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광장

자유게시판

상세
통일혁명당원이 사형직전에 썼다는글
Korea, Republic of 펼쳐요 0 381 2015-01-23 12:37:27

북한 지하당 통혁당 요원이 사형집행을 기다리면서 쓴 手記

“남편은 계속 서대문 구치소에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요즘도 아무리 서쪽 노을이 아름답다 해도 보고 싶지 않아요.”

뉴스관리자2015.01.21 14:32:37

북한 정권이 1960년대 후반 남한에 구축한 地下黨(지하당)인 통일혁명당의 창당멤버 중 한 사람인 김질락은 사형집행을 기다리면서 獄中(옥중)에서 手記(수기, 原제목 '주암산')를 썼다. 수기의 해설에 따르면 그는 1934년 영천에서 출생하였다. 1965년 11월 초 김종태, 이문규와 함께 지하당의 창당 발기인이 되었다. 그는 1967년 5월에 월북하여 북한노동당에 가입한 후 23일간 교육을 받고 돌아왔다. 1968년 정보부에 검거되었고, 7·4 남북 공동성명 직후인 1972년 7월15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手記는 슬프다. 그는 자신을 인생 낙오병이라면서 이 글을 碑文(비문)이라 하였다. <영영 되찾을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을, 영원히 매장해버리려는 나의 이 작업에 대해 산 자들을 나를 고발할 것이요, 죽은 자들은 나를 증언할 것이다>는 머리글부터가 처연하다. 사형을 기다리면서 獄中(옥중)에서 쓴 이 글이 얼마나 자유의지를 반영하고 있는지 검증할 방법은 없다. 이 글을 쓰도록 허용한 당국의 뜻이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글을 읽고 나면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오늘에 더욱 가치 있는 자료라는 생각이 든다. 반공국가에서 反국가단체인 북한 정권의 지령을 받아가며 숨어서 지하당을 만들고 목숨을 건 월북을 하고 거기서 공화국에 환멸을 느껴간 과정에서 웃음이나 밝은 면을 찾기는 불가능하다. 그는 이념전선의 뒤안길에서 보낸 너무나 절박하였던 삶을 너무나 성실하게 써놓았다. 아름다운 서울에서 자유와 번영을 누리면서 살고 있는 필자로선 ‘나의 시작은 나의 끝이었다’는 머리말의 제목부터 읽어 내려가기가 부담스러웠다.

특히 김질락 씨의 따님인 김수아 씨가 아버지의 머리글 뒤에 붙인 ‘아버지 나라도 지금 꽃이 피나요’란 글은 너무 슬퍼 아름다운 글이다.

<봄에 왔을 때는 아버지를 만난다는 기쁨이 있었는데 왠지 그날은 무섭고 답답했습니다. 구치소 앞마당의 비에 젖은 새까만 삼륜차를 보면서 벌써 눈물을 흘렸답니다. 그 삼륜차 안에는 棺(관)이 있었습니다. 멍석이 씌워져 빗발을 가리고 있던 아버지의 관. 하얀 바지저고리 차림의 아버지가 아니라 숨이 끊어진 屍身(시신)으로의 아버지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김수아 씨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은 이 책에 溫氣(온기)를 준다. 그는 <아버지의 사상과 행동은 뒤로 하고서도 우리에게 주지 못한 아버지의 행복은 결코 값싸게 흥정하여 사들일 수도 없고 맛보고 싶은 때 마음대로 맛 볼 수도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답니다>라면서 이렇게 다짐하였다.

<수아에게는 아직도 많은 날들이 주어져 있고 지난날의 상실은 오히려 소중하고 정성스럽게 가꾸어, 뼈를 주신 아버지의 薰氣(훈기)를 잃지 않으려합니다>

이 책은 김질락을 죽음의 길로 포섭해간 통일혁명당 사건의 주범 金鍾泰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는 나의 셋째 삼촌이었다. 아버지의 5형제, 7남매 가운데 다섯째, 끝에서 둘째였다. 나보다는 여덟 살 손위인 삼촌이었고 맏이인 아버지보다는 열여덟 살이나 아래인 셋째 동생이었다>

김질락은 手記(수기)를 통하여 김종태의 인간됨을 많이 비판한다. 달변가, 자만가, 영웅심의 소유자라고 평했다. 日帝(일제)시절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공부를 하고 돌아와선 1946년 10·1 대구좌익폭동에 연루되어 한동안 고향에서 종적을 감춘 적도 있다고 했다. 동국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김종태는 仲兄(중형)인 김상도가 자유당 국회의원이 되자 그의 비서로서 정치에 입문하였다. 김질락은 이 활동가 삼촌의 영향권 안에 흡입되어간 사정을 설명하면서 <나에게 있어 그는 베어버릴 수 없는 그림자 같았고, 말할 수 없는 정신적 부담이었다>고 썼다.

