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를 비난해도 되는 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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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를 비난해도 되는이유는 이겁니다. 신라는 처음부터 입조를 약조했습니다. 당나라에 신하로 들어가겠다고 한거죠. 그래서 당나라는 군대를 파병하고, 신라는 군량미를 부담하는 형식으로 전쟁을 합니다. 당나라는 이미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보급선이 무척 길어 부담스럽다는걸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수나라때도 을지문덕의 보급선 차단 작전으로 인해 대패 했던 역사도 알고 있습니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역성혁명이잖아요. 양씨가 이씨에게 양위한.. 역성 혁명이요. 수나라나 당나라나 같은 나라다 이말이고, 수나라의 경험을 당나라도 잘 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나라는 보급선을 길게 가져가면 불리하다는걸 알고 있었고, 때마침 신라가 입조를 약속하니 신라로 하여금 보급을 하도록 하게 한겁니다. 그리고 드디어 백제가 떨어졌을때... 당나라는 무열왕에게 안동도호부를 하사하죠. 그냥 백제땅이 안동도호부가 되는거지만 당분간 그 태수로 무열왕을 임명한거다 이겁니다. 신라의 왕을 자신의 신하로 임명한다... 이미 입조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신라는 나중에 고구려가 떨어지고 나서 당나라의 명령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반란을 토벌하러 장군을 보내죠 이게 우리가 배우는 통일전쟁입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신라는 당나라의 신하로 들어가기로 약조..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에 군량미 조달 모반... 전쟁 이렇게 된게 통일사에요. 욕먹을만 하지 않나요? 고구려를 무너뜨려서가 아니라, 스스로 신하로 들어간 치욕적인 역사 말입니다. 그리고 신라는 통일을 한게 아니라 백제 영토를 가져간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삼국을 해체한 장본인이며 남북국시대가 되는 겁니다. 대진국(발해)는 고려를 계승했고 그 고려는 조선과 대한민국 코리아가 계승한겁니다. 신라를 구한말로 비유하면... 신라는 일본(혹은 청나라)가 두려워 청나라(혹은 일본)에게 식민지로 들어가는걸 자초 하는겁니다. 적어도 조선의 을사 보호조약은 강제된, 실질적으로 무효인 조약이에요. 하지만 신라가 했다면 합법적이고 자발적인 조약이 되었을겁니다. 이래도 신라를 욕 안한다면, 그게 더 이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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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 내가 알기론 조선에 사대부들 왕씨들 열심히 죽였는데. 계승이 아니라 엎어버린거지
조선도 대한민국이 엎어버린거고 근데 조선이 왕씨 죽일때가 제일 혹독하고 잔인했지
고려가 신라 김씨를 어떻게 했는지나 보면 답이 나오지.
"적어도 조선의 을사 보호조약은 강제된, 실질적으로 무효인 조약이에요."
네 고려는 몽골의 속국도 부마국도 아니죠. 조선에선 고려는 몽골의 부마국이라고 놀리던
그리고 이 사람은 무슨 후백제식 떨거지 호족논리로 역사를 쳐팔고 있어.
그리고 이 새끼 전에 안승새끼보고 고구려의 부흥사령관이라 떠들다가 나한테 좃털린 놈 아닌가? ㅋㅋ
신라는 당나라군인들의 밥상을 책임졌네요.
모르는 것을 알게됐네요.
양씨가 이씨에게 양위한.. 역성 혁명이요.
수나라나 당나라나 같은 나라다 이말이고, 수나라의 경험을 당나라도 잘 안다는 겁니다."
같은 나라 좋아하시네 ㅋ 그리고 역성 혁명이래 양씨가 이씨에게 양위? 지랄똥을 싸네 ㅋ 이 새끼는 고구려도 빨면서 짱깨도 은근빠는 병신이네 ㅋ 역성혁명? 이 새끼 조선족이냐?
전형적인 유사역사학이네.
최성룡
삼일
위선척결
구국기도.
똑 같은 정신벵자들아 꺼지라.
신라는 일본(혹은 청나라)가 두려워 청나라(혹은 일본)에게 식민지로 들어가는걸 자초 하는겁니다.
