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의 친일의혹(무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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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 선생의 친일 행적에 대한 의혹 (무위)얼마전 중국에 갔다가 한국의 근대사의 이면을 많이 알고 계시는 한 선배 분을 만났다. 그 분의 말씀은 해방 전후사에서 좌파적 지신인의 태두였던 몽양 여운형이 일본을 천왕을 만나서 그 당시 2000만엔(현재의 화폐가치로 무려 1조라고 한다) 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귀국 후에 하필이면 몽양 여운형 선생의 훈장 추서 문제가 제기되고 북한에 있는 그 후손에 대한 거부 문제로 화제가 되어서 필자는 이 글을 담담하게 진보누리에 올렸고 이 글에 대한 반박 글이 올라왔다. 조현철님이 썼다는 '스스로 먼저 반박할 가치도 없는 이야기'라는 글을 필자는 정말로 가치 있게 읽었음을 밝힌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아래 해명의 글에서 특별히 명확 판명한 정보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몽양 선생을 두둔하는 측에서의 추측성 글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반반 글을 읽고 난 후에 나의 판단은 몽양 선생의 친일 의혹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짙어졌음도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밝혀 둔다. =============이하 나의 진보누리 글에 대한 반박 글과 나의 단상을 밝혀둔다================== (조현철) 몽양선생이 일왕을 만나 2천만엥을 받았다는 것은 반박할 가치도 없는 이야기이지만, 이런 저런 누명을 썼던 몽양 선생이니만큼 이런 글을 읽고 사실로 믿는 사람들도 있겠기에 한마디 해두고자 합니다. (조현철님--이하 경칭 생략함) 1.(조현철) 필자가 중국에서 만났다는 선배의 말 가운데서 몽양 선생이 일황을 만났다는 주장은 사실이다. 이 점은 몽양 선생의 둘째딸 여연구씨가 증언한 내용(시사월간 WIN 1997년 8월호에 보도, 같은 내용이 김영사 출간의 에 실림)이기도 하다. 여연구씨는 1976년 여운형 선생이 일황을 만나러 들어갔을 때 통역으로 따라갔던 여경구씨(여운형 선생 조카)에게서 이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2. (조현철)몽양 선생이 일황을 만난 것은 1940년이다. 일황이 몽양 선생을 만나게 된 배경은 이렇다. 당시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을 1년 앞두고 있었다. 때문에 중국 전선에 투입되어 있던 병력을 대미전선에 빼돌리고 싶어 했다. 그 방략은 일본이 중국과 화친을 맺거나 그것이 안 되면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와 모택동의 팔로군 군대가 서로 싸우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일본정부는 밀사를 여러 번 중국에 파견했으나, 화친교섭이 성사되지 않았다. (조현철) ====>(무위) 일왕이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 중에서 김원봉 김구 이승만 등 여러 사람들을 두고서 하필이면 왜 여운형을 택했을까? 이것이 필자에게 떠오른 가장 큰 의문이다. 내 짐작에 좌파 지식인들은 계급이론에 토대를 두고 계급 혁명을 우선으로 삼고 있기에 우파 지식인들에 비해서 국가에 대한 충성심(loyalty) 자체가 상대적으로 약하다. 아마도 히로히토 일왕은 이것을 가장 이용가치가 높은 점으로 보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는 갑신 정변 시절 비록 좌파 지식인은 아니었지만 일본이 김옥균 등의 개화 사상가들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려 한 역사가 있었던 것과 그 맥락이 연결되어 있다. 물론 김옥균 등의 개화파들의 속마음과 일본의 계산은 서로가 합치되는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었지만 목적이 합치되는 공통분모가 많았을 것이다. 여기서 속단하지 말기를 바란다. 필자는 김옥균은 우리 나라 역사상 매우 대단하게 생각하는 위인 중에 위치 시켜 놓은 지 오래다. 다른 글에서도 밝혔다시피 난 일본에 의해서라도 한국의 왕족들이 없어진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철저한 공화주의자다. 또한 외세를 배격하여야 한다는 이유로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 의한 인권탄압이나 북한 주민들의 기아 사태를 방관하고 두둔할 만큼 성격이 모질거나 잔인하지 못하다는 것은 여러 번 밝힌 바 있다 . 3. (조현철)그러자 일본의 저명한 군사이론가이던 오오가와(大川周明) 박사가 사람을 넣어 몽양 선생에게 접근했다. 왜냐하면 몽양 선생은 상해시절,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 팔로군의 모택동 양자와 친교가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몽양은 동경에 건너가 오오가와 교수를 만났다. 그리고 몽양 선생을 다나까 소장에게 소개해주었다. 그리고 몽양 선생은 그들의 주선으로 다시 고노에 수상을 만났다. 고노에 수상을 만난 뒤 몽양 선생은 최종적으로 일황을 만났다. 그들을 만나면서 몽양 선생은 일제의 하수인이 되려고 했던 것일까?(조현철) ====>(무위) 장제스는 김구도 매우 절친했고 김구는 팔로군과 합동작전으로 작전계획을 완성해 두기도 했다고 한다. 한데 김구는 여운형보다는 일황이 상대하기에 훨씬 버거운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여운형은 일황에게서는 이용가치가 훨씬 많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본다. 