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혁명의 역사적 의의 (최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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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혁명의 역사적 의의 ? 최성재 씀
[1961년의 한국과 2016년의 한국]
1961년 한국은 국가 예산의 52%를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박정희의 <국가와 혁명과 나>). 35년에 걸친 식민지배의 여파로 한국은 근대화를 담당할 지식인이 태부족(1945년 당시 전문대 이상 대학생 7819명<해방전후사의 재인식>)한데다, 엽전의식(조선인은 안 돼!)이 만연하여 정신적 공황상태에 있었다. 대한민국호에 승선한 사람들은 선장도 항해사도 기관사도 없는 것 같은 정신적 공황상태를 겪고 있었던 것이다. 설상가상 3년간의 동족상잔으로 그전에 이미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던 ‘섬나라’ 자유대한은 그나마 비바람을 가려 주던 초가삼간마저 반파(半破)되어, 거지와 깡패와 도둑이 선량한 시민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 나라로, 절대빈곤과 무질서가 정상인 나라로 전락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나라에서 고무신 한 켤레, 막걸리 한 사발이면, 누가 대통령이 되건, 누가 국회의원이 되건, 그들이 미국의 원조를 어떻게 갈라먹든, 어떻게 나눠주든, 멀쩡한 선남선녀가 신성한 주권을 얼씨구나 내팽개친다고 해서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었을까. 의기양양 자랑해야지!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 이후 자유민주 국가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지만, 10억 절대빈곤국들을 대상으로 현장에서 심층연구한 바에 따르면, 선거 민주주의는 15년이 넘도록 빈곤과 무질서를 도리어 심화시켰을 뿐이다. <전쟁, 총, 투표 2009>)
2016년의 한국은 북한에 비하면, 1961년의 ‘남조선’보다 못한 2016년의 북한에 비하면, 지상낙원을 넘어 지상천국이다. 2012년 The Economist의 민주화 지수(Democracy Index)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세계 20위로서 일본 23위보다 앞선다. 아시아에서 당당 1위다. 대만 35위, 인도 38위, 심지어 유럽의 프랑스(28위), 이태리(32위)보다 앞선다. 개혁개방으로 승승장구하는 중국 142위, 베트남 144위와는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
UN의 인간개발지수(Human Development Index)는 1인당 실질구매력(PPP)만이 아니라, 기대수명, 유아사망률, 교육, 양성평등, 세금, 부채 등을 종합해서 수치화한 것인데, 2014년말 기준 대한민국은 17위이다. 일본 20위, 프랑스 22위보다 높다! 인구 3천만 이상의 국가로 치면, 독일 6위, 미국 10위, 캐나다 11위, 영국 15위에 이어, 세계 5위다.
[남북의 차이는 김일성과 박정희의 차이]
해방 당시에는 한국보다 북한이 월등히 나았다. 공장과 발전소와 지하자원 모두 북한은 한국보다 10배 많았는데, 인구는 한국의 절반밖에 안 되었다. 아무 것도 않고 그것만 뜯어 먹어도 10년은 한국에 비해 호의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외환보유고든 자유든 평등이든 한국이 북한보다 1000배, 10000배 많거나 낫다. 이 차이를 만든 사람이 김일성과 박정희다. 북한은 아직까지 김일성 체제 그대로이고, 한국은 지금도 박정희 체제가 근간을 이루기 때문이다.
[쿠데타냐, 혁명이냐]
한국에서는 반세기가 넘었지만, 아직도 5.16을 쿠데타로 보느냐, 혁명으로 보느냐, 이 잣대로 선악의 기준을 삼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특히 지식인일수록 그러하다. 우파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CSP(Center for Systemic Peace)에 따르면, 1946년에서 2010년까지 전 세계에서 쿠데타는 750회 발생했다. 한국은 1961년 5월 16일과, 1979년 12월 12일이 포함된다. 한 명도 죽은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도 군대의 힘으로 헌정을 중단시키고 2년간 계엄 통치했으니까, 5.16은 쿠데타가 맞다. 그러나 그 후에 일어난 것을 보면, 혁명도 능가하는 가히 천지개벽이다.
