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어린 탈북자의 솔직한 이야기, 질문'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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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어린 탈북자의 솔직한 이야기, 질문'답
이한철(가명) 15살, 탈북..
- 탈북한 과정이 어땠어요?
= 엄마는 종교 문제로 저보다 2년 전에 먼저 탈북했어요. 친아버지가 술을 많이 먹어서 제가 5살 때 엄마가 친아버지랑 이혼하고 나중에 재혼했는데, 엄마가 중국 가고 나서 새아버지랑 살았거든요.
그러다가 공부하러 다른 데 가서도 살고, 평양에 가서도 잠깐 살고. 그런데 엄마가 자기가 먼저 나와버렸으니까 마음에 걸렸나 봐요. 제가 정말 친하게 지낸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 집으로 엄마가 사람을 보낸 거예요. 우리 집은 이미 엄마 때문에 감시받으니까. 방학이었는데 친구가 와서 자기 집으로 놀러 가자 해요.
그때 집에 아무도 없고 저 혼자 설거지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혼자 따라갔어요. 가니까 엄마가 보낸 사람이 있는 거예요. 우리 엄마가 보낸 사람 맞다고 엄마만 아는 결정적인 증거들을 대는데 그래도 못 믿겠는 거예요. 그런데 그때 친구 엄마가 가라고 했어요. 너 여기 살아봤자 꿈도 없고, 미래 위해서도 가는 게 좋다고. 그 친구 엄마가 저한텐 엄마나 같았거든요. 그래서 믿었어요. 맞아, 친구 엄마가 그때 북한 나쁘게 말한 거 생각나요. 계속 까먹고 있다가 지금 생각났어요. 그래서 믿고 떠났어요.
- 그래도 불안했겠네요.
= 그때는 탈북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줄 알았어요. 엄마 말고 없어진 게 한 명 있었나? 저희 마을은 작으니까 금방 소문나서 다 알거든요. 국경을 넘으니까 친척이 데리러 왔어요. 친척이 연길 옆에 살아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편하게 왔어요.
- 중국에서 라오스 한국 대사관까지 간 과정은 다른 사람들과 비슷했나요?
= 돈 받고 탈북민들 날라다 주는 중국 경찰 같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검열 안 하는 공안 차 타고 심양까지 갔어요. 제가 북한에서 중국어 가르치는 학교 다녀서 중국어 잘했거든요. 지금은 다 까먹었는데. 아무튼 그래서 중국 사람인 척하고 별 문제 없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 거기서 조선족들이랑 한국말하고 놀았어요. 원래 탈북한 사람들 중국에 있을 때에는 집 안에만 있거든요. 누가 신고해버리면 잡혀가니까. 그런데 길에서 애들이 노는 걸 보니까 나도 놀고 싶은 거예요. 조선족 말하고 북한말 똑같거든요. 거기 조선족 애들 집에 가서 컴퓨터도 하고 게임도 하고, 인터넷도 하게 되고.
그러다가 우리 엄마 라오스까지 데려다 준 사람이 와서 스타렉스 비슷한 중국 차 타고 저도 국경까지 갔어요. 9인승인데 저 혼자 타고. 여관에서도 자고, 산도 넘는데 거기는 나라 사이에 국경이 따로 없데요. 사람이 무서운 게 아니고 밑에 뱀 나타나는 게 좀 무서웠어요.
라오스 가서 한국 시민권자인 엄마랑 만났어요. 이틀 동안 침대 버스 타고 비엔티안까지 가서, 한국 대사관에 가려고 툭툭을 탔어요. 영어로 '사우스 코리아'라고 사전 찾아서 말하고요. 새벽 5시 반에 날이 어스름하게 밝았는데, 내려보니까 김일성 김정일 사진이 보이는 거예요. 북한 대사관에 내려준 거죠. 그때 마침 비가 와서 초소에 사람이 없었어요. 경찰 눈에만 띄어도 위험한데... 그래서 급하게 다른 호텔로 갔어요.
거기서 좀 자고 아침 7시 반에 한국대사관에 전화했어요. 호텔주인하고 대사관하고 통화해서 호텔에서 잡아준 택시 타고 대사관에 갔어요. 거기도 엄청 가까워요, 2분 가니까 대사관이에요. 택시가 대사관 안으로 들어가서 '아이구, 살았다' 했어요. 그날 비 안 왔으면 북한 대사관에 잡혀갔을지도 몰라요. 끌고 들어가면 끝이니까.
