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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정권의 형성과정
Korea, Republic of 강기철 0 296 2015-02-16 19:19:15

 
 
출처:  [비록] 평양의 소련군정 /도서출판 한울, 2008>
 
3년간 미군정이 다스리던 남한에 대한민국이라는 단독정부가 수립된 과정은 거의 밝혀졌다. 그러나 소련군정이 다스리던 북한정권의 창설과정은 베일 속에 가려 있었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되면서부터 그동안 역사의 뒤안길에서 잠자던 소련군정의 일부 비밀문서들이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북한정권 창설과정이 조명되고 있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와 국방성, 외무성 등 비밀문서 보관소에서 북한주둔 소련군정의 문서들과 일부 자료들이 발취됐다.
 
또 당시 평양의 소련군정에서 북한정권 창설의 주역을 맡았던 소련군 고위 장성들과 권력의 암투 과정에서 밀려나 타국으로 망명해야 했던 북한의 전직 고위 장성과 장?차관들을 만나 북한정권 창출과 소련의 북한 소비에트화 과정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들었다. 이들 비밀문서들과 증언들을 통해 붉은 군대 소련군은 어떤 계획을 갖고 북한에 진주했고, 3년여 동안 북한에 주둔하면서 추진한 정책들은 무엇인가. 특히 소련은 왜 33세의 소련군 대위 김일성에게 한반도 반쪽을 맡겼는지 등 구멍 뚫린 우리 현대사의 베일 벗기기에 집중했다.
 
소련 국방성의 이 비밀문건은 소련군은 북한 지역에서 일본군을 몰아내 해방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점령군으로 남아 김일성을 비롯해 88정찰여단 소속 항일 빨치산 출신 조선인을 적극 활용해 이 지역을 소련의 위성국이자 ‘극동의 민주기지’로 건설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음을 쉽게 읽을 수 있다. 특히 이 비밀문서는 33세의 소련군 대위 김일성이 북한 지도자가 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스탈린이 치밀하게 구상한 사전 계획에 따라 창설된 88정찰여단에서 장차 북한의 정치·군사지도자로 김일성 등을 훈련시켰음이 이 문건에서 명쾌하게 드러난다.
 
또 이 보고서는 1945년 8월9일 소련이 일제에 선전포고를 한 뒤 88정찰여단의 작전 계획이 모두 취소돼 88여단의 조선인 병사들은 대일전에 참전하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김일성 부대가 있는 88여단이 대일전에서 총 한방 쏘지 못했음이 소련 국방성 문건으로 명확히 드러난다. 또 1945년 9월2일 극동의 바실레프스키 사령부로부터 88여단의 김일성 부대 80명에 대한 입북명령이 공식으로 떨어진다. 김일성 부대는 이 명령이 떨어진지 16일 후인 그해 9월18일 원산항을 통해 입북해 소련군정의 지시대로 각 도시로 분산돼 지역 위수사령부 부사령관을 맡는다.
 
 
스탈린은 김일성이 입북하기 전인 1945년 9월 초순, 김일성을 비밀리에 모스크바로 불러 면담한 후 그를 북한의 최고 지도자 후보로 낙점했다(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부부부장 코바렌코 증언). 평양의 소련군정 레베데프 소장은 “북한 정권 창출 과정에서 어느 것 하나 군정이 단독으로 결정하거나 집행할 수 없었고 모두 하바로프스크 사령부를 거쳐 모스크바의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지령에 따라 진행됐다”고 밝혔다.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소련이 북한에 대해 실시할 정책은 다중 구도였다. 즉, 군사적 점령과 군정 실시라는 현실적 목표, 북한을 소비에트화해 한반도와 극동의 민주기지인 위성정권을 창출한다는 내면적 목표를 설정했다.
 
