랐다. 6년간의 두문불출로 운둔했던 그의 이미지가 부각되었던 것이다. 내가 잡힌 날로부터 보름 안팎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났다.
이런 흑백의 전모를 전혀 알 수 없는 나 같은 농부는 결국 그들의 기분에 걸맞은 주안상의 밑반찬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독안의 쥐 신세의 가련한 삶에 그 어떤 말로 변명할 것인가?
생각도 잠시 후, 아지트의 출입문을 향해 맨 마지막으로 들어 온 부장을 우러러보며 주정뱅이로만 보였던 방안의 주인들이 매사에 남의 비위를 맞추는 아첨꾼들처럼 하나와 같이 일어나 굽실거렸다. 그 모습은 아첨으로 일관되거나 아니면 서로 간의 믿음으로 확립된 것처럼 나를 아이러니하게 만들었다.
“이 새끼는 굶어죽어도 되니까 점심을 먼저 한 당신들이 차에 억류시키고 좀 감시하게나. 뭘 좀 먹어야 다시 길을 떠나지?”
부장의 명령에 의해 결국 한갓 그림의 떡으로 되어버린 아까운 음식들을 뒤로 하며 나는 새로운 법관들에 의해 차체로 끌려갔다. 40분정도 지나 부장을 비롯한 일행은 제가끔 이를 쑤시며 나타났고 차는 다시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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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덕이는 권력출세에 눈이 멀어 직권람용으로 처형되였습니다/
최문덕이 처형은 응당한 징벌입니다.
그가 얼마나 사람을 잔인하게 죽인줄 아세요?
손톱을 다 뽑고 고문 하여 허위 자백을 받고,,,,
서관히는 죄명은 간첩이 아닙니다 .. 농사를 망친게 원인 입니다.
물론 아들이 죄행이긴 하지만요,, 모르는 사람들이 그저 "간첩이다"할뿐 ,,
일성이시절에 장성택이 외도를비판한 본부당비서
문성술 때려죽인것땜에. . . .
- 1152634921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4-12-25 23:37:18
설마했는데 사실이였네여.
근데 위에 <지나가다>란 사람은 개뿔도 모르면서 주절 거리나? ㅉㅉ... 그냥 사라지는 것이 좋을 듯 싶은디... 저런 삥빠진 것들이 요즘 문제라니까, 개정일의 치숭개 노릇이나 하다 왔나벼...ㅉ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