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나무와 해설원처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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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나무와 해설원 아가씨
1980년대 중반 어느 날이다. 꽤 추운 날씨인데도 평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어느 한 산등성이에는 퍽이나 많은 사람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외국에서 온 어느 나라 대표단이라는데 새로 발견된 구호나무를 참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호나무란 김일성이 만주에서 항일 할 때 이른바 항일유격대원이라는 사람들을 시켜 산을 돌아다니며 나무껍질을 벗기고 각종 구호들을 새겨 놓았다는 나무들을 말한다. 그런데 해방 된지 40년도 더 지난 80년대 중반에 와서 갑자기 북한 여기저기서 구호나무라는 것들이 발견되기 시작하였다. “천출명장 김일성” “백두산의 여장군 김정숙”이런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다시 “민족의 영광 백두 광명성 탄생” “백두산의 3대 장군” “조선의 영광 백두 광명성 탄생” 이런 것들이 무더기로 발견되기 시작한 것이다. “광명성”은 분명 김정일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리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쎄 김일성은 아무튼 얼마를 하였던 항일을 하였으니 그렇다 하자. 하지만 김정숙은 말 그대로 유격대에서 밥이나 지으며 따라다니던 여자다. 하지만 그것도 그렇다 치자. 해방 나던 해에 겨우 세 살 밖에 되지 않았던 김정일을 두고 “백두 광명성 탄생”이니 뭐니 하는 건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 아이가 자라 광명성이 되겠는지 개망나니가 되겠는지 그걸 어찌 알고 불과 두세 살 밖에 되지 않은 정일이 장래를 두고 “백두 광명성 탄생”이라고 한단 말인가. 하지만 누구도 거기에 대해 의의를 붙일 수는 없다. 의의를 붙이면 즉시 정치범 수용소로 가기 때문이다. 그것도 처음에는 국내 주민들을 끌어들여 참관시키더니 언제부터인가 외국인들까지 끌어들여 참관시키기 시작했다. 그날도 바로 그런 행사가 진행되는 어느 하루였던 것이다. 국방색 적위대(민방위대)복을 단정하게 입은 예쁘장하게 생긴 해설원 아가씨가 삥 둘러선 외국인들에게 구호나무에 대한 해설을 하였다. “... 이 구호나무는 그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불세출의 강철의 영장이신 김일성대원수님에게만 끝없이 충실했던 항일유격대원들이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탄생을 축하하여 그 역사적인 사실을 만대에 길이 전하기 위해 남긴 글발들입니다... ‘백두광명성 탄생’ 얼마나 뜻 깊은 구호입니까. 이렇듯 그 때에 벌써 우리 항일유격대원들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의 탄생을 민족의 영광으로 높이 우러러 칭송하였던 것입니다...” 해설원 아가씨는 그 날에 마치 자기도 동참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다. 둘러선 사람들은 묵묵히 해설원 아가씨의 말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통역은 부지런히 해설원아가씨의 말을 통역하고 있었다. 원래 그쯤 되었으면 국내 사람들이라면 벌써 진실이든 말든 감탄에 젖은 소리들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이 외국에서 왔다는 놈팽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그저 무덤덤하기만 하였을 뿐이다. 그들의 “열광적인 반향”을 취재하려고 왔던 북한기자들만 안타까워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저런 감동적인 이야기를 듣고도 무슨 생각들이 없는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할 무렵이다. 듣고 있던 한 외국인이 입을 열려고 움찔거리었다. 기자들의 시선은 즉시 그리로 쏠리었다. “저 해설원 아가씨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뜻밖에도 산뜻한 조선말이었다. “예 무슨 말씀인지 어서 하십시오” 해설원 아가씨 바싹 다가들며 마이크를 들이댔다. “그러니까 여기 조선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농부의 자식은 농부가 되고 귀족의 자식은 반드시 귀족이 된다고 믿었던 겁니까?” “예? 아니 그건 또 무슨?” 해설원 아가씨 어안이 벙벙하여 말을 못하였다. “그렇지 않고야 어떻게 태어 난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를 보고 민족의 영광이라느니 뭐니 할 수 있습니까?” “예 저 그건...” 