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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장군은 백제인이 아니라 신라인인데 맡에 헛소리를 불라불라 나불나불 거리나
Korea, Republic of 위선주의척결 0 737 2017-03-13 13:07:47
삼국사기 장보고 열전

장보고(張保?)[『신라본기』에는 궁복(弓福)으로 되어 있다.]와 정년(鄭年)[년(年)은 연(連)이라고도 한다.]은 모두 신라 사람인데 그들의 고향과 조상은 알 수 없다. 두 사람 다 싸움을 잘하였는데, 정년은 또한 바다 밑으로 들어가 50리를 헤엄쳐 가도 숨이 차지 않았다. 그 날램과 씩씩함을 견주어 보면 보고가 연에게 좀 미치지 못하였으나, 연은 보고를 형으로 불렀다. 그러나 보고는 나이로, 연은 기예로 항상 맞서서 서로 지려고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당나라에 가서 무녕군(武寧軍) 소장으로 있을 때, 말을 달리고 창을 쓰는 데 있어서 대적할 자가 없었다.

그 뒤에 보고가 귀국하여 대왕(흥덕왕)에게 아뢰었다.
“중국을 두루 다녀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었습니다. 청해(淸海)에 진영을 설치하여 적들이 백성들을 약탈하여 서쪽으로 데려가지 못하게 하소서.”

청해는 신라 해로의 요지로 지금은 완도(莞島)라고 부른다. 대왕이 보고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청해에 진영을 설치하게 하니, 이후로는 해상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팔아먹는 자가 없어졌다.

보고는 이미 귀한 자리에 올랐으나, 정년은 직업을 잃고 사수(泗水)의 연수현(漣水縣)에서 춥고 배고프게 살았다. 하루는 수비하는 장수 풍원규(馮元規)에게 말했다.

“나는 동쪽으로 돌아가서 장보고에게 의탁하려 한다.”
원규가 말했다.
“그대는 보고와 사이가 어떠한가? 어찌하여 그곳에 가서 그의 손에 죽으려 하는가?”
정년이 말했다.
“굶어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싸우다가 통쾌하게 죽는 게 낫다. 더구나 고향에서 죽는다면 좋지 않겠는가?”
드디어 그곳을 떠나 장보고를 만났다.

정년이 보고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마음껏 즐기는데, 술자리가 끝나기도 전에 왕이 시해되어 나라가 어지러우며 임금이 없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보고가 군사 5천 명을 나누어 정년에게 주면서 그의 손을 잡고 울면서 말했다.

“그대가 아니면 나라의 화란을 평정할 수 없다.”

정년이 서울로 들어가 배반한 자를 죽이고 왕을 세웠다. 왕은 장보고를 불러 재상으로 삼고, 정년은 보고를 대신하여 청해를 지키게 하였다.[이는 신라의 전기와는 사뭇 다르지만, 두목(杜牧)이 지은 전기이므로 두 가지를 다 남겨둔다.]

張保?[羅紀作弓福]鄭年[年或作連] 皆新羅人 但不知鄕邑父祖 皆善鬪戰 年復能沒海底 行五十里不? 角其勇壯 保?差不及也 年以兄呼保? 保?以齒 年以藝 常齟齬不相下 二人如唐 爲武寧軍小將 騎而用槍 無能敵者 後 保?還國 謁大王曰 遍中國 以吾人爲奴婢 願得鎭淸海 使賊不得掠人西去 淸海 新羅海路之要 今謂之莞島 大王與保?萬人 此後 海上無?鄕人者 保?旣貴 年去職饑寒 在泗之漣水縣 一日 言於戍將馮元規曰 我欲東歸 乞食於張保? 元規曰 若與保?所負如何 奈何去取死其手 年曰 饑寒死 不如兵死快 況死故鄕耶 遂去謁保? 飮之極歡 飮未卒 聞王弑國亂無主 保?分兵五千人與年 持年手泣曰 非子不能平禍難 年入國 誅叛者立王 王召保?爲相 以年代守淸海[此與新羅傳記頗異 以杜牧立傳 故兩存之]