전체 6개 도인민위원회는 외형상으로는 인민 자치기관이었으나 구성원인 위원은 선출된 것이 아니라 소련군정 사령부가 임명했고 인민위원회를 지도하는 소련군 고문이 배치됐다. 또 소련군정 산하에 설치된 10개의 행정국에도 외형상으로는 조선인들이 국장을 맡고 있으나 각 국장 곁에는 소련군 고문을 배치, 사실상 행정국을 끌고 가도록 했다. ‘북한정권’의 창출을 위해 소련군정의 정치사령부에는 25군 군사위원 레베데프 소장을 비롯해 후르소프 소장, 25군 제7호 정치국장 그로모프 대좌, 25군 제7호 정치국 부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특수 정보부대장 일리인스키 대좌 등 정치전문장교들이 포진해 있었고,
 
제1극동전선사령부 제7호 정치국장 메크레르 중좌와 부국장 강미하일 소좌, 그리고 정보기관 소속 발라사노프 대좌와 샤브신 등 등 정치고문들이 별도의 팀이 K.G.B 하바로프스크 본부의 지시를 받아 이북5도 열성자대회를 열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조직했고 이어 지도자 부상을 위해 소련군 환영대회에서 독립운동가였던 김형직(金亨稷,1894~ 1926)의 아들 김성주(金成柱)를 ‘전설의 김일성 장군’으로 띄우는 등 고도의 정치적 연출이 시작된다.
 
스탈린은 1945년 8월부터 1947년 12월까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평양에 소련군정을 설치하면서 소련전역에 살고 있는 고려인 2-3세 가운데 대학 교육을 받은 정치 군사 경제 정보 교육 기술 문화 등 분야별 전문가 428명을 다섯 차례에 걸쳐 북한에 급파했다.
 
스탈린은 공산주의 이념을 전파할 '글쟁이' 엘리트를 가장 먼저 보냈다. 이들 엘리트들은 김일성 우상화 작업은 물론 공산주의 이념을 전파하는데 앞장섰다. 이들 '글쟁이' 엘리트가 평양에 신문과 방송을 만들었고 매체를 통해 대중 선동을 했다. 초기에 군정 사령부와 정치사령부 민정사령부 각 지역 위수사령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임시인민위원회 군간부학교 대학 언론 문화단체 등 각 분야에 파견, 북한정세 파악 소비에트화 전략 수행 등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케 한다. 그리고 소련은 북한정권을 창설하면서 이들을 당과 정부의 부책임자로 앉혀 소련을 대신해 사실상 위성정권을 관리토록 한다.
 
그들은 소련공산당의 명령으로 북한에 소련의 공산주의를 이식하고 김일성이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전위대 역할을 한다. 그 후 김일성을 비롯한 군인들, 국가를 건설할 기술관료들이 차차 평양에 자리를 잡았다. 소련군의 신분으로 들어온 500여명의 '카레이스키'는 소련군정의 이야기를 번역해 알리고 평양이 소련의 위성국이 되는데 역할을 했다.

1945년 10월14일, 33세 김일성이 평양에 들어왔다. 스탈린이 보낸 '카레이스키' 엘리트들이 이미 김일성에 대한 영웅화 작업을 마친 상태였다. 김일성은 평양에 오기 전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에게 1박2일 면접을 받고 간택을 받았다. 방송과 신문을 만든 '카레이스키' 엘리트들은 김일성이 평양에 온 이후에는 김일성에 대한 기사를 집중 보도했다.
 
1946년 2월16일 34세의 김일성은 사실상의 북한 정부인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소련군정은 해방 후 세계적으로 유명한 反공산주의 사상가 이승만 박사가 서울에 입국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워싱턴에서 전해 듣고 서둘러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웠다. 이는 소련군정이 불안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강력한 김일성 우상화 작업을 서두르지 않으면 이승만의 영향력으로 한반도 공산화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서울에서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을 건국했고 강력한 반공주의 노선을 선택했다.

1950년대 6.25 전쟁을 일으킨 소련은 내부적으로 자신들이 내세운 김일성을 위해 그의 정치적 적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평양에서 공산주의의 기틀을 마련했던 '카레이스키' 500인 중 리더였던 허가이는 1951년 11월 의문의 죽을 당했다. 북한 정부는 허가이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발표했지만 정황상 타살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또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의 박헌영도 1953년 감금됐고 1955년 숙청됐다. 또 스탈린은 북한을 만든 '카레이스키'도 소련으로 복귀를 명했다.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 등은 “이 같은 일련의 정치 일정은 모두 소련공산당 중앙위 지령에 따라 군정이 주도한 것으로 외형상 북조선 공산당과 인민위원회 이름으로 발표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모스크바에서 발굴한 비밀문서와 자료에서도 이를 그대로 뒷받침하고 있다.
 
