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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의 완전분석
차르 0 266 2006-06-11 16:07:47
완전 분석 여운형


여운형씨에 대하여 한가지 석연치 않은 점은 공산주의자였던 그가 어떻게 조선총독부와 가까운 사이를 유지할 수 있어느냐 하는 점이다. 일본 경찰이 공산주의자들 중 피라미만 체포하고 공산주의 거두들은 받들어 모셨던 것일까? 아니다. 아래 나열된 이유들이 여운형이 조선인 중에서 총독부의 특별 대우를 받았던 인물이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러면 일제말기에 그가 보여준 부일행적들의 사례들을 몇 개만 들어보자.

1. 1934년 3월에 발회한 '조선대아세아협회' 상담역으로 재직하였다.

- '조선대아세아협회'는 아세아의 대세와 시국의 진상을 규명하며 황국대일본과 아세아제국과의 친선을 도모하고 전 아세아제국의 평화 및 공존공영의 실을 거(擧)하여 그 복지를 증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단체이다.

2. 1935년 '조선교화단체연합회'의 발회식에 내빈으로 참여하여 찬조연설을 하였다.

- '조선교화단체연합회'란 조선에 있어서의 교화사업의 진흥보급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설립되어 유도진흥회, 향약, 부인회, 수양단 등 각파 종교단체를 총망라한 조직으로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과 학무국장을 정. 부회장으로 하는 명백한 친일단체이다.
교화사업이라함은 우가끼(宇垣一成) 총독의 심전(心田)개발운동과 표리일체가 됨으로써 1920년대의 일선융화론을 내선일체. 황민화운동으로 몰고가는 가교 역할을 한 전신적 동화정책을 말한다. 이 단체는 일제 말기 부인계몽독려반과 같이 적극적 학병동원, 전쟁 군수품 및 물자동원의 최전방에 나서서 조선민중을 착취한 악명높은 단체이기도 하다.


3. 1940년 동경으로 건너 가 육군성 다나카 소장, 우익정객인 오오카와, 고노에 등을 만나 일제의 괴뢰정권 수반인 중국의 왕정위를 도와 장개석과의 화평교섭을 해줄 것을 권유받고 허락한다.
침략전쟁의 제1선에서 일제를 도와 그들의 이용물이 되기를 자청한 것이다.
미군정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1938년부터 1945년까지 8차~12차에 걸쳐 일본을 방문하여 토조 내각수상, 고이소 대장, 우가키 전 총독과 걋?일본 최고위 관료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러시아와 일본간의 막후교섭, 중국과의 화평교섭에 중개역할을 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4. 1943년 7월 경성일보에 여운형의 명의로 세번에 걸친 "학병권유" 논설을 기고하였다.

이 무렵 일제에 전향서를 제출하고 황국식민서사를 한다.

5. 친일단체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으로 등재된 사실을 알고서도 이를 묵인하였다.

(註 : 김승학 著 "친일파군상", 정경문화사)

6. 1945년 일본의 아베 총독으로부터 약 2,000만엔에 달하는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고 정권이양교섭에 동의한다.

아베 조선 총독은 패전이 확실해지자 일본의 항복과 함께 발생할지도 모를 재한일본인의 재산 및 생명 보호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고 향후 원만한 한일관계를 위해 신망있는 한국의 민족지도자와 손을 잡고자 했는데 고하 송진우 선생이 이를 거절하자 여운형이 그 제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는 해방 후 우익진영으로부터 공격의 빌미가 되었다.

( 註: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2, 1945, 9, 10.)

김동인이 해방 후에 쓴 회상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 어떤 날 거리에 나가 보니, 거리는 방공(防空) 연습을 하느라고 야단이고, 소위 민간유지들이 경찰의 지휘로 팔에 누런 완장을 두르고 고함지르며 싸대고 있었다. 몽양 여운형은 그런 일에 나서서 삥삥 돌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날도 누런 완장을 두르고 거리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 나는 한심스러이 그의 활보하는 뒷모양을 바라보았다.>

이렇듯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그가 이룬 업적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적으며 그저 웅변술이 뛰어난 정객에 불과했다.

그가 실제로 행동으로 보여 준 것은 일본의 패망이 거의 확실해 져 갈 무렵 해방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 조선건국동맹을 건설했다는 것 하나밖에 없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독립 후의 조선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기 위해 정치세력연합을 결성하고자 하는 의도였으므로 순수성을 상당히 결여했다고 보여진다.