사관이 논평한다.
두목이 말하였다. “천보(天寶, 당 현종의 연호) 연간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 삭방절도사 안사순(安思順)은 녹산의 사촌동생이라는 이유로 사형당했고, 곽분양(郭汾陽)에게 그를 대신하라는 조서가 내려졌다. 열흘 후에는 다시 이임회(李臨淮)에게 조서를 내려, 부절(符節, 조정의 명령을 받았다는 증표)을 가지고 가서 삭방 군사의 절반을 나누어 동쪽 조(趙)ㆍ위(魏) 지방에 나가게 하였다. 사순 때는 분양과 임회가 모두 본진의 장수로 있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한솥밥을 먹으면서도 항상 서로 눈을 흘기고 한 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았었다.

분양이 사순을 대신하게 되자 임회는 도망하려 하였으나 미처 결행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임회에게 조서가 내려져 분양의 병력 절반을 나누어 동쪽을 토벌하라고 하였다. 임회가 들어가 분양에게 청하였다. ‘이 한 몸이 죽는 것은 실로 달게 받겠으나 처자식만은 죽음을 면하게 해주시오.’ 분양은 아래로 내려와 임회의 손을 잡고 당상으로 올라 마주 앉으며 ‘지금 나라가 어지러워 임금이 피난하였는데 그대가 아니면 동쪽의 적을 토벌할 수가 없소. 어찌 사사로운 원한을 생각할 때이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들은 작별할 때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충성과 의리로써 서로 격려하였으니, 큰 도적을 평정하게 된 것은 실로 두 사람의 힘이었다. 그 마음이 배반하지 않을 것을 알고, 그 재능이 일을 맡길 만한 것임을 안 뒤에라야 비로소 의심하지 않고 군사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평생토록 상대에게 분한 심정을 쌓고 있으면 상대의 마음을 알기 어렵다. 원한을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상대의 단점이 먼저 보이게 되므로 상대의 재능을 알아보기가 더욱 어렵다. 이 점에서는 장보고와 분양의 어짊에 차이가 없다.

정년이 보고에게 의탁할 때 틀림없이 ‘저 사람은 귀하게 되었고 나는 비천하니, 내가 자신을 낮춘다면 옛날의 원한 때문에 나를 죽이지는 않으리라.’라고 하였을 것이다. 보고가 과연 그를 죽이지 않았으니 이는 인지상정이오, 임회가 분양에게 죽기를 청한 것도 역시 인지상정이었다. 장보고가 정년에게 임무를 맡긴 것은 자신이 결정한 것이었다. 정년 또한 춥고 배고픈 처지였으므로 감동되기도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분양과 임회는 평생 대립하였으며 임회가 받은 명령은 천자가 결정한 것이니, 장보고와 비교하자면 곽분양이 조금 낫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성현들이 성패를 속단하지 못하는 대목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인의의 마음이 잡스런 감정과 함께 존재하여 잡스런 감정이 이기면 인의가 사라지고, 인의가 이기면 잡스런 감정이 사라지는 이치이다. 장보고와 곽분양 두 사람은 인의의 마음이 이긴 데다 현명함이 바탕을 이루었기 때문에 마침내 성공하였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을 백 대의 스승으로 일컫지만, 주공이 어린 임금을 끼고 돌 때 소공이 그를 의심했었다. 주공의 성스러움과 소공의 어짊으로 젊어서는 문왕(文王)을 섬기고, 늙어서는 무왕(武王)을 보좌하여 천하를 평정하였으나, 주공의 마음을 소공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만약 인의의 마음이 있다 할지라도 바탕에 현명함이 없다면, 소공도 이러한데 하물며 그보다 못한 사람들이야 어떠하겠는가?

옛말에 ‘나라에 군자 한 사람만 있으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무릇 나라가 망하는 것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망할 때에 어진 사람이 등용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실로 어진 사람이 등용된다면 한 사람으로도 족한 것이다.”