해설원아가씨 갑자기 입이 굳어졌다. “역사에는 아무리 영웅의 아들이라 하여도 자라면서 아주 나쁜 사람으로 되는 경우도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또 자라는 과정에 뜻하지 않은 불상사로 일찍 죽을 경우도 있고 말입니다.” “아니 그거 그 무슨 불효한 말을...” 해설원 아가씨 갑자기 얼굴까지 하얘졌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뜻밖에도 분위기가 험악하게 변했다. 그들이 외국인이기에 망정이지 국내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면 벌써 큰 일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그들은 국가적으로 전취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사람들이 모두 숨을 죽이고 이 일이 어떻게 되는가 뒤만 기다리는데 문득 뒤에 물러서 있던 사람 하나가 앞으로 헤집고 나왔다. 얼굴에 개기름이 번지르르 하고 배까지 불룩 나온 것이 일반 주민이 아닌 것은 묻지 않고도 알 일이었다. “여보시오 외국인 양반, 당신 같은 외국인 나부랭이가 뭘 안다고 함부로 혀 바닥을 날름거리는 거요. 우리 수령님께 끝없이 충실했던 항일유격대원들은 그때에 벌써 지도자동지께서 앞으로 우리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가 될 걸 알았단 말이요 . 알겠소? 알겠는가 말이요?” 해설원에게 말을 걸었던 외국인도 그때에야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던지 한발 물러섰다. “아 그렇습니까.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전 미처 당신네 나라 항일투사라는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먼 앞날을 미리 내다 볼 수 있는 초능력자들인 걸 미처 몰랐습니다. 미안... 정말 미안 합니다” 그는 연방 머리를 쪼아리며 사과의 뜻을 표시하였다. 일은 이쯤으로 대충 마무리되는 것 같기도 하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또 다른 일이 터졌다. 처음부터 해설원 아가씨의 강의에는 관심도 없이 이 나무 저 나무 그저 나무 주변만 빙빙 돌던 다른 외국인이 있었다. 갑자기 그 외국인 한 발 나서며 해설원아가씨에게 물었다. “저 해설원 아가씨 이 나무는 세계적으로 멸종 위기에 처한 나무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요?” “예?” 해설원 아가씨 다시 아연해졌다. “분명 이 나무는 그 나무인데 제가 보기에는 40년쯤 되는 나무로 보입니다. 아가씨보기에는 어떻습니까?” “저... 그...그건 저도 잘...아마 그쯤 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해설원 아가씨 뜻하지 않던 물음이라 당황하여 얼버무리었다. “틀림없습니다. 이 나무는 아주 귀중한 나무란 말입니다. 그런데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아직 가슴 아프다는 건 이따 생각할 문제이고 좀 전에 무섭게 눈을 부라리던 사람도 생각해 보았다. 40년쯤 되는 나무라면 해방 후에도 한 참 후 자라기 시작한 나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면 항일 투사라는 사람들이 해방 후에 여기 와서 구호를 남겼다는 말인가?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즉시 임기응변 술을 찾았다. “여보시오 그 나무가 왜 40년 밖에 안 된 나무란 말이요 50년은 실히 된 것 같은 나무인데” “50년? 50년? 전 생물학자입니다. 특히 이런 멸종 위기에 처한 식물에 대해서는 매우 관심이 깊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가 50년 된 나무라구요?” 외국인은 여전히 믿지 않는 표정으로 나무의 연령만 살피며 말했다. “그럼. 그렇구말고. 50년은 넉넉히 된 나무란 말입니다.” “50년이란 말이지요? 50년? 그렇다고 하여도 당신네 지도자라는 사람이 태여 났을 때에는 이 나무가 아직 어린 아이 손목만큼 밖에 되지 않았겠는데 그 항일유격대원이라는 사람들은 그런 어린 나무 껍질을 벗기고 이런 글을 썼단 말입니까. 아주 야만적인 행동입니다. 옳지 못합니다.” “뭐 뭐라고?” 그 말에는 벽을 문이라고 내 밀던 파견된 사람도 말을 잇지 못했다. 어린 나무에 칼 자리를 냈다는 것에 가책을 받아서가 아니다. 그런 나무에 구호를 새긴다는 것이 어떻게 해도 설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외국 놈들, 이놈들은 도대체 배우라는 충성심은 배우지 않고 왜 이 모양들이야?” 국내사람 같으면 벌써 정치범 수용소에 넘기고 만지도 오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도 얼굴이 수수떡같이 되었을 뿐 더 할 말이 없었다.
아무튼 이 사건은 그 외국인들에게 막대한 딸라 돈을 먹이는 것으로 간신히 수습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했다 해도 그 외국인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을 김정일에 대한 우상화선전의 실체야 무슨 말로 다 지울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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