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제일의 항일 파르티잔 허형식 장군> '경상북도 구미'하면 '박정희(1917~1979)'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긴 하다. 시내 상모동에서 태어나서 만주군 장교를 거쳐 해방 뒤 쿠데타로 집권한 그 덕분에 오늘의 구미가 만들어진 건 부정할 수 없으니 말이다. '선산군 구미면'은 그가 이 고을에 공업단지를 유치하면서 '선산읍'을 거느린 인구 40만이 넘는 '구미시'가 되었다.
그는 개발독재를 통하여 근대화를 추진했고, 유례없는 고도성장을 구가함으로써 구국의 지도자로 기려진다. 18년 독재 끝에 비명에 갔지만 그는 지역에서 가히 '반신반인'으로까지 숭앙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지금 경상북도 기념물 제86호로 지정되어 성역화된 상모동 생가 부근에 세운 5미터 크기의 청동상으로 살아 있다.
박정희의 상모동, 혹은 왕산 허위의 임은동
상모동에서 경부선 철길과 경부고속도로를 건너 낙동강 쪽으로 나오면 임은동이다. 거기에는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한 한말 의병장 왕산(旺山) 허위(許蔿·1855~1908)의 생가 터가 있다. 서울로 진격한 13도 창의군의 참모장 허위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된 첫 조선인이었다.
임은동에 그의 호를 딴 거리 '왕산로'가 있고 생가 터에 왕산기념공원이, 마을 뒤 산비탈에 '왕산 허위선생 기념관'도 있으니 왕산도 지역에선 기리는 인물이다. 그러나 상모동 박정희 생가에 숭배자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것과는 달리 왕산의 옛터를 찾는 사람은 드물다. ▲ 왕산 허위 선생 유허비각. 기념관 뒤 산비탈에서 허씨 일가를 낸 임은동을 내려다 보고 있는 비각이다. 왕산이 순국한 지 9년 뒤에 박정희가 태어났으니 두 사람은 동시대인은 아니다. 그러나 앞사람은 일본의 침략에 맞선 싸움에 목숨을 바쳤고 뒷사람은 "죽음으로써 충성을 맹세한다"는 내용의 혈서까지 써 일제의 군인이 되는 길을 택했다.
철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엇갈린 두 사람의 일대기는 일제 강점기의 한국인이 선택할 수 있는 '저항과 타협'이라는 삶의 양극단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근대사가 아프게 환기하는 것은 의로움을 좇기보다는 시류를 따르는 게 현명한 처세라는 점이다.
해방 이후의 우리 역사는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설을 낳는 방식으로 전개되었고, 이는 구미가 낳은 두 인물의 삶에서도 고스란히 재현되었다. 왕산이 순국한 뒤 그 후예들이 일본 경찰의 박해를 피해 만주와 연해주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그들의 삶과 투쟁은 잊혔다.
만주군 장교로 해방을 맞았던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의 영욕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다. 그의 권력과 영광은 대를 이었다. 박정희가 비명에 간 지 서른세 해 만에 그의 딸이 아비의 후광에 힘입어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집권 4년차, 부친에 대한 향수만으로 수준 미달의 딸을 지도자로 선택한 후과를 지금 주권자들은 톡톡히 치르고 있는 중이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어 '고려인'으로 살아왔던 왕산의 친손녀와 손자들이 조국으로 돌아와 특별 귀화한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후사가 끊어졌다고 여겨졌던 왕산의 후손들이 조국 땅을 밟는데 무려 한 세기가 걸린 것이다.
모국으로 영주 귀국하여 국적을 회복하고 보훈처가 제공하는 국민임대아파트에 입주해 살아가는 이들 삶의 풍경을 바라보는 느낌은 씁쓸하다. 그러나 그것과 무관하게 이 고을에서는 박정희에 대한 향수와 숭앙의 열기가 일상으로 존재하고 있다.
박정희와 동시대인 '허형식'의 선택
식민지 지배계급에 편입되기 위해 만주군 장교가 되었던 박정희의 삶은 한 혁명가의 삶에 의해 역으로 반추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구미에서 나고 자란 작가 가 16년 동안이나 마음에 품었던 서사를 통해 우리 앞에 되살아온 독립투사 허형식(1909~1942) 장군이다.
작가가 헌사를 바친 허형식은 왕산 허위의 종질(從姪), 그러니까 왕산의 사촌동생 허필(1865~1932)의 아들이다. 1930년대 이래 북만주에서 활동한 항일 무장투쟁의 지도자 허형식은 1939년 5월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의 군장 겸 총참모장에 오른 명실상부한 최고위급 지휘관이었다.
