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당시 38선 바로 이남에 있었던 개성에서는 인민군이 내려오자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사람들이 인민군측과 협력하여 우익인사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서울이나 강화 등 경기북부지방의 경우 워낙 갑작스럽게 인민군이 남하하여 미처 보도연맹원을 구금하거나 수감된 보도연맹원을 어떻게 할 수 없었으나 평택 이남 지역에서는 강화 등 북한 점령지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곧바로 구금하여 처형한 것으로 보인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전쟁과 사회> p220-221
남침 5시간 만인 오전 9시 개성이 그들에 의해 함락되고 말았다. 좌익활동을 하다가 전향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자들이 오히려 반공인사와 양민들을 학살하는데 앞장섰다. 그들의 그 같은 만행은 대한민국에 전향했던 사실만으로도 공산군에게 살해될 충분한 이유가 되므로 두렵고 불안하여 이를 은폐하기 위해서라도 황급히 그들의 앞장에 서서 만행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사실 그날 아침 공산군은 그들을 모아놓고 전향한 죄를 씻기 위해서라도 앞장설 것을 강요하기도 하였다. 개성보도연맹원들의 잔인한 행동이 정부로 하여금 한강 이남의 보도연맹원들의 행동을 경계하도록 조치시킨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한국학생건국운동사> p517
6월 28일 새벽 1시 20분경 서울 역전에 도달해보니 여러 대의 전차(電車)로 장애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여기서 이상한 광경을 발견했다. 붉은 완장을 팔에 두른 2명의 청년이 피난민들 틈에 끼어서 이제 서울이 영용한 인민군에 의해 해방되었으니 피난가지 말고 빨리 집으로 돌아갈 것을 강요하며 행패를 부리고 있는 것이 지프차 라이트 속에 보였다. 나는 즉시 한호 상사에게 공산분자를 색출하여 처치할 것을 지시했다. 한상사는 광복 직후 함경도에서 월남하여 서북청년단에서 반공활동을 하다가 제 18연대 창설과 함께 입대한 청년이었다. 그는 즉시 현장으로 가서 두 명의 적색분자를 처치하고 돌아왔다.
삼각지 진지를 출발한 중대는 용산구청 앞과 공덕동 뒷산을 거쳐서 마포형무소 앞을 통과하다가 뜻하지 않은 광경을 목격했다. 형무소에서 뛰쳐나온 한 무리의 죄수들이 수의를 입은 채 북한군을 환영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들은 중대 대열이 접근하자 저항하려는 태도(돌팔매질과 작대기를 휘두르는)를 취하고 나왔다. 적개심에 불타있는 장병들이 그런 꼴을 보고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중대장님! 저 놈들은 빨갱이 운동을 하다가 징역을 살고 있던 놈들인데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처치해 버려야 합니다." "좋다. 그러나 주동자들만 색출해서 처치하라." 나의 승락이 있자 대원들은 그들을 포위하고 주동자 15명을 색출하여 즉결처분하고 나머지는 훈방했다.
18연대 3중대장 김상덕 중위 <7일간의 한강방어> p33,45-46
6월 28일 남산 남쪽 해방촌으로 내려와 주민들에게 아군의 행방을 물었더니 (한강교 폭파로) 서빙고에 집결하여 도하하는 중이라 한다. 서빙고로 가려고 해방촌 한 모퉁이에 서서 내려다보니 길목마다 행인들의 신분을 조사하는 청년들이 눈에 띄었다. 50대 부인과 한 주민에게 알아보라고 했더니 조사하는 청년들은 보도연맹원들이며 붙잡히면 인민군에 인도된다고 한다.
2사단 병기중대 부관 길관우 <노병들의 증언> p381
6.25가 터진지 사흘 만에 서울을 빼았기고 뒤쳐진 국군 패잔병들을 잡는 대로 총살하여 강뚝에서 뒹굴러 버리는 광경을 보고 또 어린 학생들을 불러 모아 소년군을 조직하여 집집마다 숨어있는 청장년을 고발하여 닥치는 대로 붙잡아 가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이리 저리 피해 다니지 않을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더욱이 보도연맹원 출신 동리 빨갱이들은 보광동 양민들(주로 통반장 가족)을 젖먹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30여명을 한강백사장(공영사 근방)에 끌어다가 구덩이를 파게하고 무차별 총살시켰다.