적어도 조선의 을사 보호조약은 강제된, 실질적으로 무효인 조약이에요.
하지만 신라가 했다면 합법적이고 자발적인 조약이 되었을겁니다."
이런걸 역사랍치고 가르치는데 내가 반론안하게 생겼니?
참고로 신라에서 왜구는 해적떼들로 토벌이나 할 존재들인데
조선말 신라때처럼 일본이 해적질로 연명하는 존재로 전략만 해도
식민지 안당했잖아? 당나라에 굽히긴 뭘 굽혀 기벌포전투때 설인귀 씹병신되었는데
676년 기벌포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당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낸겁니다.
신라의자랑이 아니라 신라의 치졸함이죠.
불리하니 백제,고구려 부흥군에 손 벌린건 치졸함 그 자체.
신라의 자랑이 아니라면 구당서 신당서에 기벌포해전이 나와야 하는데, 안나오죠
짱깨들에게 얼마나 치욕스러웠으면 이런게 안나올까요?
이걸 자랑이라고 안하면 짱깨사관 구당서, 신당서를 긍정하는건데
완전 동북공정 논리네요. 그 기벌포해전 패자가 설인귀에 지휘관은 신라장수 김시득입니다
안승은 그때 뭐했는가에 기록은 없죠.
그리고 그 부흥군장놈이 충신 검모잠을 쳐죽였는데 저는 고구려가 좋지만 안승새끼는
능지처참이 적격인 놈이죠.
아울러 먼저 항복을 한건 안승과 그 떨거지들입니다. 지 부하를 죽이고 신라까지 올정도면 지가 지발로 항복한것이나 마찬가지죠
실제로 안승과 그 떨거지들은 신라에서도 지 왕자리 뺏었다고 반란일으키자 신문왕께서 토벌을 했죠
그리고 불리한건 백제. 고구려 부흥군이지 신라가 아니에요
나라도 강탈당해놓고 의지할곳 없는 주제에 불리? 손 벌린게 치졸?
신라내에서 지들끼리 개싸움하다가 자멸한건 9서당만봐도 알수 있죠.
광개토태왕이나 근초고왕께서 이런거 보시면 어떨까요?
그 안승놈이 지발로 투항한걸 손 벌렸다고 하네요. 참고로 이놈들 후손들은
곧 호족들이 되어 신라각지에 반란을 터트리는데 양길, 궁예, 견훤 다 그 호족들에게 나가 떨어지게 됩니다
그것들도 호족들이구요
그리고 고려초 왕이 무려 2차려나 제위기간을 제대로 못채우게 되는데
광종폐하께서 호족들을 싸그리 몰살시키게 됩니다. 호족연합체의 시작은 곧 안승과 그 일당들이 원조지요
여기분들이 호족연합체 즉 호족들을 안까는데 님도 마찬가지인데
전 고구려나 백제나 신라나 고려보단 호족들이 가장 싫습니다. 그걸 만든 중세에도 만든 첫째 장본인은 안승이고 둘째는 양길이고 셋째는 궁예지요. 삼국시대 전에도 마찬가지죠 5부의 고구려나 신라의 사로국이니 뭐니 하는 것들 백제에 많은 지역유지들까지.
까고 싶으면 호족들이나 까야지 고구려, 신라, 백제도 호족들이 다 말아먹은거지. 고려도 엄청나게 피똥쌌지요. 그리고 기벌포전투 지휘관이 김시득 장군인데, 고구려 부흥군 좋아하네
고구려역사를 설인귀 미친듯 미화한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으로 쳐보니 기벌포전투가 치졸한걸로 보이지
나무위키 펌
"그런데 양원왕 때 평양이 함락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해준 나라가 다름 아닌 신라였다.[19] 비록 밀약이 있었다고 추측되기는 하지만 한 때 고구려와 신라는 한번 손을 잡은 적이 있었다."
나무위키 펌
약간 문제점은 있지만 뭐 그럭저럭 읽을만하다.
옮겨 놓는다.
변명2라고 되어있는데 1은 원래 없다...