당숙인 왕산이 순국(1908)한 다음해 임은동에서 태어난 허형식은 1915년 봄, 임은 허씨 일가의 집단 망명으로 만주로 간 이래 망국민이 겪어내야 하는 온갖 간난을 겪으며 항일전사로 성장했다. 중국인 지주와 마적, 친일 밀정들 사이에서 허형식이 민족주의와 반일반제의 사상을 담지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허형식은 1920년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당원으로 입당하여 화요파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군사부장이었던 최용건(해방 후 북한 부주석 역임)의 지도를 받았다. 1930년 5월 1일 만주 하얼빈 일본영사관 습격을 주도했던 그는 심양감옥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평생 동지 김책(북한 부수상 역임)을 만났다.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이 만들어지면서 군사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허형식은 북만주 일대의 일본군 거점과 일본 농장 설비 등을 공격해 이름을 떨쳤다. 1936년 동북인민혁명군이 동북항일연군으로 발전할 때도 그는 북만주 서북 방면의 유격투쟁을 이끌었다. ▲ 임은 허씨 일가가 배출한 독립운동가들. 맨 왼쪽에 허형식이 있다. 왕산허위선생기념관 안의 전시물 중에서. 동북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 지도 아래 만주에서의 항일투쟁을 수행한, 중국인과 한국인 등이 참여한 민족통일전선의 성격을 지닌 군사조직이었다. 전성기인 1938년께 3만 명이 넘었던 항일연군은 일제의 만주 및 중국 침략에 커다란 장애였을 뿐 아니라 국내 진공작전을 펼쳐 일본을 괴롭히곤 했다.
허형식은 당시 북만주 항일투쟁 각 부대 간의 총괄 조정과 공동작전을 연계시키는 매우 중요한 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194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일제가 76만 명으로 늘린 관동군으로 토벌 작전에 나서면서 항일연군에게는 시련과 위기가 닥쳐왔다.
이에 중국공산당은 항일연군 지도부와 잔여 병력들을 소련 영내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허형식은 끝내 소련 국경을 넘지 않고 소부대 활동으로 무장투쟁을 계속하면서 동북 유격전구와 인민을 지켰다. 전술, 전략적 판단 이전에 그는 양심상 동북의 전구와 인민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1942년 8월 3일 이른 새벽, 경안현 청봉령 소릉하 계곡에서 소부대의 현지 지도에 나섰던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의 허형식 군장은 만주군 토벌대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 그의 시신은 산짐승들의 먹이가 되어 뒤늦게 현장에 온 부하들은 그의 다리뼈 하나밖에 수습하지 못했다.
토벌군은 그의 머리를 베어 경안경찰서 입구에 매달았다. 백마를 타고 항일 파르티잔을 지휘하던 헌헌장부, 때로 본명보다 이희산(李熙山)이나 이삼룡(李三龍)으로도 불리었던 이 혁명가는 토벌대와 교전할 때 썼던 권총 한 자루를 남기고 풍운의 삶을 마감했다.
1942년 8월 1일, 소련 극동군은 동북항일연군의 잔류대원을 동북항일연군 교도려로 편성하면서 간부들을 소련군으로 편제했다. 북만주의 허형식도 이 부대에 일방 편제되었다. 교도려 지휘부에는 최용건(부참모장), 허형식과 김일성(영장), 김책(정치위원) 등이 포진해 있었다.
소련이 편성한 동북항일연군 교도려 조직으로 볼 때, 소련에서는 허형식과 김일성 두 인물을 대등하게 평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역사학자 강만길이 "허형식이 북만주에서 희생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북녘 아니면 남녘에서 정권을 잡았거나 통일정부를 세웠을 것"이라고 평가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틀 후, 허형식은 경안현 청봉령 소릉하 계곡에서 자신의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가 숨지던 그 8월은 만주국 신징 군관학교 2기 예과를 졸업한 상모동 출신의 박정희가 5개월 동안의 현장 실습을 하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허형식보다 8살 아래의 이 조선 청년은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으로 입교한 군관학교를 지난 3월에 졸업했던 것이다.
역사의 갈피에서 되살려낸 '허형식 장군'
작가가 어린 시절, '나라를 구할 조선의 무명베와 같은 튼실한 사람'을 찾아보라는 할아버지의 유언을 받드는 가운데 이루어낸 작품이다. 작가는 55세 때에 중국의 항일유적지 답사 길에서 운명처럼 허형식 장군을 만났고, 16년 만에 잊히고 있는 역사의 갈피에서 그를 되살려냈다.
작가는 작품을 펴낸 뒤, 오대산에 모신 조부께 고유(告由)하고 월정사에서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며 장군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금오산 기슭 채미정(採薇亭) 앞에 '항일명장 허형식 장군'의 동상이 우뚝 세워지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채미정은 여말의 선비 야은 길재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뒷사람들이 건립한 정자다. 그가 몰락한 왕조의 의리를 지키며 은둔한 골짜기에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항일투사의 모습이 재현된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그러나 단순히 이름이 아니라, 한말 12도 창의군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했던 의병장 왕산 허위를, 그의 종질로 만주 제일의 항일 파르티잔이었던 허형식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이 고을에 얼마나 될까. 철길 건너 만주군 출신 독재자의 유적은 날마다 드높아지고 있지만 투사의 삶은 잊히고 있는 이 2019년의 벽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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