- 북한에서 살던 기억은 얼마나 나요?
= 7살 정도부터는 기억나요. 주위 친구들... 우리 마을이 국경 마을이고 제가 어리다 보니까 잘 모르겠는데 제가 본 바로는 굶어 죽는 건 없었거든요. 굶는 애들은 있었겠지만 그런 (굶어 죽는) 일은 없었어요. 내 태어나기 전에 그랬대요. 제가 한 달 정도 다른 지역에서 살아봤는데 거기는 풀죽 먹고 농사도 안 되더라고요. 식량 없는 철이 따로 있거든요. 365일 다 없는 게 아니고. 가을에 제일 좋고요, 겨울에 괜찮고. 봄에도 나물이 조금씩 나니까 괜찮은데 여름이 문제예요. 풀죽만 먹어야 돼요.
- 태어나기 전 이야기를 들은 게 있어요?
= 거기서는... 사람들이 지나간 일을 회고 안 해요. 여기서는 계속 지나간 일을 해석하잖아요, 북한 사람들은 그런 걸 안 해요. 사람이 많이 죽었다, 그게 좋은 거 아니잖아요. 떠올리기 싫은 거죠. '고난의 행군'도 여기 와서 알았어요.
- 한국이나 외국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았어요?
= 북한 사람들 중국이 잘 사는지 다 알아요. 그런데 무시하고 계속 놀려요, 옛날에 북한보다 못 살았다고. 그래도 속으로 경제를 인정은 해요. 옛날에는 미국도 잘 산다고 인정 안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한국도 잘 산다고 인정하는 사람 많아요. 표현을 못 하는 거지. 그리고 저 같은 경우는 한국 드라마 엄청 봤거든요.
- 한국 드라마는 어떤 식으로 봤어요?
= 엄마가 중국에서 제 걸로 외장하드를 사줬어요. 제가 컴퓨터에 관심 많으니까 제 컴퓨터도 있었어요. 중국에 먼 친척이 땅이 많아서 부자래요. 그래서 컴퓨터 수리가 안 되니까 깨지면 또 사주고 또 깨지면 또 사주고 그랬어요. USB는 한국 거 썼어요. 중국 거는 쓰레기라서 못 쓴대요. 그래서 중국에서 인터넷으로 다운 받은 거 받아서 봤어요. '목란 비데오' 안 찍힌 거.
북한에서 만든 '붉은별 OS' 있잖아요. 거기서는 한국 CD나 USB 못 써요. 다 차단돼서. 그래서 대신 윈도우XP를 깔아요. 노트북도 한국 거니까, 그러면 CD랑 USB 다 쓸 수 있거든요. 외장하드에도 '대장금', '주몽', '괴물' 같은 거 넣어서 한 3년 동안 봤는데 들키지 않았어요. 노트북이 왜 좋으냐면요, 탁 덮어서 USB 빼고 이불장 넣어버리면 끝이니까요. 서로 얼굴 다 아니까 이불장까지 열어보지는 않거든요.
- 그래서 북한에서 외국 드라마나 영화를 제일 많이 보는 게 보위부원들이라는 얘기도 들었어요. 회수해가서 모든 방송분을 모아서 다 본다고요.
= 그렇죠. 보안부가 '나쁜 짓' 더 많이 해요. 보다 들키면 다 회수하는데 자기네가 본대요.
- 한국 음악도 들었어요?
= 음악은 별로 안 들어봤어요. 조그만 애들은 음악 별로 안 듣잖아요. 북한 애들이 음악에 별로 관심 없어요. 중국 드라마에 나오는 노래나 많이 듣고. 북한에서 노래 듣는다면 TV에 CD 넣어서 듣는 거고요. MP3는 큰 애들이 갖고 있는데 컴퓨터 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중국 건 작은데 북한 건 엄청 크고 이어폰 꽂으면 잡음이 얼마나 많은지 부드드득 게임기 소리 나요. 노래 못 들어요, 최악이에요. 6비트예요.