송기(宋祁)는 말하였다. “아아! 개인적인 원한으로 서로 해치지 않고 나라의 우환을 먼저 생각한 사람으로 진(晋)에 기해(祁奚)가 있고, 당에 곽분양과 장보고가 있었으니 누가 동이(東夷)에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인가?”

論曰 杜牧言 天寶安祿山亂 朔方節度使安思順 以祿山從弟賜死 詔郭汾陽代之 後旬日 復詔李臨淮 持節分朔方半兵 東出趙魏 當思順時 汾陽臨淮俱爲牙門都將 二人不相能 雖同盤飮食 常?相視 不交一言 及汾陽代思順 臨淮欲亡去 計未決 詔臨淮 分汾陽半兵東討 臨淮入請曰 一死固甘 乞免妻子 汾陽?下 持手上堂 偶坐曰 今國亂主遷 非公不能東伐 豈懷私忿時耶 及別 執手泣涕 相勉以忠義 訖平巨盜 實二公之力 知其心不叛 知其材可任 然後 心不疑 兵可分 平生積憤 知其心 難也 忿必見短 知其材 益難也 此保?與汾陽之賢等耳 年投保? 必曰 彼貴我賤 我降下之 不宜以舊忿殺我 保?果不殺 人之常情也 臨淮請死於汾陽 亦人之常情也 保?任年事 出於己 年且饑寒 易爲感動 汾陽臨淮平生抗立 臨淮之命 出於天子 ?於保? 汾陽爲優 此乃聖賢遲疑成敗之際也 彼無他也 仁義之心 與雜情?植 雜情勝則仁義滅 仁義勝則雜情消 彼二人 仁義之心旣勝 復資之以明 故卒成功 世稱周召爲百代之師 周公擁孺子 而召公疑之 以周公之聖召公之賢 少事文王 老佐武王 能平天下 周公之心 召公且不知之 苟有仁義之心 不資以明 雖召公尙爾 況其下哉 語曰 國有一人 其國不亡 夫亡國 非無人也 丁其亡時 賢人不用 苟能用之 一人足矣 宋祁曰 嗟乎 不以怨毒相甚 而先國家之憂 晋有祁奚 唐有汾陽 保? 孰謂夷無人哉


삼국사기 김양 열전

김양(金陽)의 자(字)는 위흔(魏昕)이니, 태종대왕(太宗大王)의 9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찬 주원(周元)이오, 할아버지는 소판 종기(宗基)요, 아버지는 파진찬 정여(貞茹)이니 모두 대대로 장군과 재상이었다. 양은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였다. 태화(太和) 2년, 흥덕왕 3년(서기 828)에 고성군(固城郡, 경남 고성) 태수가 되었으며, 얼마 안 있어 중원(中原, 충북 충주) 대윤(大尹)으로 임명되었다가 곧 무주(武州, 광주) 도독으로 전임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정치를 잘한다는 칭송을 들었다.

개성(開成) 원년(서기 836) 병진에 흥덕왕(興德王)이 돌아가시고, 물려받을 적장자가 없자 왕의 사촌동생 균정(均貞)과 다른 사촌동생의 아들 제륭(悌隆)이 서로 왕위를 이어받고자 다투었다. 이때 김양은 균정의 아들인 아찬 우징(祐徵)과 균정의 매부인 예징()과 함께 균정을 받들어 왕으로 삼고 적판궁(積板宮)에 들어가 사병으로서 숙위케 하였다. 그때 제륭의 일당인 김명(金明), 이홍(利弘) 등이 적판궁을 포위하였다. 양은 병사들을 궁문에 배치하여 그들을 막으면서 말했다.
“새 임금이 여기 계시는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이처럼 흉악하게 거역하느냐?”

그는 드디어 활을 당겨 십여 명을 쏘아 죽였는데 제륭의 부하 배훤백(裴萱伯)이 양을 쏘아 다리를 맞혔다. 균정이 말했다.
“저들은 숫자가 많고 우리는 적어 막을 수 없는 형편이니 공은 물러나는 체하여 뒷날을 도모하시오!”

