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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과 친일프레임
Korea, Republic of 비망록 1 516 2016-11-06 12:32:33

사례1

윤응열(尹應烈) 전 공군 작전사령관은 일본군, 북한군, 한국 공군에 근무한 경험이 있다. 일제(日帝) 시대인 1943년 평양3中 재학중 일본의 소년항공병학교에 들어가 조종훈련을 받고 이듬해 자바 전선(戰線)에 배치되었다. 소년항공병학교 제15기 졸업생인데, 수십 명의 한국인이 동기생으로 배출되었다. 이들은 해방 뒤에 북한과 한국 공군의 창설에 참여하게 된다.
 
 윤응열씨는 1945년 8·15 해방을 프놈펜에서 맞았다.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북한공군 창설에 참여하였다. 일제 시대 때 전투기 조종 경험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북한공군(空軍) 창설에 동참하였다고 한다. 북한공군(空軍) 창설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사람은 이활(李活). 그는 민간인 신분으로 자비(自費)를 들여 조종술을 배운 뒤 일본 해군에 촉탁신분으로 들어가 전투기를 몰았다. 소년항공병학교 출신으로는 이흥부, 박경옥씨 등이 참여하였다. 나중에 인민군 9사단장으로 가는 허민국은 일본 나고야 항공학교 출신이다. 공군사단장까지 오른 서주필은 윤흥렬씨의 항공병학교 동기생인데, 6.25 전쟁 때 미군(美軍) B-29기도 격추시킨 사람이다.
 
 윤응열씨는 북한공군 장교로 근무하다가 사상검열을 받아 조종사 자격을 박탈당하자 월남하여 1948년에 육사 7기로 들어갔다. 그는 졸업 후 육군 항공대 소위로 임관하였다가 1949년 10월1일 공군이 창설되자 옮겼다. 6.25 전쟁중 107회의 출격을 기록하였다.
 
 6·25 남침 당일 尹씨는 여의도 비행장의 당직사관이었다. 그날 소련제 야크기를 몰고 서울 등지를 폭격한 북한 공군조종사들은 거의가 일본군 조종사 출신이었다. 윤씨의 동기생인 박경옥은 야크기가 격추되면서 낙하산으로 뛰어내렸다가 사살되었다. 또 다른 동기생인 이흥부는 낙하산을 타고 착지(着地)하였으나 복부에 총상을 당하였다. 한국 공군이 그를 인수하자 李씨는 동기생인 윤응렬씨를 찾다가 숨졌다고 한다.
 
 인천 상륙 이후 국군(國軍)이 북진(北進)하여 평양을 점령하였을 때 윤응렬씨는 평양에 가서 이흥부의 부모를 만났는데, 부모가 아들이 아직 살아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차마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하지 못하고 왔다고 한다.
 
  위의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북한에서도 일제(日帝)시대의 군대 경험자를 소중한 자원으로 생각하여 중용(重用)하였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친북(親北)세력이 대한민국을 만든 주류(主流0세력을 공격하기 위하여 박정희 같은 만군(滿軍)장교들까지 친일파(親日派)로 몰고 있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한때 북한정권의 제2인자였던 김영주는 김일성의 동생인데, 일제 시대에 일본군의 보조원으로 근무했던 이다. 한국의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지낸 강양욱은 일제하(日帝下) 도의원이었다. 그는 김일성의 외삼촌이다.
 
  이승만이 짠 대한민국 초대 내각엔 친일파가 한 사람도 없었으나 김일성의 초기(初期) 정권에는 많은 친일파들이 있었다. 노무현 정권 시절 금강산에서 남북간의 접촉이 있었을 때 북한의 한 고위간부가 사석(私席)에서 한국측 모 인사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요사이 남한에서 친일파를 새삼 거론하던데 이해를 할 수 없어요. 김일성 주석님은 친일파였던 사람도 뉘우치면 다 받아들여 조국 건설에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이 말은 공산당에 협조한 친일파는 중용(重用)하고 반대한 친일파는 숙청하였다는 의미이다. 남한의 철부지 친북파들은 북한정권이 친일파를 숙청하였고 이승만 정부는 하지 못하였으므로 북한정권이 정통성이 있다는 주장을 하는데 무식한 건지 알고도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6·25 남침 직후 서울에 들어온 북한군은 한국 공군의 창설 멤버인 이영무(李英茂) 대령(육군항공대장 역임. 당시 민간인)을 납치하여 갔다. 그는 장개석의 중국군에서 조종사로 근무하면서 일본군과 싸운 사람이다. 李 대령을 납치해간 북한군은 협력해달라고 요구하였으나 李씨가 거부하자 그를 투옥하여 옥중에서 죽게 하였다. 협조적인 친일파를 중용(重用)하고 반대하는 독립파를 탄압한 셈이다. 이게 북한정권의 친일파 숙청 기준이었다.
   