김부식을 위한 변명2
삼국사기에 대한 많은 오해에 대하여는 이미 기호철님께서 상세한 설명을
달았기 때문에 부연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만 학생분들의 오해의
정도가 깊어 몇마디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질문을 한 박경구님은 어느정도 의도적으로 삼국사기를 읽고 있습니
다. 다시 말하자면 선입견을 가지고 삼국사기를 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가령 김부식이 선덕여왕을 폄하했다라든가, 우리 고유 의상을 깎아 내렸다
는 등의 해석인데, 이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삼국사기에서 유교의 경전을
들어 암탉이 울면 나라가 위태롭다라는 이야기를 할 때 숱한 중국고사를 들
며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고황후 여씨니, 측천무후 무씨니 하고 기록한 것인데 이를 하늘의
이치로써 말한다면 곧 양은 강하고 음은 유하고, 사람으로써 말한다면 곧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은 것이니, 어찌 가히 여자의 몸으로 규방을 나와서
국가의 정사를 결단하랴?
이처럼 삼국사기는 선덕여왕의 일만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유교
경전에 입각해서 중국의 일까지 들어 잘못되었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점이 <사대주의>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요?
의복제도에 있어서도 우리 의상이 비루하다는 말을 한 바는 없습니다. 왜
그렇게 색안경을 쓰고 책을 읽는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또한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라고 부르는 것 역시 당시의 상황을 전혀 이해하
려고 하지 않는데서 비롯되는 일입니다. 알기 쉽게 비유를 들어봅시다.
삼국사기 잡지 제2 색복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신이 삼차나 상국에 奉使하였는데, 일체의 의관이 송나라와 다름이 없었다.
만일 이 구절을 가지고 김부식이 <민족의식>도 없이 송나라의 의복을 입고
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비뚤어진 시각입니다. 그렇다면 역대 대통령이 늘
양복을 입고 미국을 방문했으니 우리는 후손들에게 사대주의자라고 욕을 먹
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적은 책을 <성경>이라고 부르며
교회에 나가 <이스라엘의 주>를 찬양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이러한 신자들
을 사대주의자라고 부르지 않으며 신자들 역시 스스로를 사대주의자라고 말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교를 신봉한 신도인 <김부식>은 오늘날 왜 욕을
먹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니러니칼하게도 그 유교신도가 한민족의 역
사를 후손이 잃어버리지 않도록 편찬했다는 것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어서
야 무슨 공덕이 생긴다고 역사를 기록하게 되겠습니까?
김부식이 없었다면 한나라와 결전을 벌인 고구려의 명림답부, 유유, 밀우
등의 사적이 우리에게 어떻게 전해지겠습니까? 사대주의자이고 중국에 대해
서는 무조건 설설 기었다면 김부식이 무엇 때문에 이러한 사람들을 기록했
을까요?
여기에 사실은 삼국사기에 대한 커다란 오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즉 김부
식 및 편찬자들은 유교의 신봉자로서 유교의 관점에 의해 사서를 편찬한 것
인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삼국사기가 사대주의자에 의해서 사대주의적
관점에 의해서 편찬되었다고 믿고, 그 증거를 찾아볼 요량으로 이 책을 읽
어 봅니다(왜 우리 역사를 알아볼 생각으로 읽어보지 않습니까?).
그러면 두 관점은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을까요?
다음과 같이 설명드릴 수 있겠습니다.
1. 서술의 차이
사대주의자 - 사대에 맞춰 역사 왜곡을 서슴지 않는다.
유교주의자 -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술이부작의 원칙을 지킨다.
술이부작이라는 것은 있는대로 서술하고 고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김부식
은 백제본기의 말미에 이렇게 적어놓고 있습니다.
논컨대 신라고사에 이르기를 '하늘에서 금궤가 내려온 까닭으로 성을 김
씨라 했다'고 하니 이 말은 괴이하여 믿을 수가 없으나, 사신史臣이 수사修史할 때
옛날 그대로 전하여 그말을 깎아 없앨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태도가 바로 유교에 입각한 <술이부작>입니다.