김양이 이에 포위망을 뚫고 나와서 한기(韓岐)[한기(漢祈)라고도 한다.] 저자에 이르렀는데, 균정은 반란군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양은 하늘을 향해 부르짖으며 해를 두고 복수를 맹세하고, 산야에 숨어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金陽字魏昕 太宗大王九世孫也 曾祖周元伊飡 祖宗基蘇判 考貞茹波珍飡 皆以世家爲將相 陽生而英傑 太和二年 興德王三年 爲固城郡太守 尋拜中原大尹 俄轉武州都督 所臨有政譽 開成元年丙辰 興德王薨 無嫡嗣 王之堂弟均貞 堂弟之子悌隆 爭嗣位 陽與均貞之子阿飡祐徵均貞妹壻禮徵 奉均貞爲王 入積板宮 以族兵宿衛 悌隆之黨金明利弘等來圍 陽陳兵宮門 以拒之曰 新君在此 爾等何敢兇逆如此 遂引弓射殺十數人 悌隆下裴萱伯 射陽中股 均貞曰 彼衆我寡 勢不可飡 公其佯退 以爲後圖 陽於是突圍而出 至韓?[一作韓祇]市 均貞沒於亂兵 陽號泣旻天 誓心白日 潛藏山野 以俟時來

개성(開成) 2년(서기 837) 8월, 전 시중 우징(祐徵)이 남은 병사를 수습하여 청해진(淸海鎭, 완도)으로 들어가 대사 궁복(弓福, 장보고)과 결탁하고 불구대천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양은 이 소식을 듣고 참모와 병졸들을 모집하여 3년(서기 838) 2월에 청해진으로 가서 우징을 만나 함께 거사할 것을 모의하였다. 3월에 정예병 5천을 거느리고 무주를 습격하여 성 밑에 다다르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그들은 계속 진군하여 남원(南原)에 이르러 신라군과 마주 싸워 이겼다. 우징은 군사들이 오랫동안 싸우느라 피로했다 하여 다시 청해진으로 돌아가 군사를 휴양하도록 하고 말들을 잘 먹였다.

겨울에 혜성이 서쪽 방향에 나타났는데 광채 나는 꼬리가 동쪽을 가리키니 여러 사람들이 축하하며 말했다.
“이는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펴며,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을 좋은 징조이다.”

김양은 평동장군(平東將軍)이라 칭하고 12월에 재차 출동하였는데 김양순(金亮詢)이 무주(鵡洲) 군사를 거느리고 왔고, 우징이 또한 날래고 용맹한 염장(閻長)ㆍ장변(張弁)ㆍ정년(鄭年)ㆍ낙금(駱金)ㆍ장건영(張建榮)ㆍ이순행(李順行) 등 여섯 장수를 시켜 병사를 통솔하니 군대의 기세가 매우 왕성하였다. 북을 치며 행군하여 무주 철야현(鐵冶縣, 전남 나주) 북쪽에 도착하니, 신라 대감 김민주(金敏周)가 군사를 이끌고 대항하였다. 장군 낙금과 이순행이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상대 군중으로 돌입하여 거의 다 죽이거나 다치게 했다.

至開成二年八月 前侍中祐徵 收殘兵 入淸海鎭 結大使弓福 謀報不同天之讐 陽聞之 募集謀士兵卒 以三年二月 入海 見祐徵 與謀擧事 三月 以勁卒五千人 襲武州 至城下 州人悉降 進次南原 ?新羅兵 與戰克之 祐徵以士卒久勞 且歸海鎭 養兵?馬 冬 彗?見西方 芒角指東 衆賀曰 此除舊布新 報寃雪恥之祥也 陽號爲平東將軍 十二月再出 金亮詢以鵡洲軍來 祐徵又遣驍勇閻長張弁鄭年駱金張建榮李順行六將統兵 軍容甚盛 鼓行至武州鐵冶縣北州 新羅大監金敏周 以兵逆之 將軍駱金李順行 以馬兵三千 突入彼軍 殺傷殆盡

4년(서기 839) 정월 19일, 김양의 군사가 대구(大丘)에 도착하자 왕(민애왕)이 병사를 보내 항거하였다. 양의 군대가 이들에 맞서 싸우니 왕의 군대가 패배하여, 생포되거나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때에 왕이 허둥지둥 도망하여 이궁(離宮, 별궁)으로 갔으나 병사들이 찾아내어 죽여버렸다. 양이 이에 주위의 장군에게 명하여 기병들을 인솔하게 하고 군령을 내렸다.