북(北)은 비명횡사(非命橫死) 내각, 남(南)은 독립투사 내각
-이승만이 친일파를 중용했다는 미신에 대해서.
  
1. 소위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초대 내각 명단을 보자.
  
   수상 金日成, 부수상(외무상 겸임) 朴憲永(처형), 부수상(산업상 겸임) 金策, 부수상 洪命熹, 내무상 朴一禹(숙청), 민족보위상 崔庸健, 재정상 崔昌益(처형), 사법상 李承燁(처형), 상업상 張時雨(처형), 교통상 朱寧夏(처형), 노동상 許成澤(처형), 국가검열상 金元鳳, 도시 경영상 李鏞, 교육상 白南雲, 문화선전상 許貞淑, 농림상 朴文圭, 보건상 李炳南, 보위성부상 김무정(처형), 최고회의 의장許憲, 최고회의 상임위원장 金枓奉(숙청). 이상 20명 중 10명이 사형되거나 정치범 수용소에서 사라졌다. 비명횡사(非命橫死) 내각인 셈이다. 이외에 김영주(노동당 조직부장, 김일성의 동생), 홍명희(북한 부수상), 이승엽(남로당 제2인자), 장헌근(북한 임시 인민위원회 사법부장)도 日帝 때 부역하였던 親日派였다.
  
2. 대한민국 초대 내각을 본다.
  
   대통령 李承晩(상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부통령 李始榮(임시정부 재무총장), 국회의장 申翼熙(임시정부 내무총장), 대법원장 金炳魯(抗日변호사), 국무총리 李範奭(광복군 참모장), 외무장관 張澤相(청구구락부 사건으로 투옥), 내무장관 尹致暎(흥업구락부 사건으로 투옥), 재무장관 金度演(2·8독립선언 투옥), 법부장관 李仁(抗日 변호사), 국방장관 李範奭 겸임, 문교장관 安浩相(철학교수), 농림장관 曺奉岩(공산당 간부·사형), 상공장관 任永信(독립운동, 교육가), 사회장관 錢鎭漢(抗日 노동운동가), 교통장관 閔熙植(철도교통 전문가), 체신장관 尹錫龜(교육 사회운동가), 무임소 장관 李靑天(광복군 총사령관), 무임소 장관 李允榮(抗日 기독교 목사), 국회부의장 金東元(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 국회부의장 金若水(사회주의 독립운동).
  
   이상 19명은 거의 전부가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다. 친일파는 한 사람도 없다. 반공반일(反共反日)을 국시(國是)로 삼다시피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친일(親日)한 사람을 장관으로 기용할 리가 없었다.
  
   다만, 親日 경찰 출신들을 중용하여 공산주의자들을 수사하도록 했는데, 이들이 정치사찰까지 하는 바람에 독립운동가 출신들을 조사하는 사태가 일어나곤 했다.
  
   대체로 李承晩 내각은 독립투사 내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남북한 어느 쪽이 정통성이 있느냐가 자명(自明)하게 판명된다. 정통성 안에는 법치(法治)의 요소가 크게 자리잡아야 한다.
  
   정치적 숙청으로써 초대 각료의 반을 제거하는 체제에 정통성이 있을 수 없다. 민족사적 정통성은 민족 전체의 행복을 어느 체제가 발전시켰느냐로 판가름 낸다. 인간의 행복은 물질적 복지, 안전, 자유가 있어야 한다.
  
   김일성 체제는 출발부터 피비린내를 내면서 민족의 재앙이 되었고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조국을 위하여 고투한 분들을 모았다. 그 차이가 오늘날의 남북한 차이인 것이다.