2. 열전의 인물 고르기
사대주의자 - 중국에 충성한 인물을 고른다.
유교주의자 - 충효를 알릴 수 있는 인물을 고른다.
이 때문에 삼국사기 열전에는 중국과 대결을 한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김유신, 을지문덕, 명림답부, 계백 등등입니다. 을지문덕은 김유신 열전 바
로 뒤에 등장하며 이런 논찬까지 붙어 있습니다.
논컨대 수양제가 요동전역에 군사를 동원한 성황은 전고에 아직 보지 못
한 일이었다. 고구려는 한 편방의 작은 나라였으나 능히 이를 막아 스스로
국가의 안보를 도모하였을뿐만 아니라 적의 대군을 격멸시키기까지 했으니
이는 을지문덕 한사람의 힘이었다. 그러므로 경전에 말하기를 '군자가 없으
면 능히 그나라가 안전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믿을만한 말이다.
이렇게 을지문덕을 유교에서 최고의 인간을 가리키는 <군자>라는 말을 동원
해 칭찬하고 있습니다. 유교주의자는 가능하지만 사대주의자는 불가능한 대
목입니다.
사실 사대주의라는 것은 우리역사에 없는 신종용어인데 이 용어를 만든 이
는 바로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사대>는 있었지만
<사대주의>라는 것은 없었는데 일제식민사학자들이 우리 역사를 폄하하고자
만들어낸 용어인 것입니다. 이런 일제 잔재를 여지껏 물고 늘어지면서 스스
로 조상들을 깎아내리고자 눈에 불으 켜고 꼬투리를 잡을 대목을 위해 우리
역사서를 읽어내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당연히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보기는 커녕 비틀린 부분만을 커다랗게 과장해서 말하게 됩니다. 이
런 폐해가 계속 확대되어 나가고 있으니 참으로 가슴아픈 일입니다.
우리 역사를 통해 많은 유교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유교를 창시한 공자가
중국사람이고 그 뒤를 이은 맹자, 주자가 모두 중국인들이었습니다.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인도를 불교의 성지로 여기고, 이스라엘을 기독교의 성지로
여기며, 통일교 신도들이 한국을 성지로 여기며, 한번이라도 순례를 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유교 신도들이 중국을 성지로 여긴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
릅니다. 중세 유럽국가들은 교황의 명령이라면 꺼벅 죽고 대항할 엄두도 내
지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황제를 교황이 파문을 내려 쫓아낸 적도 있습니
다. 그런데도 서양의 역사를 사대주의의 역사라고 부르는 역사가는 없습니
다. 무슨 이유일까요?
불과 수십년전에 우리나라는 참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었습니다. 뭐라고 이
야기하든 한국전쟁과 그 이후의 어려운 시기에 미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생
존이 어려운 지경을 우리 윗세대는 거쳐 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이 그
세대에게는 참으로 자존심이 상하고 우리 민족의 역량에 대해서 회의를 가
지게 했습니다. 그렇게 민족이 어려움에 처할 때 위기를 넘기고자하는 참된
민족의식과 더불어 국수적인 민족의식도 발생합니다. 참된 민족의식과 달리
국수적인 민족의식은 진실을 가지고 말하지 않고 역사를 왜곡하고 재편함으
로써, 민족을 실제로는 위태로운 지경으로 이끌어 갑니다. 이러한 것은 바
로 <역사>가 증명하는 것입니다. 즉 1차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어려움에 처한
독일민족은 국수적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나찌즘에 빠져듭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인류 역사에 가장 참담한 전쟁, 그리고 학살이었습니다. 일본
역시 개방의 물결에 휩싸이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제국주의로 극복하고자 하
며 끝내는 대동아 전쟁,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인류역사에 유래가 없는 일
대 범죄국가로 전락합니다.
얼마 전에 모 잡지에서 본 컬럼에는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지은이는 지금
50대입니다.
기브 미 어 초컬릿을 외치면 미군 찌프를 쫓아다니던 기억이 생생한 나에
게 우리 민족이 사실은 그들이 아직 문명도 갖추지 못했던 시절에 광대한
영토를 호령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너무나 가슴벅찬 감동을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를 잘 알려 내 후손들에게는 언제나 자부심을 갖고 있게 해주고
싶다....