이희태 전 S고 학생주임 <6.25비사> p48
6월 28일 이문동에서 광나루를 목표로 정하고 분산철수가 시작되었다. 낮 1시 하산하는데 벌써 북괴군은 밀어 닥친다. 순식간에 수명이 달려들어 생포하려 한다. 나는 돌아서서 소리쳤다. " 거기 서! 오면 쏘겠다!" 서로 총질도 못하고 헤어졌는데 이번에는 보도연맹원들이 떼를 지어 작대기를 짚고 산으로 올라오면서 잡으려 한다. 나는 권총을 뽑아들며 소리쳤다. "거기 서! 오면 쏜다!" 두세 번의 위기를 모면하고 이문동 뒷산을 간신히 빠져 나왔다.
8연대 8중대 2소대장 강영활 중위 <노병들의 증언> p754
6월 28일 흑석동에서 적정을 수집하던 중 김포지구에 적 전차 40여대가 침입했다는 제보가 있어 이를 확인하기 위해 밤중에 현지로 떠났다. 가는 도중 보도연맹원을 만나는 것이 적보다 더 두려웠다.
육군본부 정보장교 최명재 <노병들의 증언> p616
적 전차포의 사격을 피해 급히 골목길로 차를 몰아 적의 관측에서 벗어났다. 다시 큰 길로 빠져나왔을 때 안양 읍사무소 건물이 눈에 띄었고 어느새 인공기가 걸려 있었다. 그동안에 인공기를 보기도 하고 탈취하기도 했지만 아직 국군이 있는 지역 안의 건물에 인공기가 걸려 있는 것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저 기를 게양한 자가 건물 안에 지금도 있을 것인지, 기를 내려 찢어 버릴 것인지 나는 망설였다. 전차의 캐터필라 소리가 들려왔다. 5분의 시간이 아쉬웠다. 5분만 허용된다면 반역자를 처단할 수 있었는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나는 이 광경을 통해서 불리한 전황이 반역자나 그의 동조자들에게 실제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나를 목격할 수 있었고 국가의 전쟁지도방침과 행정기능 치안유지 및 주민통제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었다.
18연대 부관 이병형 대위 <대대장> p51
7월 4일 저녁 무렵 안성군의 한 마을에 도달했다. 약 60호 정도의 촌락이었다. 마을 입구에는 20여명의 청년들이 인공기를 들고 도로를 막고 서 있었다. 우리 일행은 인공기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도적놈 피하면 강도 만난다고 하더니......."
일제히 임전태세를 취했다. 천천히 다가가 살펴보니 그 청년들은 비무장이었다. 그쪽에서도 의아한 표정으로 이상하다는 듯 웅성거렸다. 우리 일행을 인민군으로 오인하고 환영 나온 사람들이었다. "인민군 동무 환영합니다." 우리들은 어리둥절했지만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청년들은 어떤 사람들이요?"하고 이북출신 장교가 나서서 물어보니 그들은 서슴없이 "인민군 환영준비위원"이라 했다. 우리는 계속 인민군 행세를 하면서 주동자를 가려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오늘 밤 저 산 계곡 아래서 숙영할 테니 환영위원들은 나와서 우리를 도와주면 좋겠소." 손관도 소령이 이북 사투리를 써가며 그들에게 당부했다. 손 소령은 이북출신인데다 달변가였기에 그들은 깜빡 속고 있었다.
그들 핵심 빨갱이를 유인한 우리들은 그 계곡 쪽으로 갔다. 얼마 후 그 계곡에서는 수십 발의 총성이 들려왔다.
육사 생도2기 주성노 <어머니와의 약속> p32
한강 도하를 끝낸 우리 8연대 2대대는 천호동에서 백리 길을 행군하여 수원농대에 도착하여 기숙사를 둘러보니 기타며 미숫가루며 술, 반찬 등이 눈에 띄었다. 기숙사를 쓸 생각이었지만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소대별로 강의실을 할당해주고 돌아서는데 잡일을 하는 학교직원이 보였다.
학생이 한명도 보이지 않는 게 궁금했던 터라 그것을 물어 보았다 "학생들은 다 어디로 갔소?" "인민군 환영하러 서울 갔지요." "인민군을 환영하러 갔다구요?" 부아가 확 치밀어 올랐다. 곧바로 숙소를 기숙사로 재배정해 버렸다. 그날 밤 병사들이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오랜만에 느긋한 시간을 가지도록 내버려두었다
8연대 8중대장 정승화 대위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 p123-124
평택역 근방에는 동원된 많은 제대군인이 화차에 실려와 있었으며 전방에서 후퇴하는 병력까지 합쳐 역구내와 광장은 크게 붐비고 있었다. 이때 쌕쌔기가 날아와 기총 공격을 하여 평택역 일대는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했다. 팔 다리가 끊어지고 목이 떨어진 사체가 역 광장엔 물론 부근 논두렁에 즐비했고 붉은 피가 흥건했다. (평택역 오폭사건)
밤이 되니 부대는 다시 후퇴를 개시했다. 얼마쯤 걸어가는데 이곳저곳에서 요란하게 "인민군 만세"를 외치는 고함이 들린다. 알고 보니 창고 속에 갇혀있던 보도연맹원들이 후퇴하는 우리를 인민군으로 잘못 알고 소리치고 있었다.