김종태는 법과대학을 지망하는 조카를 위협하여 정치학과로 진학하도록 했고, 선거 때마다 청년조직을 맡게 하였으며, 득표율이 가장 낮은 지역에 배치, 골탕을 먹였다고 한다. 책을 읽어가면, 김질락은 좀 心弱(심약)한 사람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집안의 최고 엘리트인 김종태의 권위에 눌려 내키지 않으면서도 그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으리란 느낌이다.

<우리 사회의 대가족 제도가 얼마나 큰 결점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나는 나 자신의 경우를 본보기로 내세우고 싶다. 어떤 짓궂은 사람이 있어 나한테 굳이 변명하기를 권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의 시작은 나의 끝이었다’(My beginning is my end)라고>

그가 삼촌에게 포섭되어 통일혁명당에 연루되는 과정은 아마 요사이도 나라 한 구석에서 일어나고 있을 전형적인 사례이다. 人情(인정)으로 인간관계를 만든 뒤 이념적으로 설득해가다가 결정적 순간에 선택을 강요하는 좌익들의 수법은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을 것이다. 김질락은 김종태에게 먼저 포섭된 양춘우가 자신을 설득하는 상황을 이렇게 썼다.

<그는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자신이 걸어온 기구한 인생에 대해 말하면서 그와 그의 가족의 가난이 모두 국가의 책임이며, 그 궁극적인 요인은 모순된 제도에 있고, 이 모순이 제거되지 않는 한 밝은 앞날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스톤이 쓴 《A Hidden History of Korean War》의 일역판 《조선전쟁비사》를 인용하여 6ㆍ25는 북괴가 먼저 침략한 것이 아니라 한국이 먼저 쳐들어갔다고 우겼으며, 김일성이 진짜 김일성으로서 항일전쟁의 투쟁경력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핏대를 올렸다. 또한 박헌영이 미국의 간첩이었음이 사실이라는 등 실로 허망 된 얘기를 마구 털어놓았다.
일부 불쌍한 지식인들 가운데는 자기의 두뇌를 필요 이상으로 과신한 나머지 남보다 그것을 곧 자기의 것으로 흡수하고 그것은 곧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라고 맹신 또는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북괴간첩들이 내세우는 선전내용은 ① 6ㆍ25 침공의 부인 ② 박헌영의 간첩설 ③ 김일성 항일빨치산 투쟁사의 정당화 ④ 계급의식의 고취 ⑤ 反정부 투쟁에 대한 고무찬양 ⑥ 반미사상의 고취 등이다>

김종태는 통일혁명당을 만들 때 북한의 지령을 받고 있었지만 순진한 동조자에겐 ‘동등한 관계의 형제당’이라고 속였다.

“그 점에 대해선 조금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정당의 목적과 성격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바이고 이북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한다면 우리가 하고자 하는 당은 이북의 노동당과는 대등한 위치에 있는 형제당의 관계에 있는 겁니다. 우리 당은 비단 이북의 노동당만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의 공산당과도 형제당이 되는 것이며 국제공산당의 일원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북한노동당에 의하여 滅絶(멸절)된 남로당의 운명이 보여주듯이 남한의 從北세력은 절대로 북한 정권에 대하여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없다. 이는 힘의 원리이고, 권력의 법칙이다.

김질락은 평양에 가서 들은 이야기를 이렇게 전한다.