쿠데타는 나쁘고 혁명은 좋다, 라는 단순무식한 공식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두 가지 예로 반증하겠다. 프랑스 혁명은 길게 보면 위대했지만, 그것은 곧바로 불안과 공포의 검은 장막에 휩싸였다.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정치적 안정과 효율적 정부와 민법 정착과 국민교육 보급과 과학기술 진작과 산업혁명을 가져옴으로써 비로소 프랑스만이 아니라 유럽 전체에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시대의 도도한 흐름으로 바꿔놓았다. 그것은 대량살상의 처절한 전쟁 와중에도 바뀌지 않았다. 자유는 피를 먹고 자란다!
러시아 혁명은 어떤가.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이 된다는 만민평등의 공산혁명은 한 줌의 공산당이 새로운 지주와 자본가와 폭군으로 군림하며 절대다수를 그저 시키는 대로 행복해요, 라고 외치는 노예로 전락시켰다. 유물론은 자본가와 지주만이 아니라 체제에 반대하는 노동자와 농민을 나폴레옹 전쟁과 세계 1차, 2차 대전에서 사망한 사람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말 그대로 때려 죽였다. 후에 중공은 그보다 더했다. 공산권에서 생목숨을 잃은 사람은 1억 명을 웃돈다. 결국 전쟁보다 못한 혁명이 러시아 혁명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길게는 70년, 짧게는 45년, 인류의 절반을 철의 장막에 가두고 그들에게 지옥의 쓴맛을 제대로 보여 주었다.
[5.16은 산업혁명과 민주혁명을 동시에 달성한 유일한 쿠데타]
해방 당시 문맹률이 78%이고 농민이 70%인 나라에서 자유선거를 실시한 나라가 한국이다. 과연 그대로 두었으면, 장면의 민주당이 자유민주와 경제개발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었을까. 인도가 있지 않느냐고? 좋은 지적이다. 미안하지만 인도는 실패했다. 네루는 명분은 찬란했지만 민주도 뿌리 내리지 못했고 경제개발은 더더구나 못했다. 민주는 첫째가 평등인데, 신분타파인데, 네루는 카스트 제도를 전혀 없애지 못했다. 선거권만 준다고 해서 카스트는 없어지지 않는다. 대대적으로 중산층이 형성되어야 하고, 교육이 보급되어야 하고, 상공업이 발달해야 하고, 무엇보다 농지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승만은 소작농을 0%로 만들었지만, 네루와 네루의 딸은 고작 농지의 3%만 분배했다. 여전히 농민의 절대다수를 소작농으로 내버려두었다. 네루는 선거 민주주의로 제 가문의 영광만 1947년에서 1989년까지 누리게 했을 뿐이다.
자유민주가 정착된 서구도 산업혁명으로 중산층이 두터워지고 이어 제1차세계대전으로 여성노동이 절실해진 이후에야 비로소 남녀가 공히 1인 1표를 행사했다. 산업혁명의 첫걸음을 떼자마자, 1963년 박정희는 바로 후진국에서는 일찍이 예가 없는 공정한 선거로, 그래서 그야말로 아슬아슬하게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3년 이후 박정희 체제는 유신체제를 포함하더라도 이미 산업혁명을 완성한 1914년 서구 어떤 나라보다 앞선 자유민주를 실천했던 것이다. 남녀 공히 1인 1표인 자유민주를 실천했던 것이다. 민주도 상대적인 것이다. 그는 경제개발만 잘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단순하게 1963, 1972년의 대한민국을 200년 300년에 걸쳐 서서히 발전시킨 서구의 자유민주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미친민주주의(Democrazy)적 발상이다. 한국과 가장 여건이 비슷했던 대만은 1949년부터 1987년까지 대를 이어 48년간 계엄 통치했지만, 박정희는 딱 2년만 계엄 통치했을 뿐이다. 유신시대에도 총선은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어서 여야의 의석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반면에 대만과 싱가포르는 야당의 의석이 텅텅 비어 있었다. 박정희는 또한 정적을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았다. 히틀러보다 잔인한 김일성의 무수한 도발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자유민주의 근간인 법치를 뿌리내렸고 김일성 만세를 부르짖는 자 외에는 일반 국민의 사생활에 일체 손대지 않았다.