즉 사고가 김구보다 훨씬 유연하고 융통성이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4. (조현철) 아니다. 몽양 선생이 중국에 건너간 일이 있는가? 없다. 오히려 몽양 선생은 그들의 요구에 응할 듯 말 듯한 말미를 주면서 그들로부터 일본의 다급한 사정, 곧 고급정보를 캐낼 수 있었다. 일본이 미국 같이 큰 나라와 전쟁을 시작하면 패망하게 되리라는 것을 몽양 선생은 확신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을 주변에 말했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게 되며, 출옥 후에는 군사위원회, 농민동맹, 건국동맹 등을 결성하게 된다. (조현철) ====>(무위) "--- 캐낼 수 있었다." "--- 확신했던 것이다." 의 주체는 몽양이 아니라 위 글을 쓴 사람의 추측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부분 "그리고 그 믿음을 주변에 말했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게 되며," 는 좀 너무 추상적이고 작의적이라고 생각된다. 몽양이 그 정보를 캐내서 한국의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나 대한 매일 신문 등의 신문에 일본이 패망할 것이라는 식의 글로 국민들에게 희망을 준 글을 작성하거나 외교 밀서를 보내는 구체적인 자료도 아직 확인된 바 없는 모양이다 5. (조현철) 일제의 요구에 응해 중국에 밀사로 간 일이 없는 몽양 선생에게 2천만엥을 주었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을 수가 없다. 그러면 이러한 악성 루머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6.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처음 중국 밀사 이야기를 꺼낸 오오까와 슈메이 박사가 몽양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일본군이 중국전선에 퍼붓는 포탄 값이 하루 2천만엥씩 든다. 활동자금은 마음껏 주겠으니 밀사로 가서 활약해 달라.” 이 이야기는 이만규의 라는 책에 나온다. 이 책은 몽양 선생이 이만규에게 구술한 것이니만큼 사실이라고 보아야 한다. 일황이 돈을 준 것이 아니라,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일종의 거간꾼으로 나섰던 오오까와 박사가 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실린 가 1946년도에 출간되자, 우파 논객들이 이 책을 읽어보고 “몽양은 일황에게 2천만엥을 받았다더라.”하는 루머를 퍼뜨리게 된다.(조현철) ====>(무위) 그 당시 일본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문명을 구가하던 시대였고 그 정보력도 세계 수준이었을 것이다. 일황이 그 당시의 정보력을 바탕으로 몽양 여운형을 얼마나 만만하게 평가하였기에 “일본군이 중국전선에 퍼붓는 포탄 값이 하루 2천만엥씩 든다. 활동자금은 마음껏 주겠으니 밀사로 가서 활약해 달라.” 이런 황당한 유혹을 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안중근이나 이봉창 같은 의사에게는 이런 주장을 입에 꺼내기도 전에 일황은 목을 졸리거나 테러를 당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몽양이 직접했다는 것은 몽양이 이 부분에 그만큼 자신이 있고 결백하다고 생각할 근거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일황과 몽양 여운형은 그렇게 적대 관계가 아니었는 증거가 충분히 될 수 있다. 특히 몽양의 목표가 민족 해방이 아니라 계급해방에 더 주안점을 두었다면 더욱 그럴 가능성이 높다. 7. (조현철) 2천만엥 수수설에 대해서는 또 다른 소스가 있다. 그것은 몽양 선생이 해방후 조선총독부로부터 넘겨 받기로 한 1백만 경성부민(서울시민)의 3개월 식량을 돈으로 환산한 액수가 대략 2천만엥 쯤 된다. 당시의 우파는 이 식량 환산비와 오오까와 슈메이가 말한 2천만엥을 혼합하여 거두절미하고, “몽양은 일제로부터 2천만엥을 받았다.”고 악성 루머를 퍼뜨렸다. 8. 따라서 라는 사람의 중국 선배라는 자가 들려주었다는 이야기는 역사를 제대로 공부한 일도 없이, 그저 어디선가 이런저런 루머를 읽거나 주워듣고 자기식으로 합성하여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것을 지적해두고자 한다.(조현철) 조현철(몽양여운형선생추모사업회 홈페이지에서) ====> (무위) 역사가나 역사를 전공으로 하는 사람은 해석을 잘 해 내는 사람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아무리 위대한 역사가의 말이라도 광개토왕 비문 같은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데이터 앞에서는 한 수 아래다. 따라서 마지막 문장은 역사를 제대로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평생을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 해서 투박하게 묵묵한 역사적 사료보다 권위를 가질 수는 없다. 의문사 조사 위원회가 과거의 의문사를 조사하는 이유는 말 그대로 루머나 의문이 있기에 조사하는 것이지 죽은 사람이나 조사하는 사람이 제대로 공부를 하고 말고 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후세에 새로운 문서 같은 역사적 사료가 나타나 이 부분에 대한 매듭이 지어지거나 영원히 루머나 의문 수준에서 머물지는 알 수 없지만 후세의 우리는 단지 여러가기 상황을 두고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태도야 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치면서 (무위)먼저 귀중한 글을 올려 주신 분께 감사드린다. 