“이 싸움은 본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그 수괴가 죽었으니 의관(衣冠, 상류층)과 남녀 백성들은 각자 안심하고 살 것이며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
그가 드디어 왕성을 수복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

김양이 훤백을 불러 말했다.
“개는 저마다 제 주인이 아니면 짖는 법이다. 너는 네 주인을 위하여 나를 쏘았으니 의사(義士)로다. 내가 괘념치 않을 것이니 너는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여러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말했다.
“훤백에게도 저렇게 하니 나머지야 무슨 걱정이랴.”
그들은 감복하며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4월에 왕궁을 깨끗이 정리하고 시중 우징을 맞아들여 왕위에 오르게 하니, 이가 바로 신무왕(神武王)이다. 신무왕이 7월 23일에 돌아가시고 태자가 왕위를 이으니, 이가 문성왕(文聖王)이다. 양의 공로를 추가로 기록하여 소판 겸 창부령을 제수하고, 다시 시중 겸 병부령으로 전임하였다. 당에서 예방하고 공에게 검교위위경(檢校衛尉卿)을 제수하였다.

四年正月十九日 軍至大丘 王以兵迎拒 逆擊之 王軍敗北 生擒斬獲 莫之能計 時 王顚沛逃入離宮 兵士尋害之 陽於是命左右將軍領騎士 徇曰 本爲報讐 今 渠魁就戮 衣冠士女百姓 宜各安居 勿妄動 遂收復王城 人民案堵 陽召萱伯曰 犬各吠非其主 爾以其主射我 義士也 我勿校 爾安無恐 衆聞之曰 萱伯如此 其他何憂 無不感悅 四月淸宮 奉迎侍中祐徵卽位 是爲神武王 至七月二十三日 大王薨 太子嗣位 是爲文聖王 追錄功 授蘇判兼倉部令 轉侍中兼兵部令 唐聘問 兼授公檢校衛尉卿

대중(大中) 11년(서기 857) 8월 13일에 김양이 자기 집에서 죽으니 향년 50세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대왕은 애통해하며 서발한을 추증하고, 부의와 장사를 모두 김유신의 전례에 따랐다. 그해 12월 8일에 태종대왕의 능 곁에 묻었다.

김양의 사촌형 흔(昕)은 자가 태(泰)이며 아버지 장여(璋如)는 벼슬이 시중 파진찬에 이르렀다. 흔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장경(長慶) 2년(서기 822)에 헌덕왕(憲德王)이 당에 사신을 보내려 했으나 적당한 사람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김흔을 추천하며 ‘이는 태종의 후예로 정신이 밝고 빼어나며, 도량이 깊고 침착하니 뽑아 보낼 만하다.’라고 하므로 드디어 그를 당에 들여보내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그가 한 해 남짓 당에 있다가 돌아가기를 청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금자광록대부시태상경(金紫光祿大夫試太常卿)을 제수하였다.

그가 귀국하자 국왕은 그가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하여 특별히 남원(南原) 태수를 제수하였다. 그 후 여러 번 자리를 옮겨 강주(康州) 대도독이 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이찬 겸 상국 벼슬이 더해졌다.