<내가 평양에 갔을 때만 해도 노동당 간부들은 인혁당이 어떻게 해서 노출되었는가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들이 역대 민비(민족주의비교연구회) 회장들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확인하고 3ㆍ24에서 6ㆍ3에 이르는 국내 혼란이 북괴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는 확증을 나는 얻고 있었다. 통혁당에 관련하고 평양을 다녀온 후에야 나는 6ㆍ3사태의 진상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있었고, 그 시점에서 한일회담은 불가피했었다는 것이 비로소 납득이 갔다.
또한 북괴의 상황과 대조하여 한국의 좌표를 보다 정확하게 내다볼 수 있게 되었고, 국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5ㆍ16혁명은 역사적인 필연의 논리였다는데 전적으로 수긍이 갔다. 만일 4ㆍ19 직후의 혼란기가 좀더 계속되었더라면 한국은 오늘의 성장과 번영을 도저히 기대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다. 뒷날 알게 된 일이지만 종태 삼촌은 인혁당의 주요 인물들을 자기 산하에 거두려고 애썼고, 인혁당은 인혁당대로 종태 삼촌을 이용하려 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서로들 반목하여 공작 일반의 수법에 있어서 각자 우월하다는 등의 논란이 있었다는 넌센스가 있다>

<6ㆍ25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책들이 충실한 자료를 근거하여 북괴의 남침이 국제적으로 공인된 기정사실임을 증언하고 있지만 나는 단 한 마디로 6ㆍ25사변이 북괴의 불법남침에 의한 것임을 증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북괴가 6ㆍ25사변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하는 語感(어감) 자체가 이미 전쟁도발을 의미하고 있음은 바보가 아닌 이상 금방 느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평양에 있는 북괴의 혁명박물관이란 곳을 들어가 보면 6ㆍ25에 대한 김일성의 5단계 전략은 사전에 이미 계획된 것으로 첫 남침에서부터 패주해서 후퇴한 사실까지 모두 그의 탁월한 전략에 의하여 성공적으로 완수된 것으로 자랑하고 있다. 그들 자신이 침략자였음을 노골적으로 시인하는 것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

김질락의 수기를 읽으면 온통 이념과 관념 이야기이다. 그런데 결국은 이런 것들의 귀착점이 인간의 먹고 사는 문제란 고백을 스스로 하고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공산당의 공식적인 회합이나 선전, 선동의 슬로건으로 많이 사용되지만 어떠한 공산주의자도 숟가락을 가지고 밥을 떠먹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지고 밥을 퍼먹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마르크스나 엥겔스, 그리고 레닌이나 모택동을 자나 깨나 주워 섬기지만 그들이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사고나 언동은 인간의 본래적인 습성과 인간생활의 인습에서 결코 한 치도 더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여기 이북에서 남파된 무장간첩이 있다고 하자. 그가 생각하는 것은 조국통일이나 김일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지금 생사의 기로에서 자신의 생명을 방위하기에 온갖 본능적인 지혜와 교육에 의한 후천적 경험을 총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때 당과 사상을 떠나 있으며, 그를 얽어매고 있는 당의 유일한 끄나풀은 이북에 두고 온 부모와 처자에 대한 가련하고 애절한 미련뿐인 것이다>

김질락의 手記(수기)엔 당시 서울상대를 졸업하고 숙명여대 강사로 있던 신영복씨를 포섭해가는 과정이 자세히 실려 있다. 신영복씨가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장기복역을 하고 나온 뒤 유명인사가 되었기에 더 흥미롭게 읽었다.

이 책의 主무대는 음습한 폐쇄공간이다. 邪敎(사교)집단과 공산당의 공통점이 있다. 인간을 폐쇄공간으로 몰아넣고 오직 한 사람(또는 하나의 조직)을 숭배하도록 집중적으로 교육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꽉 막힌 상황에 몰려서 비교대상이 없으면 교육 받은 대로 한 점을 향하여 몰입,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은 한번 들면 놓기 힘들다. 다가오는 죽음의 발자국 소리를 느끼면서 써내려간 心情(심정)이 전해 오기 때문이다. 生을 걸고 증언한 책의 밀도가 대단하다. 김질락 씨는 상당한 문학적 재능까지 보여준다.

<나는 나의 사망을 매장해버리는 데 그치지 않고 나의 사망을 증거로 북괴를 고발하고 북괴로 말미암아 무서운 죽음의 길을 헤매고 있는 모든 가엾은 사람들에게 나를 증거하여 경고한다>

통일혁명당의 후예들인 오늘의 從北좌익세력에 보내는 충고로 들린다. 이 수기를 내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편집자는 편집실을 찾은 김질락 씨 부인의 한 마디를 소개하였다.

“남편은 계속 서대문 구치소에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요즘도 아무리 서쪽 노을이 아름답다 해도 보고 싶지 않아요.”