그런데 거짓된 기초에 의한 자부심은 갖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환단고기와
단기고사 등의 <사서>에 대해서는 제가 고대사 게시판에 사료비판이라는 이
름으로 만들어 둔 것이 있습니다. 꼭 읽어 보기를 권합니다.
123 이문영 nymphal 01/31 24 9 [의견] 재야사서 비판 (7)
122 이문영 nymphal 01/31 20 12 [의견] 재야사서 비판 (6)
121 이문영 nymphal 01/31 27 17 [의견] 재야사서 비판 (5)
116 이문영 nymphal 01/29 27 13 [의견] 재야사서 비판 (4)
115 이문영 nymphal 01/29 29 14 [의견] 재야사서 비판 (3)
114 이문영 nymphal 01/29 29 19 [의견] 재야사서 비판 (2)
113 이문영 nymphal 01/29 53 15 [의견] 재야사서 비판 (1)
이상으로 긴 이야기를 마칩니다. 제 이야기를 하나의 의견으로 생각해 주기
를 바랍니다. 인쇄되어 있다고 모든 것이 진리는 아니며, 제 이야기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마포에서
이문영
http://orumi.egloos.com/m/1523908
작성일 96/06/14 13:50
事大交隣과 事大主義
1. 글을 쓰면서
한사동의 각 게시판에 사대주의라는 용어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김부식이 사대주의자의 전형이라고도 하고, 역사학자들을 사대주의지
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희망하는 역사(?)와 반하는 것에 대해서
는 사대주의라고 쉽사리 규정합니다. 그러나, 사대라고 하는 말을 알고
사용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글을 작성하는 것은 잘못 알려진 사대(정
확한 표현은 사대교린입니다)에 대하여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리기 위해
서 입니다. 꼼꼼하고 자세한 글을 작성하지는 않습니다.
한사동의 게시판에서 사용하는 사대주의라는 것은 일본인들이 전통
한국 사회의 타율성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전통 한국 사회는 중국을 대국으로 섬기는 종속적인 것이고, 항상 강대
국에 대하여 복종했으므로, 당시의 강대국인 일본에도 복종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사대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도록 합니다. 조선시대
까지의 대외정책은 사대교린이었습니다. 즉 강대국인 중국의 각 왕조에
대해서는 事大의 관계를, 그 밖의 野人(여진), 倭(일본), 琉球 등에 대해
서는 交隣의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덴 이러한 사대교린을 사대의
관계에만 주목하고, 또한 事大를 단순히 '큰 나라를 섬긴다'라는 단순한
뜻으로 해석하여 외교에 있어서 주체성이 없는 것의 대명사로 사용하
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린은 주변의 제세력과 맺은 소극적인 대외 정책
으로 막연히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사대교린은 외교정책의 방법으로서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통용된 보편적인 외교 규범으로, 오히려 현실 대응의 합리성을 가진 외
교 정책입니다.
2. 사대는 현실적인 외교수단이다.
{左傳}에는 사대의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예라는 것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고(小事大),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돌보아 주는 것이다(大字小). 그리고 사대는 운명을 함께하는
것이며, 자소는 작은 나라를 돌보아 주는 것이다.
이것은 西周 時代의 역사적 산물입니다. 서주시대 각 제후들 간의 우
의와 결속을 위해 모색되었던 禮治사상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맹자에게서 종합되고 있습니다. 맹자의 한 구절을 봅니다.
제선왕이 묻기를 "이웃 나라와 사귀는 방법이 있습니까?"