육군본부 직속 독립대대 화기중대 소대장 정규화 <노병들의 증언> p354
7월 초순경 한밤중에 필사적으로 적의 포위망을 뚫고 오근장을 통과할 무렵 날은 밝았다. 이 지방의 보도연맹원들은 간악했다. 우리에 의해 창고에 갇혔던 빨갱이 보도연맹원들은 창고를 부수고 나와 곳곳에서 아군의 퇴로를 차단하는가 하면 결사적으로 대항해 와 후퇴하는데 2중 3중의 어려움을 겪었다.
1연대 소대장 이본령 중위 <노병들의 증언> p516
진천전투에 참가했으나 세가 불리하여 야간에 청주로 이동하는 도중 지명을 알 수 없는 지점을 통과할 무렵 난데없이 "인민군 만세"를 외치며 북괴를 찬양하는 함성이 들려와 깜짝 놀랐다. 그리고 총성과 수류탄이 작렬하는 소리가 들려 달려가 보니 도로변에서 약 50미터 떨어진 창고 속에 수용되어 있던 보도연맹원들이 아군을 인민군 선발대로 잘못 알고 성급하게 환영했다는 것이다.
18연대 소대장 김용건 중위 <노병들의 증언> p 707
문안산을 철수한 연대는 미호천변에서 잠깐 싸우고 청주 입구의 오창리를 통과할 때 어느 창고 건물에 보도연맹원을 모아 사살했다는 말을 들으며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아군의 후퇴병력을 북한군이 들어오는 줄 알고 만세를 부르며 떡과 과일을 내놓고 환영했다는 것) 청주를 통과하였다.
기갑연대 병사 안용현 <한 노병의 잡화> p60
본교에서는 6.25가 발발하기 이전부터 부녀동맹 또는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좌익활동을 해왔던 학생들이 있었다. 이들은 교수들의 행적을 학생들 앞에서 낱낱이 열거하여 즉석비판에 붙인 다음 파면신고를 하였다. 그리하여 7월 24일 경에는 120명의 교수 중 7,8명만 남기고 모두 축출되었으며 7월 31일이 되자 총궐기대회가 있다고 교수들을 강권하여 모이게 하고는 강제 납북을 기도하였다. 이때 대부분의 교수들은 출근하지 않고 피신했으나 형편을 잘 모르고 나왔던 교수들은 납북되었다.
<이화100년사> p321-322
사변이 난 3일 후인 28일 서울은 지하의 빨갱이들로 구성된 보도연맹이라는 조직이 미쳐 피난을 못간 우익인사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눈치 빠른 보도연맹원들이 공산당으로 전향하여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데서 문제가 발생되었다. 이들의 행동으로 인해 아직 아군지역인 한수 이남에 있던 보도연맹원들은 사상범으로 몰려 모두 체포되는 지경이 되었다.
장군(張群) <남기고 싶은 이야기> p139-142
전쟁 초반 국군과 경찰조직이 와해되면서 후퇴하자 곳곳에서는 치안공백 상태가 되었다. 무법천지에서 제 세상을 만난 보도연맹원들이 경찰, 군인 가족, 우익인사를 공격해 많은 사람이 희생당했다. 대전까지 후퇴하면서 한숨 돌린 정부는 보도연맹원들이 저지른 만행을 전해 들었다. 이들을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큰일 나겠다 싶어 대대적인 검색을 통해 보도연맹원들을 체포하여 처단했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도 다수 학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6.25 당시 경기도 파주지역에 있던 초등학교 소사(경비 청소 등의 일을 하는 비전문 기능직)가 빨갱이들이 오자 완장을 차고 설쳐대며 학교장을 포함하여 지역사회유지들을 죽이고 자신이 교장 노릇을 하다가 국군이 들어오자 살해된 일이 있었다. 오늘날 이 사람의 아들이 유사한 짓을 한 사람들의 자식들과 함께 역사 재조명작업을 하고 지방자치단체의 자금협조까지 받아 위령탑을 세우고 있다. 이들의 조상에게 피살된 지역유지의 자녀들은 이들의 행위를 구경하는 처지가 되는 등 민족정통성과 민족정의를 훼손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전재혁 <회색시대> p 60,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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