편집자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떠나는 사람은 魂(혼)의 무게이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몸과 혼, 온몸으로 지탱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썼다. 이념적으로 완전히 轉向(전향)하였고, 집행도 미뤄져 온 김질락을 7·4 공동성명 직후에 교수형에 처하게 된 정치적 배경에 대하여는 별도의 조사가 필요하겠다. 이 수기는, 38세에 죽은 김질락이 미리 써놓은 자신의 碑文(비문)이자 통일혁명당의 후예들인 오늘의 종북세력 앞으로 남긴 경고장이기도 할 것이다.

좋아하는 회원 : 0

좋아요
신고 0  게시물신고
  • 민복 ip1 2015-01-24 12:19:21
    박정희 정권이 먹고살게 한 공은 있지만
    이런 면에서 보면 냉혹하기 그지 없는 자이기도 합니다.
    자신도 남로당에 들었다가 구사일생 살아 남았음에도
    이런 사람을 처형했다는 것은 양심이 없는 자이지요.
    아니면 이런 사실을 보고하지 않아 몰랐다고 해야 할 가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민복 ip1 2015-01-24 12:22:00
    박정희가 몰랐다고 한다면
    이를 처형한자들은 마땅히 죄를 물어야 합니다.
    시간이 흘러 형을 내릴 수는 없지만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인간의 생명을 경시한 아주 질 나쁜 자라고요.
    이념을 떠나서 ...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무식한 ip2 2015-01-24 12:46:01
    민복아 넌 그렇게 인정이 많어서 남한에 오자마자 북한이 침투시킨 간첩들인 서승형제를 찾아 다녔드냐? 너 좀. 입다물고 가만있어 남로당 관련자와 북한 에서 조직한 간첩단이같으냐?
    남로당과 통일 혁명당을 같이 보다니. 이런 무식한자가 무슨 ,,,ㅉㅉㅉ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무식 ip1 2015-01-24 13:14:05
    무식한 놈이 무식한 소리하네
    남로당과 통혁당과 뭘 다르냐...
    공산당과 로동당이 뭐가 다르냐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웃기네 ip2 2015-01-24 13:22:12
    민복이 드디여 가면을 벗었구나 욕을 쳐드시면서도 <밈복>이라는 이름을 고정 다는척 하더니 드디어 숨어서는 닉네임 변경시켜서 더렁룬 댓글도 다는구나,
    여 ,, 민복씨 겉과속이 다른자임을 세상이 다알아. ,, 그 주제에 공영방송타고 같은 탈북 동업자를 비난해? 너혼자 못벌어먹어서 가슴 아프드냐? 아무리 욕을 하고 싶어도 참았어야디. 하태경이가 불러주니까 그리도 고맙드냐? 하태경이는 삐라 그자체를 반대하는인간이여. 민복아 이젠 조용해라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삐라장사 ip3 2015-01-24 13:46:04
    ㅋㅋㅋㅋ
    딱걸렸넼ㅋㅋㅋ
    그러면서 깨끝한척은 혼자서 다....
    나이쳐먹고 무신 망신인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쪽팔려서 우째나올려낰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삐라장사 ip3 2015-01-24 13:40:35
    어이 민복 영감탱이,요즘 삐라장사 잘 되슈?
    혼자서만 해처먹지말고 같이좀먹고삽시다
    듣기로는 삐라장사해서 꽁쳐둔 돈이 어마어마하다던데사실이유?
    필수한테 사기당한 사람들도 좀도와주지
    돼질때도 얼마 안남은것같은데 삐라해서번돈 다쟁여놓고
    지옥갈때 가져갈려곸ㅋㅋㅋㅋ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민복님 ip4 2015-01-27 21:45:24
    민복님! 저 시대에는 사상대결이 최고조로 달해 있었고 서로 체제우월을 선동하고
    끊임없이 사상투쟁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때 당시 자유민주주의 체제인 대한민국에서 박정희대통령이 아니라 다른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었더라도 사상대결에서는 한발치도 물러나지 않았을 겁니다
    정치범도 아니고 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는 데 박정희대통령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보안법위반으로 전향을 하지 않은 악질장기수도 처형하지 않았던 대한민국입니다.
    감성적인 이해보다 시대의 냉혹한 문제들을 깊이 성찰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중대한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댓글입력
로그인   회원가입
이전글
남북빨갱이의 전위대 행동대 그 테러분자들, 그 RO를 철저히 색출 분쇄해야 한다.
다음글
김정일 찬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