大中十一年八月十三日 薨于私第 享年五十 訃聞 大王哀慟 追贈舒發翰 其贈賻殮葬 一依金庾信舊例 以其年十二月八日 陪葬于太宗大王之陵 從父兄昕 字泰 父璋如 仕至侍中波珍飡 昕幼而聰悟 好學問 長慶二年 憲德王將遣人入唐 難其人 或薦昕太宗之裔 精神朗秀 器宇深沈 可以當選 遂令入朝宿衛 歲餘請還 皇帝詔授金紫光祿大夫試太常卿 及歸 國王以不辱命 擢授南原太守 累遷至康州大都督 尋加伊飡兼相國

그는 개성(開成) 기미 윤 정월(서기 839)에 대장군이 되어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대구에서 청해진의 병사를 막다가 패하였다. 그는 자신이 전쟁에서 패하였고 또한 전사하지도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소백산(小白山)에 들어가 갈옷을 입고 나물밥을 먹으며 중들과 함께 지내다가 대중 3년(서기 859) 8월 27일에 병으로 산막에서 죽으니 향년 47세였다. 그해 9월 10일에 내령군(奈靈郡) 남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들이 없어서 그의 부인이 상사(喪事)를 주관하였는데, 그녀는 후에 비구니가 되었다.

開成己未閏正月 爲大將軍 領軍十萬 禦淸海兵於大丘 敗績 自以敗軍 又不能死綏 不復仕宦 入小白山 葛衣蔬食 與浮圖遊 至大中三年八月二十七日 感疾終於山齋 享年四十七歲 以其年九月十日 葬於奈靈郡之南原 無嗣子 夫人主喪事 後爲比丘尼


민애왕(閔哀王)이 왕위에 올랐다.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명(明)이다. 원성대왕의 증손이다. 대아찬 충공(忠恭)의 아들로, 여러 관직을 거쳐 상대등이 되었고, 시중 이홍(利弘)과 함께 임금을 핍박하여 죽이고 스스로 임금이 되었다. 아버지를 선강대왕(宣康大王)으로 삼아 추존하고, 어머니 박씨 귀보부인(貴寶夫人)을 선의태후(宣懿太后)로 삼았고, 아내 김씨를 윤용왕후(允容王后)로 삼았다. 이찬 김귀(金貴)를 상대등으로 삼고, 아찬 헌숭(憲崇)을 시중으로 삼았다.

2월, 김양(金陽)이 병사들을 모집하여 청해진(淸海鎭)으로 들어가 우징(祐徵)을 알현하였다. 아찬 우징은 청해진에 있으면서 김명(金明)이 왕위를 빼앗았다는 소문을 듣고 청해진 대사 궁복(弓福, 장보고)에게 말하였다.

“김명은 임금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고, 이홍은 임금과 나의 아버지를 죽였으니, 그들과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습니다. 원컨대 장군의 병사들을 빌려 임금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궁복이 말하였다.
“옛사람의 말에 ‘정의를 보고도 행동하지 않는 자는 용기 없는 자’라 하였으니, 내 비록 용렬하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마침내 병사 5천을 나누어 그의 친구인 정년(鄭年)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그대가 아니면 이 환란을 평정하지 못하리라.”

겨울 12월, 김양이 평동장군이 되어 염장(閻長)ㆍ장변(張弁)ㆍ정년ㆍ낙금(駱金)ㆍ장건영(張建榮)ㆍ이순행(李順行)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무주(武州) 철야현(鐵冶縣)에 도착하였다. 임금은 대감 김민주(金敏周)에게 군사를 내어 맞아 싸우게 하였다. 김양이 낙금과 이순행을 시켜 기마병 3천으로 돌격하게 하였는데, 적을 거의 모두 살상하였다.

閔哀王立 姓金氏 諱明 元聖大王之曾孫也 大阿飡忠恭之子 累官爲上大等 與侍中利弘 逼王殺之 自立爲王 追諡考爲宣康大王 母朴氏貴寶夫人爲宣懿太后 妻金氏爲允容王后 拜伊飡金貴爲上大等 阿飡憲崇爲侍中 二月 金陽募集兵士 入淸海鎭 謁祐徵 阿飡祐徵在淸海鎭 聞金明簒位 謂鎭大使弓福曰 金明弑君自立 利弘枉殺君吾父 不可共戴天也 願仗將軍之兵 以報君父之? 弓福曰 古人有言 見義不爲 無勇 吾雖庸劣 唯命是從 遂分兵五千人 與其友鄭年 曰 非子 不能平禍亂 冬十二月 金陽爲平東將軍 與閻長張弁鄭年駱金張建榮李順行統軍 至武州鐵冶縣 王使大監金敏周出軍迎戰 遣駱金李順行 以馬軍三千突擊 殺傷殆盡

