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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최고 명장 장보고에 대한 이야기.
Korea, Republic of 위선주의척결 0 751 2017-02-27 10:25:26

1. 탄생 및 성장기

845년 문성왕이 장보고張保皐의 딸을 왕비로 들이려 하자 신하들은 "바다 섬사람"의 딸을 왕비로 삼을 수 없다고 반대한다.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두고 있긴 했으나, 그가 본래 바다 섬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 열전에서 장보고의친구 정년鄭年(또는 鄭連)이 잠수로 50리를 갈 수 있었다는 대목 다음에 장보고는 그에게 미치지 못했다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도 그가 섬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렇다면 완도가 고향이었을 가능성 역시 높다고 하겠다.

장보고의 아명은 궁복弓福이었다.

두 사람은 수영과 싸움을 잘 했다는 것 말고 성장기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없다.

2. 당나라 시절
장보고와 정년은 모두 무령군武寧軍의 소장小將이 되었다. (이때 나이가 30세였다고 한다.) 기마와 창술에서 당할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무령군은 805년 편성되었으므로 장보고와 정년은 805년 이후에 당에 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장보고는 828년에 신라로 귀국한다. 805년부터 당에 있었다면 당에서 23년이라는 세월을 보낸 셈이다. 그들은 서주徐州로 들어갔다고 했는데, 지금의 강소성이다.

무령군의 주요 임무는 평로치청平盧淄靑, 즉 고구려 유민 출신인 이정기李正己(765~781)가 세운 반란세력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이 반란세력은 이정기 이후 이납李納(?~792), 이사고李師古(?~806), 이사도李師道(?~819)로 이어지고 있었으며 산동반도 일대를 장악하고있었다. 바로 이 산동반도 일대는 훗날 장보고의 세력 거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819년에 신라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평로치청의 이사도를 진압하기 위해서 당의 헌종은 819년에 신라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이에 신라는 순천군順天軍 장군 김웅원金雄元에게 3만의 군사를 주어 파병했다. 김웅원은 811년에 완산주 도독이었으므로 그가 이끌고 간 병력도 완산주의 병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장보고와 정년도 어쩌면 이 병력의 일원으로 당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자, 이제 이정기에 꽂힌 유사역사학 신봉자들은 장보고를 깔까?)

김웅원은 김유신의 후손으로 김유신행록을 지은 김장청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는 귀국 후 김헌창의 난을 진압하기도 한다.

평로치청이 무너지고 난 뒤 장보고와 정년은 어떻게 지냈을까? 장보고가 귀국 할 때까지 10년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군을 떠나게 된 되에는 정년의 질시가 한몫했던 것 같다.

정년은 장보고가 귀국한 뒤에도 당에 남아있었는데, 군에서 쫓겨나 굶주리고 추위에 떨게 되었다. 그러자 장보고를 찾아 귀국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옛 동료 장수 풍원규馮元規는 그가 장보고에게 죽을 것을 걱정한다. 그 이유로, 정년이 장보고를 배신했다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정년은 굶어죽거나 얼어죽느니 장보고와 싸워서 죽겠다며 귀국을 감행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장보고는 정년에 의해서 강제로 군복을 벗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때 정년이 있었던 사주泗州 연수현漣水縣은 강소성 회음현의 동북쪽에 위치한다. 여기에는 신라방이 있었다. 청해진의 도움으로 중국을 다녀온 일본 승려 엔닌은 이곳에서 장보고 휘하에 있던 청해진병마사 최훈崔暈을 만나기도 한다(장보고 사후 최훈은 이곳을 망명지로 선택한다). 정년이 이곳에 있었던 것은 군에서 물러난 후 신라방에서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겠다. 앞서 나왔지만 이곳이 처음 장보고와 정년이 당으로 들어온 곳이기도 하겠다.