그는 정치적인 고려와 처세로서 이북의 김일성 앞에서는 스탈린 만세를.. 우익들 앞에서는 민족 대단결을 주장한 전형적인 뻐꾸기 짓을 서슴지 않았으며 결정적으로 그는 신탁통치 반대에서 찬성으로 돌변하는 해괴한 변절을 함으로써 조선 민중에게 자신이 얼마나 기회주의적인지 스스로 강변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박정희와 여운형 중 누가 진짜 친일파인가? 노무현은 친일 기업인 김지하로부터 부일장학금을 받았는데, 그 "부일"이란 뜻이 일본을 부강하게 하자는 뜻이었다. 그리고 노무현이 훈장을 수여한 여운형이 친일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었다. 요즘 노빠들의 친일 청산 논리의 잣대를 그대로 적용한다면 여운형은 거물급 친일파였다. 그러나 노빠들이 아무리 들추어도 박정희는 깨끗했다는 증거만 발견될 뿐이다. 조선인 청년들이 모두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거나 자원 입대하던 시절에 박정희는 제3국 만주국군 소위로 5개월 복무한 후 광복군 중대장을 지낸 독립운동가였다.

요즘 열우당이 태평양전쟁 보상법을 만들어 일제시대에 일본군에 자원 입대하였던 이들에게 보상을 할 모양인데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일본군에 자원 입대하였던 이들이야말로 친일파들에 가까웠던 이들이었다. 그리고, 박정희가 몇개월 군관으로 복무하였던 만주국 군대는 군대 행정상 일본군과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그렇다면, 친일 장학금인 부일 장학금을 받아 변호사가 되고 대통령이 된 노무현이 진짜 친일파 여운형에게는 서훈하고 전혀 친일 행적의 사실이 없는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파로 몰아 척결하려는 노무현의 꼼수는 친일 청산 논리인가 아니면 친일 논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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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옹호측 반론

인터넷 신문 에 는 고민철씨의 글이 실렸다.



문제 제기자인 고민철씨는 여운형 선생의 친일행적의 근거로 김승학의 , 임종국의 . 그리고 미군정 자료인 USAFIK 등을 사료로 제시했다. 그가 나름대로 객관성을 갖추려는 노력을 보인 점에 대해서는 평가하고 싶다.

그러나 제시된 자료들은 제1차적인 사료가 아니라, 저술자의 주관이 들어간 2차 사료라는데 우선 문제점이 있다. 더구나 미군정의 USAFIK에 실린 김동인의 회상기는 여운형 선생에 대한 김동인의 주관적인 회상기이기 때문에 사실을 규명하는 사료적 가치는 없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고민철씨가 제시한 여운형 선생의 친일행적에 대한 근거를 다음과 같이 반론하고 싶다.

우선 고민철씨는 임종국의 이라는 저서를 근거로 여운형 선생의 친일행적을 다음과 같이 적시했다.

1. 1934년 3월에 발회한 '조선대아세아협회' 상담역으로 재직했다.
2. 1935년 '조선교화단체연합회'의 발회식에 내빈으로 참여하여 찬조연설을 했다.

여운형 선생은 1929년도에 일경에게 상해에서 체포되어 1932년까지 대전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그리고 고민철씨가 제시한 여운형 선생의 친일행적은 1934년도와 1935년도의 것으로 되어 있다. 친일파 연구자로 이름 있던 임종국씨의 저서이니만큼,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 그러한 기사를 보고 그런 글을 썼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규명함에 있어서는 그런 단편적인 기사나 단순 논리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1934년과 1935년은 여운형 선생이 사장으로 재직하던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신문사 사장 쯤 되면 여러 단체의 장을 맡으라거나, 내빈으로 초대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신문사도 하나의 사업체인 이상, 이 사업체를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피치 못해 이름을 빌려주거나 또는 행사에 참석하여 연설을 할 경우도 있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단순히 어떤 단체에 이름이 올랐다거나 행사에 참석하여 연설을 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실제로 무슨 일을 했으며, 어떤 내용의 연설을 했느냐 하는 점이다. 더구나 중요한 점은 그 시기를 전후하여 당사자가 단순한 행사 참석 이외에 실제로는 어떤 행동을 취했느냐 하는 점을 아울러 살펴보아야 한다.




여운형 선생이 사장으로 있던 는 1932년 이후 의식 있는 기자들을 채용하여, 그 기사와 논조가 가장 민족적이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여운형 선생은 1935년도에 우리 민족의 영웅인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묘소재건을 추진했으며, 조동호, 양하석을 해외로 탈출시키려다 신의주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취조를 받았고, 또 상해임정의 김구 선생 모친인 곽낙원(郭樂園)과 아들 김인(金寅)·김신(金信)의 상해탈출을 도와주었다.


또 다음해인 1936년 8월에는 베를린 올림픽대회에서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마라톤에서 1위로 입상하자, 보다 13일 먼저 일장기 말소사건을 일으켜, 끝내는 자신이 재직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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