맹자가 답하기를 "있습니다. 오직 어진 사람(仁)이라야 큰 나라로서
작은 나라를 섬길수 있으며, 오직 지혜로운 사람(智)이라야 능히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사람은 하늘의 이치를 즐거워하는 자요, 작
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사람은 하늘의 이치를 두려워하는 사람
이다. 하늘의 이치를 즐거워하는 사람은 천하를 보전하고, 하늘의 이치
를 두려워 하는 사람은 그 나라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
이러한 것들로 볼때 사대란 결국 대소국간의 힘의 불균형을 仁信智
라는 교린의 예를 통하여 유화시킨다는 상호공존의 외교규범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사대하는 이유는 곧 강대국
에 대한 힘의 열세를 대신하는 자국의 보전책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
다. 그러나 이러한 사대자소(事大字小)의 교린(交隣)의 예(禮)는 춘추전
국시대에 국가간에 약육강식의 패권 싸움이 난무하자, 강대국의 무력적
인 위협에 대응하여 일방적인 사대의 예가 요구되었고, 여기에는 필수
적으로 많은 헌상물을 수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것을 조빙사대(朝
聘事大)라고 하는데 조빙이란 조정에 나아가 문안을 드리는 예를 말하
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조빙사대의 관계는 이후 중국과 그 주변국 간의 동아시아
국제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조공(朝貢)과 책봉(冊封)이라는 독특한
외교형태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거은 중국과 주변국간의 외교 규범
으로써, 정치적 군사적 요인에 의해 조성되는 긴장관계를 완화하고 억
제하는 외교수단으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강대국의 입장에서 보면 이민족에 대한 기미정책(羈靡政策 : 기
미란 말의 굴레와 소의 고삐를 가리키는 말로 견제한다는 의미를 가진
다)에 의하여 주변국과의 교린을 도모하였고, 주변국은 자국의 안정을
위하여 조공과 책봉의 외교행위를 호국책으로 택한 것입이다. 대외정책
으로서의 기미의 뜻은 羈靡不絶而已(기미부절이이; 기미란 끊지 않을
뿐이다)라는 말로 표현된다. 즉 不絶(사신의 왕래에 의한 외교관계의
유지)할 뿐으로 而已, 즉 더 이상의 적극적인 조치(군사적 행위)를 취하
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빙사대와 기미정책의 원리는 한대 이후 우리나라 뿐이 아
니라 중국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동아시아 국
제관계의 외교규범으로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즉 우리나라나 일본은 물
론 만주, 몽고, 서장, 안남 및 중앙아시아 등지의 주변국이 모두 그러했
고 19세기 초 영국이나 프랑스 등의 유럽국가들이 중국과의 통상을 요
구할때에도 이 형식이 요구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볼때 전통 한국사회
의 사대는 중국의 기미정책에 대응하는 상호 공존의 교린정책이며, 자
국의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한 호국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
라서 우리나라가 취한 역대의 사대는 대륙과의 관계를 평화공존의 상
태로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의미를 갖는 지극히 현실적
이며 상황주의적인 대외인식임과 아울러 정책이었던 것입니다.
3. 사대와 교린은 중국과의 관계만이 아니다.
위에서 사대와 교린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위의 설명은 중국과
우리의 관계만이 설명되었으므로 아직도 체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중국을 제외한 여타의 나라들간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강대국인 중국에 대해서는 그들의 기미 정책
에 대응하여 조빙사대의 외교정책을 사용하였고, 중국을 제외한 우리의
주변국과는 교린의 정책을 사용하였습니다. 그 교린은 중국이 주변국에
하는 것과 유사한 방법으로 적례(敵禮: 서로 필적할 만한 상대에 대한
외교관계의 설정)적 교린을 사용합니다. 일본(倭)과 琉球에 그대로 적용
되었습니다.
이러한 관계가 설정되는 것은 조선 태종 4년입니다. 그것이 늦은 것
은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의 내부적 문제에서 파생되는 것입니다.
잘 알고 계시다시피 일본의 막부통치는 중앙집권이 이루어지지 않아
외교대상이 설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이전의 일본과의
교린정책은 중구과 조선이라는 단선적인 관계가 아닌 조선왕:足利將軍,
조선왕:諸大名, 조선왕:中小領主처럼 다원적인 관계로 설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우리의 입장에서 볼때는 일본을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
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혼란이 어느정도 수습되는 과정에
서 일본을 국가로 인정하고 동아시아의 예적 외교질서에 편입하고자
했던것이 태종 4년 무렵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고려말 왜구의 창궐이 심하였던 관계로 어려움을
겪은바 있었으므로, 일본의 통일과정에 대하여 조속한 국가의 인정으로
왜구를 제어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본과의 교린에 관해서 다음의 사료를 봅니다.