엔닌의 기록에 의하면, 산동반도 끝부분인 문등현文登縣 청녕향淸寧鄕 적산촌赤山村에 적산법화원赤山法花院이 있는데, 장보고가 세운 것이라고 한다. 820년대에 세워졌을 것이다. 이 절은 매우 큰 절로 장보고 휘하의 장영張詠(신라통사新羅通使, 평로군절도동십장겸등주제군사압아), 임대사林大使, 왕훈王訓(촌장) 등이 경영했다. 이 절은 500석의 곡식을 거둘 수 있는 장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엔닌의 기록으로 장보고가 824년에 일본에 들러 지쿠젠(쓰쿠마에라고 읽는 경우도 있는데 지쿠젠이 맞음)[筑前]국國의 태수 오느쓰에 쓰쿠[小野末嗣]와 교분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신라 출신 승려 이신혜李信惠를 데려와 적산법화원에 두기도 했다. 이루 미루어 보아도 장보고는 이 시기에 이미 상당한 해상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3. 신라 귀국

신라는 이무렵 해적들에 의해 곤란을 겪고 있었다. 해적들은 신라인을 잡아서 노예로 팔고 있었기에, 헌덕왕의 왕자 김장렴金張廉은 당에 사신으로 와서 신라인 노비 매매를 단속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장보고는 무역상인으로서 자신의 입지만 가지고는 해적들과 맞설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그는 귀국하여 828년 헌덕왕을 만났을 때 바로 이 신라인 인신매매 근절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장보고는 완도를 근거지로 삼았는데, 이곳을 근거지로 삼은 것은 고향이라는 점이 작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당과 일본의 교통로라는 점이 더 큰 이유였을 것이다. 아마도 그가 이곳 출신이었다면 당으로 가는 무역선을 타고 고향을 떠났을 가능성도 클 것이다.

그가 828년 헌덕왕을 만났다고 해서 그때 귀국했을지는 사실 알 수 없다. 일개 야인이 갑자기 국왕을 만날 수는 없었을 것이고, 그 전부터 신라 왕실과 접촉이 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재벌과 정치권의 관계처럼. 따라서 청해진은 이미 완성되어 있고, 그에게 내려주었다는 일만의 병사도 사실은 그의 사병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전남 강진 등의 도자요도 청해진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까운 곳에 생산기지를 놓고 무역에 나섰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장보고는 당에는 매물사賣物使를 일본에는 회역사回易使를 파견했다. 매물사는 산동에서 유산포乳山浦, 해주海州, 초주楚州, 양주揚州를 다녔다. 엔닌의 기록에는 최훈 청해진병마사가 매물사로 온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에 간 회역사로는 이충李忠과 양원楊圓이 알려져 있다.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좀 뒤에 다시.

장보고는 황해와 남해를 장악한 무역상인이자 무력을 지닌 지방 군벌이기도 했다. 이무렵 신라 왕실은 혜공왕 이후 적손이 없어 왕위의 정통성이 흔들리고 있었다. 혜공왕 다음인 선덕왕은 내물왕의 10세손, 그 뒤를 이은 원성왕은 내물왕의 12세손이었다. 그 뒤의 소성왕은 원성왕의 손자였고 다음 대도 아들 애장왕으로 이어져 왕위가 안정되나 싶었는데, 삼촌(소성왕의 동생)이 쿠데타를 일으켜 헌덕왕이 되었다. 뒤를 이은 흥덕왕은 헌덕왕의 동생이었다. 왕위가 이처럼 형제 상속되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장보고가 돌아온 것은 바로 흥덕왕 때였고, 권신들은 모두 다음 왕위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흥덕왕이 죽자 내란이 일어났다. 이 내란에서 승리하여 왕이 된 이는 희강왕. 그러나 희강왕은 내란때 같은 편이었던 민애왕이 일으킨 쿠데타로 자살하고 만다.

이렇게 되자 희강왕과 싸워서 패했던 김우징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내란에서 져서 청해진으로 도망쳐 와 있던 그는 민애왕의 쿠데타를 알고 장보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장보고는 정년에게 군사 5천을 주어 김우징을 돕게 했다. 김우징은 평동장군 김양과 함께 서라벌로 진군했다. 이 전투에서 김양 밑에서 활약한 염장閻長, 낙금駱金, 이순행李順行, 장변張弁,장건영張建榮 등도 모두 장보고의 부하들일 가능성이 있다. (염장은 속일본기續日本紀에는 염장閻丈, 염문閻文으로 나오고 장보고의 부하로 되어 있다.)