소련공산당 중앙위는 1945년 10월 소련의 토지개혁법령과 노동법령, 남녀평등에 관한 법령, 산업 운수 통신 은행국유화 법령, 각 도 시 군 면 리 인민위원회 선거에 관한 법령 등을 소련군정 사령부에 내려 보내 빠른 기간 내에 이들 법령이 북조선에서 시행되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소련군정 정치사령부 이그나치프 대좌팀이 이를 소련파 고려인들에게 번역하게 한다. 그리고 이를 북한 현실에 맞게 재가공해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 이름으로 이른바 ‘민주개혁 5대 법령’을 발표케 하고 실행해 간다. 당시 북조선 공산당에는 민주개혁 프로그램을 만들 만한 능력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절대 비밀’이라는 도장이 찍힌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결정집에는 김일성이 1946년 9월25일 열린 북로당 중앙위원회 제2차 회의에서 “지난 1년 동안 붉은 군대가 준비하고 추진한 민주개혁의 성과를 보고 북조선인민들은 붉은 군대에 대한 인식을 깊게 했다. 우리 인민들은 진정한 해방자인 붉은 군대에 대한 감사의 뜻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개혁 프로그램 등 지난 1년 동안 북조선에서 진행된 모든 정치프로그램이 모두 소련군정에 의해 기획되고 추진됐음을 명쾌하게 밝히는 문건이다.
 
1948년 4월19일부터 30일까지 평양에서 남북56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 545명이 참가한 가운데 일련의 정치회담인 남북연석회의가 열렸다. 우리 역사는 이 회의와 회담은 김일성과 북조선 노동당이 주도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당시 소련군정 정치사령관과 민정사령관을 겸임했던 레베데프 소장의 비망록에는 남북 지도자 연석회의에 대한 소련 측의 의도와 역할, 소련군정의 북한정권 수립과정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이 비망록은 모든 과정에서 소련군정이 모스크바로의 명령을 받아 기획 연출을 맡고 김일성과 북조선노동당 이름으로 행동하고 발표됐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자료이다. 이 비망록에는 레베데프 소장이 상부로부터 김구(金九)와 김규식(金奎植)을 평양으로 불러 들여 1) 남한의 총선 반대와 봉쇄, 2) 조선에서 유엔 한국 임시위원회 추방 요청, 3) 소련군과 미군 출수, 4)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남북총선거는 외국군 철수 후 실시하는 등 한반도의 소비에트화를 위한 4가지 지침을 관철하라는 지령을 받아 이를 김일성과 북로당에 지시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또 이 비망록에는 연석회의와 관련해 처음부터 끝까지 김일성과 북로당에 지침을 시달하고 그 결과를 보고 받았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여러 차례 회의를 연기하면서 두 김을 기다리는 문제, 남한의 두 지도자에게 직위를 주고 헌법을 채택한 후 범민족정부를 세우는 문제 등 두 김 씨를 회유한 제 문제들을 김일성과 북로당에 지령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북한 정권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두 김 씨를 회유하려 했음이 드러난 대목이다.

또 이 비망록에는 북조선 노동당 초대 위원장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의장 등을 지내다 1958년 연안파 숙청 때 사라진 김두봉을 일찍부터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녔으므로 특별 감시하라’고 지시한 기록이 있다. 이 비망록의 역사적 가치를 증명해 주는 대목이다.  이밖에 이 비망록에는 연석회의 와중에도 레베데프 소장이 모스크바의 지령에 따라 김일성에게 인공기와 인민군기 등을 제작해 승인을 받으라고 지시하는 등 인민생활의 시시콜콜한 문제까지 간섭하고 지시했다고 기록돼 있다.
 
3년간에 걸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와 평양주둔 소련군정의 기획과 연출에 따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닻을 올린다. 이 과정의 중요 대목마다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는 소련공산당과 소련군대의 ‘원조’에 감사와 충성을 맹세하는 결정서를 채택한다. 이는 북한정권이 소련의 각본과 연출 속에서 창출됐고, 북한정권이 소련의 위성국임을 말해주는 역사적인 자료들이다. 출처:  [비록] 평양의 소련군정 /도서출판 한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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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안하지만 ip1 2015-02-16 23:41:59

    - 미안하지만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5-02-16 23:4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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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복 ip2 2015-02-18 00:54:37
    주체의 반대가 사대입니다.
    사대주의자이니 주체를 더 떠들수 밖에 없는 꼼플레스
    중소관계가 악화되자 이때라하고 주체를 내세워.
    모두 사기 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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