5.16혁명(쿠데타라고 하든지)은 기타 749개의 군사쿠데타와 시작부터 달랐다. 5.16의 주역들은 애국심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었다. 박정희는 청렴하고 엄한 가부장이었지, 계몽 대통령이었지, 폭군이나 독재자가 아니었다. 정치는 결과다. 자신의 욕심을 투영한 독심술(투사적 동일시)로 박정희의 권력욕을 꿰뚫어 보았다고 희희낙락 잘난 척할 일이 아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독재자에겐 공통적인 3대 과업이 있었다. 첫째, 철강업! 둘째, 고속도로! 셋째, 독재자의 동상! 이중에서 성공한 것은 독재자의 동상 건립밖에 없다. 그것이 결과로 드러난 독재자의 참모습이다. 입만 떼면 독재자라고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의 대부분 지식인(경제개발을 인정하는 우파 포함)이 박정희를 매도하지만, 박정희는 자신의 동상을 단 한 개도 안 세웠다. 대신에 세계제일의 철강업을 일으켰다. 인구가 1억이 안 되는 후진국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철강업을 자본도 기술도 자원도 없이 일으켰다. 인구 8억에 자본과 자원도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었던 공산황제 모택동도 못했던 철강업을 일으켰다. 일본도 반대하고 독일도 반대하고 미국도 반대하고 UN도 반대하고 세계은행도 반대하고 IMF도 반대했지만, 나라가 망한다고 국내 지식인도 목에 피가 나도록 반대했지만,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던 일본과 독일과 미국을 능가하는 철강업의 기초를 확고하게 다져놓았다. 그로 인해 조선업과 자동차산업의 기반도 확실하게 닦아 놓았다.
게다가 박정희는 전국의 차량이 10만 대밖에 안 될 때, 1000만 대가 다닐 고속도로를 자력으로 건설하여 전국을 일일 생활권으로 만들었다. 물류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일제시대의 도로와 일제시대의 철강업을 우려먹으며 자신의 동상만 방방곡곡에 1500년 동안 조상들이 금수강산에 세운 불상보다 많이, 그 어떤 것보다 거대하게 세운 자가 김일성이다. 박정희의 생일은 5천만 중에 휴대폰 검색하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이 50명이나 될까 말까 하겠지만, 김일성 생일은 북한의 코흘리개도 자기 생일보다 더 잘 안다. 사탕이 나오니까! 다시 말해 도덕과 달리 정치는 결과인데, 이 결과로써 김일성의 마음과 박정희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올바른 선택, 잘못된 선택]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스탈린이 제일 먼저 시작했다(1928년). 두 번째는 1951년 네루, 그 다음으로 1953년 모택동, 1957년 김일성(3개년 계획부터 따지면 1954년) 등이 스탈린을 대동소이하게 모방했다. 1962년 박정희는 비상대권을 쥔 지 1년도 안 돼,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힘차게 밀고 나갔다. 이들 다섯 가운데 성공한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출발점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박정희만 시장친화적인 방법으로 추진했고 나머지는 사회주의 이념에 맞춰 경제논리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정책이 놀라운 것은 그 당시 국내외의 주류든 비주류든 경제학자를 따르지 않고 한국 실정에 맞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아담 스미스의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다수의 서구 경제학자와 정치인은 비교우위(comparative advantage)의 원칙을 금과옥조로 확신하고 후진국에게 진심으로 충고했다. 경쟁력 있는 농산물이나 수산물, 지하자원이나 팔고 나머지는 몽땅 수입하라는 것이었다. 자유무역을 절대시했다. 후진국을 영원히 후진국으로 고착시키려는 수작이었다.
