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정치사의 산증인 소석(素石) 이철승 전 신민당 총재(대표최고위원)가 27일 새벽 별세했다. 향년 94세. 정치 인생 대부분 야당의 길을 걸었지만 반공(反共)·자유투사로서 삶의 중심에는 항상 대한민국이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인은 지난달 29일 감기 증세로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한 뒤 이달 중순 건강이 악화됐다. 끝내 27일 새벽 병실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박근혜 대통령은 28일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을 보내 위로의 뜻을 전했다.
1922년 서울 종로에서 출생해 전북 전주에서 자란 고인은 전주고를 졸업하고 1942년 인촌 김성수 선생이 교장이던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에 진학했다. 고교 시절 일본인 교사와의 불화로 무기정학 처분을 받아 진학길이 막힌 그를 인촌 선생이 받아준 것이다.
고인은 2008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일제강점기 말 학도병으로 강제로 끌려가게 됐을 때를 언급하며 “인촌 선생의 지시로 서울시내 다른 대학과 연합해 ‘학병 거부 운동’을 벌였다”고 했다. 하지만 이 운동은 사전에 적발돼 무산됐다. 결국 학도병으로 끌려가기 전 울분에 찬 보성전문 학생들은 시위대를 만들어 경찰서 습격에 나서려고 했다. 그러나 “학교가 폐쇄되면 후배들이 배울 곳조차 없게 된다. 매사를 길게 보라”는 인촌의 설득에 고인은 시위대를 되돌리기도 했다.
진보정권 시절 인촌 선생에 대한 ‘친일파 매도’ 시도가 이뤄졌을 때 고인은 “일제 치하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한 인사들 못지않은 억압과 감시를 받아가며 광복을 위해 애쓴 인촌 선생을 친일파로 몰다니 분노를 금할 수 없다”며 비분강개했다.
광복 후인 1945년 12월에는 백범 김구, 인촌 등의 주도로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벌어지자 반탁전국학생총연맹을 조직해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6·25전쟁 때는 학도의용군을 창설해 65년 만인 2015년 공식 인정을 받았다.
1954년 민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한 뒤 전북 전주 지역에서 7선을 지냈다. 5·16쿠데타(군사정변) 이후에는 쿠데타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치규제를 당해 10년간 해외를 떠돌았다. 그럼에도 고인은 2011년 펴낸 회고록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록 독재를 하고 많은 사람을 탄압한 잘못은 있지만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식견을 지닌 군인이었다”고 평했다.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출마해 경쟁했다. 당시 65세의 유진산 신민당 당수가 “구상유취(口尙乳臭), 입에서 젖비린내 나는 것들이…”라고 무시했지만 야권 뉴 리더들이 탄생했다. 1973년에는 국회 부의장을 맡았고 1976년 신민당 총재에 올랐다.
1977년 미국 지미 카터 대통령이 내세운 주한미군 철수가 한미 간 중대 이슈로 떠오르자 미국, 일본을 돌며 ‘미군 철수 반대 순방외교’를 펼쳤다. 당내에서는 ‘사쿠라’ 논쟁이 일었지만 고인은 “나라가 있어야 여당도, 야당도 있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1980년 신군부 집권 이후에는 정치규제를 당하다 1985년 12대 총선에서 당선됐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낙선하고 국회를 떠난 뒤에는 정통 보수의 어른으로 국가 안보를 중시하는 목소리를 내왔다. 고인은 일제강점기 항일투쟁의 끝자락서부터 광복 이후 정치를 거친 자신을 두고 “구세대의 막둥이, 신세대의 맏형”이라고 불렀다. 고인은 대한민국건국50주년기념사업준비위원회 회장, 대한민국 건국단체총연합회 대표의장, 대한민국헌정회 회장을 역임했다. 별세 직전까지 헌정회 원로회의 의장과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빈소가 마련된 삼성서울병원에는 조문객이 줄을 이었다. 28일에는 정의화 국회의장, 김수한 전 국회의장, 이홍구 전 국무총리,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 한승헌 전 감사원장,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 새누리당 서청원 최고위원, 이재오 의원, 송월주 전 조계종 총무원장 등이 찾아 고인을 추모했다.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전 대통령과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 여사는 조화를 보냈다. 정 국회의장은 “소석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하고 의회민주주의의 기틀을 닦은, 우리 모든 후배들의 귀감이 되는 분”이라고 말했다. 김재호 동아일보·채널A 사장도 조문했다.
고인은 병세가 위중해지자 “안보 시국이 엄중한데 무슨 사회장이냐.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러 달라”고 주위에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창희 여사, 아들 이동우 전 호남대 교수, 딸 이양희 유엔 미얀마인권보호관, 사위 김택기 전 의원이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다음 달 2일 오전, 장지는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이다. 02-3410-6917
민동용 mindy@donga.com·차길호 기자
이런 분이 진정한 야당이셨구나. 사꾸라 논쟁은 3당 합당이네 DJP연대니 후단협에 그것보다 더 가관인 대연정질이나 했던 인간들이 사꾸라지 대연정질했던 것들 아직도 뻔뻔하게, 기득권 양보니 지역감정 타파니 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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