박정희 전대통령을 친일로 매도하는것은 그가 이룩한 공적을 깍아내리고 반대로 김일성의 업적을

상대적으로 높여 보이기 위한 술책입니다.

장차 해방된 나라의 미래를 내다보고 선진 군사체제를 배워 훗날 나라를 위해 일본군관 입학한 경력을 빌미삼아 친일로 매도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격이 아닐 수없습니다.


사례2

1970년대는 집집이 돌아다니며 전집(全集)을 파는 월부 책장수 전성기였다. 여유가 생긴 중산층이 자식들을 위해 아동용 문학전집이나 위인전기를 호기롭게 사들였다. 진홍색 표지의 50권짜리 계몽사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이나 15권짜리 한국전기전집, 세계위인전집은 아이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전집이 배달되면 도서관이라도 집에 들인 듯 잔뜩 들떠 책을 펼쳤다. 동화책을 어느 정도 읽어치우자 책 읽기가 시들해졌다.

춘원 이광수를 만난 건 그때였다. 월부 책장수가 성인용 책으로 추천한 첫 책이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10권짜리 삼중당 이광수 전집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에게 '이광수 전집'은 버거웠다. 세로쓰기로 빡빡하게 들어찬 활자에 질렸다. 그래도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다. '무정' '유정' '흙' '사랑' '마의태자'…. 제대로 된 배경지식 없이 만난 이광수 소설은 초등학생이 소화하기엔 무리였다. 이광수는 그렇게 멀어져갔다.
 
한국문인협회가 얼마전 춘원과 육당 최남선을 기념하는 문학상을 만들겠다고 발표했다가 계획을 접었다. 일부 단체에서 "친일파를 기리는 문학상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느냐"며 거세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춘원과 육당은 각각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과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해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꼽히지만, '친일(親日)'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이광수는 일찍이 문학평론가 김현이 "만지면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로 꼽을 만큼 한국 문학의 아킬레스건이다.

춘원이 일제 말기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운 총독부 시책 홍보에 앞장서고, 일본 유학생을 대상으로 학병(學兵) 지원을 촉구하는 연설에 나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도 있다. 1943년 11월 교토에서 이광수의 학병 권유 연설을 직접 들은 김우전 전(前) 광복회장은 2014년 본지 인터뷰에서 "'당신들이 희생해야 우리 민족이 차별을 안 받고 편하게 살 수 있다. 조선 민족을 위해 전쟁에 나가라'고 했다"며 이광수의 '친일'에서 민족을 위한 '고민'을 봤다고 했다. 이 연설을 듣고 지원 입대했다가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한 독립운동가의 말이니 무게가 가볍지 않다. 원로학자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도 "춘원 소설을 읽으면서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면서 "춘원을 친일 문인으로 매도하는 기사를 대할 때마다 나는 그를 나무랄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한 적 있다. 부분만 보고 전체를 놓치는 편협한 역사 인식을 우려한 것이다.

'춘원 이광수' 하면 '친일파'를 떠올리는 요즘 세대에게 이광수는 잊힌 작가다. 문학도 말고는 '무정' 같은 그의 소설을 찾는 사람도 없다. 이 땅에는 그의 문학과 삶을 온전하게 들여다볼 문학관 하나 제대로 없다. 춘원이 어쩌다 친일의 길에 들어서게 됐는지, 그 과정에 대한 고민과 성찰 없이 욕만 한다고 극일(克日)이 되는 걸까.

최근 개봉한 영화 '밀정'은 친일과 독립운동 사이에서 갈등하는 일제 고위 경찰을 주인공(송강호)으로 내세웠다. 총독부 경무부장이 의열단에 협조한 혐의를 받던 주인공을 다시 회유하는 막바지 장면, 송강호의 흔들리던 눈빛은 압권이었다. 우리 지식사회의 수준은 영화관을 찾은 600만 관객 눈높이보다 빈약한 걸까.


<친일>은 민주화 세력을 참칭하는 좌파 운동권의 가치 프레임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대한민국이 미제국주의와 결탁한 친일,지주계급이 세운 미국의 식민지이고 이후 독재, 부패, 종속의 역사가 펼쳐졌다고 믿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계속해서 친일파를 만들어내고 유포, 강화해서 그 프레임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그로 인해 수많은 위인들이 시궁창에 처 박혀 있습니다.


이상 퍼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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