케인즈의 사회적 시장경제 또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경제를 옹호하는 다른 한편의 서구 또는 소련과 동구의 현자(賢者)들은 항구를 봉쇄하고 스스로 공업을 일으키고 상업을 통제하라고 진심으로 충고했다. 보호무역을 적극 옹호했다. 한마디로 수입대체(import substitution) 정책을 추구해야 자본주의 제국으로부터 실질적인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속삭임이었다. 남미도 이런 정책을 추구하다가 망해 버렸다. 국제 경쟁력이 전혀 없는 부패한 독점 기업을 양산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이 둘 중 어느 것도 따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도 식민지 지배의 아픔을 겪은 인도의 네루가 그러했듯이, 스탈린과 모택동과 김일성의 수입대체 정책을 추구했다. 그가 이승만과 장면의 먼지 묻은 책상에서 발견한 경제개발계획이 그러했고, 한국의 학자와 관료가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행해 보다가 금방 모순점이 발견되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 상공부장관 박충훈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 둘을 절충한 중용의 정책을 선택했다. 그것이 바로 수출지향(export-driven development) 전략이었다.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을 절충하여 약한 산업은 정부의 파격적 금융지원과 높은 관세로 경쟁력을 키운 다음 그것이 상당 수준 달성되면, 가차 없이 해외 시장으로 내몰아 경쟁력을 더 키우고 아예 젖을 떼는 전략이었다. 처음에는 가발, 합판, 섬유 등 금방 따라갈 수 있는 경공업에서 시작하여 인구 3천만을 겨우 넘어선 나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중화학공업과 전자산업을 기업가들을 윽박질러 가며 하나하나 밀어붙였던 것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등소평이 박정희의 정책을 그대로 따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중국은 6차 5개년계획인 1981년부터, 대량아사를 낳은 스탈린의 수입대체 정책을 버리고 박정희의 수출주도 정책을 따르면서 한국이 1964년부터 그랬던 것처럼 비로소 신화를 쌓기 시작했던 것이다. 인도도 극적인 변화가 있었다. 최대우방이었던 소련이 망하면서 같이 망하게 된 인도도 네루 가문을 몰아내고 나라시마 라오가 만모한 싱을 내세워 꼭꼭 틀어막았던 항구를 열어 손도 안 대고 코 풀던 국내 독점기업들의 비계 엉덩이를 뻥뻥 차면서, 박정희의 정책을 이어받으면서, 인도도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소련이 망하자 베트남도 1986년부터 박정희의 뒤를 따르면서 천지개벽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박정희는 세계 모든 개도국의 경제모델을 세운 지도자이다. 실은 알고 보면, 이것은 산업화에 뒤졌던 미국도 그랬고 독일도 그랬고 일본도 그랬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비결을 후진국에게는 절대 알려 주지 않았던 것이다.
[잘 살아 보세, 하면 된다]
국가 지도자는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말을 전 국민에게 각인시켜야 한다. 그러나 북한처럼 구호가 너무 많아서는 발성 연습보다 못한 구호로 그친다. 5년에 1개, 10년에 1개면 족하다. 박정희는 단 두 마디로 18년간 통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잘 살아 보세’와 ‘하면 된다’이다.
이것은 국민의 의식과 무의식을 통째로 바꾼 역사적인 촌철살인이다.
한국은 공업과 상업이 무엇인지 청나라와 러시아를 물리친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배웠다. 일제는 중등교육 이상은 철저히 차별했기 때문에 한국인은 한 세대가 넘는 기간 동안 어쩌다 그것도 운이 좋아야 구경만 했지, 공업과 상업을 제대로 배운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공업은 더러 구경이나 했지만, 근대적 상업은 아예 듣도 보도 못했다. 특히 무역에 무지했다. 일본은 패전 이전과 이후의 상업이 전혀 달랐다. 일본 하면 친절을 떠올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1945년 이후의 일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인은 일제시대를 거쳐도 여전히 양반과 상놈이라는 봉건의식에 절어 있었다. 2천년 이어져 온 농업사회에, 다수의 인력이 필요하던 시대에, 그것은 잘 작동되었던 체제였기 때문에, 이상사회는 여전히 요순시대 내지 단군시대였던 것이다.