2년(서기 839) 봄 윤 정월, 김양의 군사가 밤낮으로 행군하여 19일에 달벌(達伐, 대구)의 언덕에 당도하였다. 임금은 김양의 군사가 도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찬 대흔(大昕)과 대아찬 윤린(允璘)ㆍ의훈(?勛) 등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막도록 하였다. 김양의 군사가 또 한 차례 싸움에 크게 이겨서, 임금의 군사 중에는 죽은 자가 절반이 넘었다. 이때 임금이 서쪽 교외의 큰 나무 밑에 있었는데, 측근들이 모두 흩어지고 혼자 서서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월유(月遊)의 집안으로 도망하였으나, 병사들이 찾아내어 죽였다. 여러 신하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 지내고, 시호를 민애(閔哀)라 하였다.

二年 春閏正月 晝夜兼行 十九日 至于達伐之丘 王聞兵至 命伊飡大昕大阿飡允璘?勛等 將兵拒之 又一戰大克 王軍死者過半 時 王在西郊大樹之下 左右皆散 獨立不知所爲 奔入月遊宅 兵士尋而害之 群臣以禮葬之 諡曰閔哀



七年 春三月 欲娶淸海鎭大使弓福女爲次妃 朝臣諫曰 夫婦之道 人之大倫也 故夏以塗山興 殷以?氏昌 周以褒?滅 晉以驪姬亂 則國之存亡 於是乎在 其可不愼乎 今 弓福 海島人也 其女豈可以配王室乎 王從之 冬十一月 雷 無雪 十二月朔 三日?出

8년(서기 846) 봄, 청해(淸海)의 궁복이 그의 딸을 왕비로 받아주지 않은 것을 원망하여 청해진에 근거지를 두고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그를 토벌한다면 생각하지도 못한 후환이 있을 것이 염려스럽고, 그를 그대로 두자니 그 죄를 용서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근심하였다. 무주 사람 염장(閻長)은 용감하고 힘이 세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가 와서 말하였다.

“조정에서 다행히 저의 요청을 들어 주신다면, 저는 한 명의 졸개도 없이 그저 빈주먹만 가지고 궁복의 목을 베어 바치겠습니다.”
임금이 그의 말을 따랐다.

염장은 거짓으로 나라를 배반한 척하고 청해진에 투항하였다. 궁복은 힘센 장사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를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면서 함께 술을 마시고 매우 기뻐하였다. 마침내 궁복이 술에 취하자 염장은 궁복의 칼을 빼앗아 목을 벤 후에 그의 무리를 불러 달래니, 무리들이 엎드려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八年 春 淸海弓福怨王不納女 據鎭叛 朝廷將討之 則恐有不測之患 將置之 則罪不可赦 憂慮不知所圖 武州人閻長者 以勇壯聞於時 來告曰 朝廷幸聽臣 臣不煩一卒 持空拳 以斬弓福以獻 王從之 閻長佯叛國 投淸海 弓福愛壯士 無所猜疑 引爲上客 與之飮極歡 及其醉 奪弓福劒斬訖 召其衆說之 伏不敢動

9년(서기 847) 봄 2월, 평의전(平議殿)과 임해전(臨海殿)을 중수하였다.
여름 5월, 이찬 양순과 파진찬 흥종(興宗) 등이 반역을 일으켜 처형하였다.
가을 8월, 왕자를 왕태자로 책봉하였다.
시중 김여가 죽었기에, 이찬 위흔을 시중으로 삼았다.


九年 春二月 重修平議臨海二殿 夏五月 伊飡良順波珍飡興宗等叛 伏誅 秋八月 封王子爲王太子 侍中金茹卒 伊飡魏昕爲侍中

10년(서기 848)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시중 위흔이 사직하였다. 파진찬 김계명(金啓明)을 시중으로 삼았다.
겨울 10월, 하늘에서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났다.