다만 아쉬운 것은 위 글도 자세히 읽어 본 즉, 특별히 명확 판명한 정보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몽양을 두둔하는 입장에서의 추측성 글이 대부분이라서 약간 실망이다. 나 무위가 자유주의자인지 공산주의자인지에는 관심이 없다. 몽양이든 김구이든 이승만이든 어떤 의혹이 떠돌면 아무런 선입견없이 객관적인 자료를 조사하고 탐구해서 진실을 밝혀 보려는 자세가 우리 사회에 가장 이롭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쓸데없는 우상을 만들어 내서 숭배하려는 자세 만큼이나 이 사회에 해로운 것은 없다. 몽양 여운형을 숭배하지도 않지만 특별한 감정이 없음을 알려 드린다. 3. 제가 위 글을 보고 들어 온 느낌은 단순한 說 수준에서 2000만엔 수수 의혹이나 몽양의 친일 성향에 대한 의혹이 더 짙어 졌다는 것이다. 제가 의혹을 가진 이유는 위에서 밝혔지만 가장 의문이 드는 것은 몽양이 일왕을 만나는 과정이 너무나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몽양이 일왕을 바로 만난 것이 아니라 오오사가---> 다나까 소장--->고노에 수상---->일황 히로히토의 순서가 너무 복잡하다는 점이다. 이런 과정에서 중간 만남에서 일왕이라는 최종의 전쟁 두목을 만나는 과정에서 차단되지 않고 여러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을까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 관문을 통과하는 시간의 흐름도 상당했을 것이라는 점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정보를 짐작해 낼 수 있는 대목이다.(무위 견해) ㄱ) 일본 제국주의는 몽양 여운형은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매우 영향력(POWER)을 가지고 있는 인사로 보았다. 일왕이 별 영향력도 없고 이용가치고 없는 사람을 만날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ㄴ) 일본은 김구 김원봉 여운형 이승만 같은 사람들 중에서 그래도 여운형이 일황과 가장 말이 잘 통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ㄷ)일본의 저명한 군사이론가이던 오오가와(大川周明) 박사---> 군벌 다나까 소장--->고노에 수상---->일왕 히로히토의 까지 가는 관문에서 중간에서 탈락(?)되지 않았을 정도로 몽양 여운형이 참으로 포커 페이스에 능하고 자신을 본심을 숨기는 데 뛰어난 인물이었거나, ㄹ) 일본의 박사(지식인 그룹의 수장)-- 군벌-- 정치적 수상(首相)--그리고 일본의 상징이었던 일황의 이해관계와 죽이 맞아 떨어지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충분히 가능하다. 필자는 (ㄹ)의 경우로 판단하는 데 그 시기가 1940 년이라는 것이 이유이다. 1940년은 일본이 패망하리라고 예측한 사람이 매우 희박했을 정도로 일본이 욱일승천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한반도의 많은 한국의 지식인들이 그들의 이해관계 때문인지 해방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절망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친일파로 전향해 갔음도 알고 있다. 그 지식인들 중 그 일부라도 일본의 패망을 예측가능하게 되었을 시기는 무려 5년 후에 1945년 초기 즈음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몽양 여운형보다 더 거물이고 또 의식도 더 많이 깨어 있었다고 생각되는 구 한말 지식인인 김옥균 조차도 일왕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기록은 없다. ㅁ) 좌파이든 우파이든 인간 개개인은 자신의 욕망을 가진 존재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점을 간과하고 자신과 사상적 취향이 비슷하다하여 쓸데없이 우상화하거나 자신의 취향과 다르다고 하여 과도하게 이지메하는 문화는 인간의 정신을 질식시키기 마련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진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미래를 밝혀주는 등대가 될 것이다. 필자도 굳이 2000만엔에 주안점을 두고 있지는 않다. 우리 근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몽양 여운형에 대한 친일의혹에 대한 주장을 우연히 접하고 이를 글을 정리해 두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북한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의 처참한 상황으로 볼 때 한국의 현 상황이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훨씬 사람이 살만한 공간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역사적 맥락으로 볼 때 해방 후 여운형같은 사람이 대한민국의 정권을 잡지 못했던 것을 개인적으로 무척 다행으로 생각하게 되었음도 밝혀 둔다. / 무위 (문명 비평가) 註) 위의 글은 정확한 데이터나 공식적인 자료에 의한 글이 아님을 거듭 밝히니 참작하여 읽으시기 바랍니다. --- 무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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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드라마 보는사람들은 얼마 돼지 않지만 어린 학생들이 만약 보게 됄경우 왜곡됀 역사관을 가질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