너희(왜) 왕이 교린을 돈독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일본의 사신)로 하
여금 바다를 건너오게 하였으니 내가(태종) 심히 기뻐하노라
({태종실록} 14년 7월 임오조)
내가(세종)..... 교린의 예를 중히 여겨, 특별히 사신을 (왜에) 보내어
서로 사귀며 서로간의 믿음과 의리를 알리고자 하노라.
({세종실록} 28년 9월 갑술조)
교린의 도는 (우리와 왜가) 왕래하지 않으면 안되는 교빙의 예절일
것이다. ({성종실록} 14년 9월 을묘)
이러한 것들로 볼때 교린은 예를 가지고 신의를 나타내는 것으로써
경제적 이익을 우선하거나 상대국에 위협을 주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과의 적례적 교린정책이 곧 대등한 관계는 아
닙니다. 한때 일본의 학자들은 대등한 관계라고 주장하였지만, 지금의
일본 학자들 마저도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상하관계로서 일본이 여진
이나 유구와 동등한 대우를 받았을 정도 였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
다. 유구나 여진과의 관계는 절대적인 상하관계입니다. 그들의 입장에
서 사대의 대상은 조선이고, 조선은 이에대해서 기미의 정책을 취합니
다. 그러나 일본과의 관계가 이들과 차이가 있는것은 그 지향점은 동등
한 관계에서의 적례관계였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일본의 내부사
정에 따라 잦은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4. 사대주의가 아니라 사대교린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부 한사동의 회원들께서 알고 있는 사대
주의는 사대교린을 잘못 알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대주의는 자기 비
하의 표현인 것입니다. 일본에서 "나는 한국인입니다"라고 하는것이 아
니고 "나는 죠센징입니다."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본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나는 쪽발이입니다."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대주의는 사대교린이라고 하여야하며, 그것은 외교정책의 한가지로
19세기 이전의 동아시아 전체에 해당하는 외교규범입니다. 그리고 우리
는 중국에 대해서는 조빙사대를 통한 국가적 안녕을 도모하고, 주변국
인 일본이나 여진 유구 등에게는 기미정책(회유책)을 통하여 또한 마찰
을 최소화하였습니다.
위와 같은 국력에 따른 상하관계의 설정은 지금의 입장에서는 쉽사
리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2000년 가까운 기간의
동아시아의 외교질서입니다. 이러한 사대와 교린을 통하여 적은 군대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부담이 적은 조용조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국가를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왕조들을 보면 그 지속성이 중국
등의 나라보다 2배 이상 깁니다. 조선도500년이 넘는 지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은 군대를 소유하고, 국가의 지출을 줄임으로
써 국민의 부담을 가볍게 하는 현실적인 정치를 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의 물결속에서는 무참히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고구려의 멸망도 이렇게 형성된 국제질서를 거부한 측면이 있습니다.
광개토왕비에 보이는 고구려의 천하관(華夷觀)에는 중국이 아니라, 고
구려를 세계의 중심(華)으로 보고 중국을 오랑캐(夷)로 보고자 했습니
다. 이것은 결국 내부적인 모순 구조를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
니다. 또한 수, 당 등의 국가와의 잦은 마찰을 초래하였던 것입니다. 신
라의 경우는 이러한 세계 질서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에 고려와 조선은 이러한 역사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만약에 이러했다면 어떠했을까"하는 식의 이야기를 많
이 합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역사에서는 추호도 허용되어서는 안되
는 것입니다. 역사는 인과적 설명입니다. 어떤한 사건에 대해서 그 요
인과 결과를 살피는 것입니다.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어떠했을
까?" 하는 형태의 것은 역사가 아니라 문학입니다. 카아(E.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표현대로 그것은 Might have been School에
불과 합니다.
역사는 현실에 대한 인식이지 공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http://orumi.egloos.com/m/258780
계속해서 글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