十年 春夏旱 侍中魏昕退 波珍飡金啓明爲侍中 冬十月 天有聲如雷

11년(서기 849) 봄 정월, 상대등 예징이 죽었기에 이찬 의정(義正)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가을 9월, 이찬 김식(金式)과 대흔(大昕) 등이 반역을 하였기에 처형하였다. 대아찬 흔린(昕?)이 이에 연루되어 역시 처벌되었다.

十一年 春正月 上大等禮徵卒 伊飡義正爲上大等 秋九月 伊飡金式大昕等叛 伏誅 大阿飡昕?緣坐罪

12년(서기 850) 봄 정월, 토성이 달에 들어갔다. 서울에 흙비가 내렸으며,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사형수 이하의 죄수를 사면하였다.

十二年 春正月 土星入月 京都雨土 大風拔木 赦獄囚誅死已下

13년(서기 851) 봄 2월, 청해진(淸海鎭)을 없애고, 그곳 사람들을 벽골군(碧骨郡, 전북 김제)으로 옮겼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당나라에 들어갔던 사신 아찬 원홍(元弘)이 불경과 부처의 치아 사리를 가지고 왔다. 임금이 교외로 나가 그를 맞이하였다.

역사 기록만봐도 빼박 신라인인데 그 사람이 백제인이면 김헌창의 난에선 왜 하나도 안보이냐?

 

장보고 백제설은 내가 논파해줄거니 한번 들고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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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해진 ip1 2017-03-14 02:41:35
    주활동 지역이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지역이므로 백제인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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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선주의척결 ip2 2017-03-14 08:12:19
    반란을 일으킨 김헌창의 주 활동지도 옛 백제의 땅이므로 백제인이라고 볼수 있지요
    정작 김헌창은 신라골품귀족 출신이죠. 더구나 김헌창은 현 충청지역까지도 먹었죠.활동지는 청주구요

    다시 말하지만 장보고 장군은 신라인이며 청해는 신라소속입니다. 그리고 전라남도 완도는 과거에 백제 이전에 벽랑국이라는 나라가 있었죠. 하지만 삼국사기에선 별반 다루지도 않죠. 저 삼국사기 내용을 부정하고 엎어버리고 싶으면 먼저 장보고 장군의 조상과 출생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장보고 장군의 본관, 출생지 기타 등등까지. 한간에 인동장씨에선 장보고를 조상으로 인정합니다만 이는 가설과 추측일 뿐이죠.

    근데 웃긴게 벽랑국, 건마국, 침미다례같은 나라가 전라도가 아닌 백제의 일원이라고 떠드는데 그 벽랑국, 건마국, 침미다례가 백제라는 존재가 없어지면 뭐 굉장이 쪽팔리고 수치스럽고 챙피스럽나봐요? 가야도 김수로왕을 추켜세우고 탐라는 아예 신라와 고구려 백제에 못지않다고 하던데. 벽랑국, 건마국, 침미다례가 그렇게 수치스럽고 챙피한가보군요. 벽랑국, 건마국, 침미다례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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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ㅋㅋㅋ ip3 2017-03-14 21:37:21
    개소리는 그만하세요.

    애초 장보고는 중국에서 돌아온 장백익 아들입니다.(신라핏줄과 무관함)

    당시 장씨는 부여계 성씨이며 비류백제 시절에 주산군도 등 중국으로 건너간

    대륙백제 후손입니다.

    아직도 중국 동남부 연안에 백제계 장씨가 많습니다.

    유명한 백제성씨중 화씨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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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선주의척결 ip2 2017-03-14 22:30:02
    저 김부식이라는 사람이 당서도 미친듯 뒤적뒤적해도 장보고 조상 못찾았는데 뭔 헛쇠리냐
    중국 동남부 장씨성가진 짱깨들이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이야? 난 조선족 새끼들도 우리나라놈으로 취급안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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