그저 밥술이나 먹고 사는 게 아니라 미국처럼 영국처럼 살려면 최소한 일본처럼 살려면, 산업화가 필수적이었는데, 공업과 상업의 발전이 필수적이었는데, 정신적 양반이 전 인구의 80% 이상 차지했던 나라에서 ‘잘 살아 보세’라는 말은 영 상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나라님으로서 서슴없이 이런 상놈의 말을 지엄한 공자님의 말씀보다 앞세웠던 것이다.
이제 잘 살려면 옛날 양반처럼 가만히 앉아서 글이나 열심히 읽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체면상 나서기가 어려웠다. 다행이랄까, 농지개혁과 6.25동란으로 아무리 잘 살아 봐야 쌀 100석도 거의 불가능해졌다. 하향평준화가 광범위하게,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요새 시세로 따져도 고작 연수입 2천만 원이 최고 부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도 나도 잘 살게 된다면야 체면 안 차릴 마음의 준비는 다 되어 있었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것이다. 잠재실업률이 50%가 넘던 나라에서 그 즈음 무의식적으로 누구나 상놈이나 할 상공업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걸 문화적으로 살펴보면, 명분 문화에서 실리 문화로 바뀌는 경천동지할 패러다임 변화다. 박정희 이래로 명분은 민주, 실리는 경제개발로 이원화되었다. 언감생심 절대빈곤의 나라에선 선진국형 민주라는 명분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지만, 조선 500년 명분 문화는 지식인을 중심으로 지금도 깊게 뿌리박고 있다. 그 결과가 박정희는 산업화에는 성공했지만, 민주화에는 실패했다는 운동권 공식이다.
박정희는 포병장교 출신답게 경제개발에는 과학기술이 바탕이 되어야 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공고와 공대를 대대적으로 키웠다. 후진국 지도자로선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수출 1억 달러 시대에 5천만 달러 대외원조를 전액 투자하여 과학기술연구소(KIST) 건립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산업 기술을 선진화와 동시에 국산화하는 기반을 닦았던 것이다. 일단 공장이 들어서자, 너도나도 취직하려고 달려들었다. 상품을 팔려고 뛰어들었다. 박정희는 사장이 양반보다 더 높은 나라로 바꾸었다. 실리가 명분을 앞서는 나라로 개편한 것이다. 조상과 가문 덕에 먹고 사는 과거지향 문화를 ‘내가 노력해서 내가 잘 사는’ 미래지향 문화로 개편한 것이다.
자원도 없고 자본도 없고 기술도 없는 나라에서 ‘하면 된다’는 말은 자기 체면이요 과대망상이다. 그런데 박정희는 주도면밀한 계획과 정확한 통계와 가시적 성과로 한민족의 거대한 잠재력에 불을 댕기었다. 아무리 못 살아도 국가 정책을 따르면 잘살 수 있고, 무슨 일이든 노력하면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 여기저기서 척척 입증되자, 엽전의식에 찌들어 있던 민족이, 내심 여건만 갖춰지면 최소한 일본인보다는 잘할 수 있다는 민족이, 자존심이 유독 강한 민족이 드디어 신바람의 불이 붙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누천 년 패배의식에서 노력하면 누구나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박정희는 모든 국민에게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주인의식을 심어 준 것이다. 천석꾼 양반에겐 천박하기 짝이 없는 이 두 마디로 한국인은 의식세계와 무의식세계가 전혀 다른 민족으로 거듭났다. 이 점에서 남북한은 숫제 다른 민족으로 바뀌었다. 노동자와 농민은 노예나 거지, 노동당원은 깡패, 배불뚝이 3대는 태양신인 곳에서, 주인은 딱 한 명밖에 없는 곳에서, 5천만이 누구나 주인인 나라의 신바람 인간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박정희는 세계 모든 후진국의 지도자요, 한국의 으뜸 계몽 지도자다. 한국인이면 그가 싫든 좋든 누구나 그 덕을 보고 산다. 본인이 극구 부정할지라도!
(2016. 3. 12.) 최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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