839년 4월 2일 엔닌의 기록을 보면 신라와 장보고가 서로 싸우고 있다라고 나온다. 이 기록은 바로 장보고가 김우징을 도와서 민애왕과 싸운 것을 가리킨 것이다.

김우징은 병사를 빌리면서 싸움에 이기면 장보고의 딸을 태자비로 삼기로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약속을 신라 왕가가 지키지 않으면서 장보고와 청해진의 최후가 오게 된다.

4. 청해진의 최후

신라 왕실은 장보고와 맺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장보고는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무주별가武州別駕였던 염장이 장보고를 암살했는데, 장보고는 그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반증이 되지 않을까?

삼국사기에는 염장이 장보고를 암살한 뒤 청해진을 굴복시킨 것으로 나오지만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에는 장보고의 부하 이창진李昌珍이 청해진에서 반항했고 염장이 이를 토벌했다고 나온다. 신라 왕실은 장보고만 제거하면 청해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결과적으로는 신라 왕실의 예측이 옳았던 것이고. 물론 이런 짓이 황금알을 낳는 닭은 죽인 것이라는 점을 그들은 영영 몰랐을 것 같다.

회역사로 가 있던 이충과 양원은 귀국했다가 장보고의 피살을 알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염장은 이창진을 토벌한 후 이소정李少貞을 보내 그들을 소환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은 장보고가 죽은 것을 알자 물건을 압류해버렸다.

장보고가 언제 죽었는가에 대해서는 우리 기록과 일본 기록이 다르다. 삼국사기에는 846년 반란을 일으켰다가 염장에 의해서 암살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일본측 기록은 841년 11월경에 죽은 것으로 나온다.

이 문제가 왕비 책봉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면 841년이라는 것이 신빙성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842년에 이찬 위흔魏昕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고 한다. 장보고 문제를 해결한 뒤 혼인을 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당대 기록인 엔닌의 기록을 보면, 845년 7월 9일 청해진병마사 최훈을 만나는데, 그가 국난을 피해 연수현에 와 있다고 말하고 있다.만일 846년에 장보고가 죽은 것이라면 최훈이 피해있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또한 앞서 말한 회역사의 연대도 문제가 된다. 이들이 일본으로 돌아간 것이 842년이다.

이리하여 장보고가 죽은 청해진은 어떻게 되었을까? 엔닌은 846년 귀국하는데, 신라인 왕종王宗이 일본 쪽에서 보낸 서찰을 가지고 왔으며, 엔닌의 귀국을 돕는 신라인들이 여럿 등장한다. 신라인들이 당과 일본에 구축한 무역 라인은 여전히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그리고 바로 이런 점이 제2의 장보고가 등장할 수 있다는 걱정을 낳은 것 같다.

신라 조정은 851년 2월 청해진을 없애고, 그곳 사람들을 벽골군(김제)로 옮긴다. 아예 청해진을 없애버림으로써 후환을 끊은 것이다. 더불어 나라의 미래도 끊어버린 셈이었다.

출처 : 초록불의 잡학다식

http://orumi.egloos.com/4416586

 

신라 이것도 150년동안 왕이 20번이나 바뀌었다고 하니깐. 답이 없어도 답이 없네 10년도 못채우네.

내가 보기엔 신라초에 부족들을 완전히 복속시켜서 흡수하기보단 그거 생략하고 너무 많이 받아들였고, 또 고구려 멸망과 백제 멸망 이후에 고구려나 백제 유민들에 대해선 가릴건 가리고 안가릴건 안가리고 그게 아니라 걍 너무 많이 받아들인게 문제네 당장에 9서당도 그렇고

그냥 너그러움이 넘쳐서 아예 문어발 식으로 인사들을 받아들이니 저런 변고가 생기지. 이건 당장에 고구려나 백제도 그렇지 모. 호족들을 애초부터 너무 많이 받아들이다가 망한 고려도 그렇고, 조선도 신진사대부만 받아들여야 하는데 전직 권문세가 출신들까지 받아들이니 또 조선도 탈생기고.

 

참 비운의 장수다. 그냥 이건 빼박으로 신라가 잘못이다. 신라가 청해진을 받아들인건 좋은데 이걸로 왕이 너무 교체되니 신라도 없앴는데, 결국 신라는 이걸 없애서 문을 더 닫아버렸군.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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