그런데 제가 평양에 산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 한국 노래 들어봤어요. 윤도현의 '나는 나비'하고 안재욱의 '친구'를 들었어요. 할아버지들이 장윤정 노래 듣는 것도 봤어요. 하루는 길에서 어떤 청년이 2G폰 들고 가다가 노래를 틀었는데 한국어가 나와요...
그럼 의심할 여지가 없잖아요. 한국에 와서 다른 친구가 중국 노래 '펑요' 듣는 걸 봤는데 그 노래더라고요. 알고 보니까 평양의 그 청년이 안재욱의 '친구'를 들었던 거예요. 또 얼마 전에 (합동 수학여행 갔던) 고등학교 형이 노래 부르는데 제가 북한에서 뭔지도 모르고 들었던 노래인 거예요. 가사를 인터넷에 쳐보니까 '나는 나비'였어요.
- 그렇게 모르고 본 게 많았어요?
= 엄마가 '대장금' 보여줬을 땐 북한 영화인 줄 알았어요. 북한이 사극 많이 만들거든요. 사극에서 하는 말이 북한 표준어랑 비슷해요. 그래서 전혀 한국 거라고 생각 못 했는데 NG스페셜 보니까 말이 이상한 거예요. 이거 어디 말씨지? 엄마한테 '어느 나라 말이요?' 따져 물었어요. 그러니까 한국 거래요.
북한에 있을 땐 학교 가면 북한 사람이고 집에 오면 남한 드라마 보고 남한 사람 돼요. 그렇다고 한국에 가고 싶다고 생각한 건 아니에요. 집이 못 살았던 것도 아니고... '영화 저렇게 잘 만드네, 좋다' 생각은 했지만 그것 때문에, 북한 나쁘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북한이 영화 세트만 좋게 만들거든요. 그래서 한국 드라마도 저거만 저렇게 만들었겠지, 했는데 보다 보니까 현실적인 것 같고...
- 아까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북한에서 이사를 많이 다닌 것 같은데요.
= 다른 도시 나가서 공부하고 있을 때 엄마가 없어진 거예요. 새아버지는 착해서 집으로 와서 있으라고 했는데 전 평양에 있는 친척 집에 갔어요. 평양에 갈 때 전학증을 받질 않아서 학교를 못 다녔어요. 내가 고향이 평양이면 북한에 지금도 아직 있을 거야. 그전에도 멀리 갔던 적이 있는데 4일 동안 굶으면서 94km를 집까지 걸어갔어요.
하루종일 걸어 다니면 나처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대여섯 명 봐요. 내비게이션 없으니까 서로 길 물어보고. 길에 누웠다가 내 이대로 자면 죽겠구나, 그런 생각 들어서 질겅이 따먹고. 그리고 정신 차리고. 독 있는 거 먹었다고 토해서 더 맥없어지고. 고난의 행군 했어요.
- 한국에 와서는 어떻게 살았어요?
= 하나원에서 나와서 여기 오기 전에 다른 학교 다녔어요. 영어로 수업하는 학교였는데 그땐 중1이니까 미래에 대한 생각을 전혀 안 한 거 같아요. 수업을 다 영어로 하니까 스트레스 받고. 지금은 돈 주고 배우래도 배우겠는데 2년만 더 있을 걸 후회도 좀 해요. 배울 마음이 없으니까 환경이 좋았는데도 안 배워지더라고요. 애들도 차별은 아닌데 무시하는 것도 있고 힘들었어요.
이 학교에서 제일 좋은 건 친구들. 같은 고향 친구들이 몇 명 있어요.
- 지금 학교생활은 어때요?
= 수업이나 단체 생활이 마음에 들죠. 일단 일반 학교랑 다르게 애들이 북한 사람들이니까 친근함도 있고. 우리도 그렇지만 중국 애들이랑 한국 누나랑 처음엔 다 힘들어했어요. 중국 애들은 자기들끼리 중국어로 말하고. 그리고 생활도 부딪히는 게 있었는데 뭐랄까. 북한 애들은 씻는 거 싫어해요. 저도 싫어했다가 많이 고쳤는데 중국 애들은 중국에서 많이 씻었으니까 계속 우리보고 더럽다고 했어요.
- 꿈이 뭐예요?
= 지금은 컴퓨터 엔지니어인데 북한 애들 도와주고 싶기도 하고... 일단 공부 열심히 하고, 대학 갈 때 컴퓨터 쪽으로 가든지 예술 쪽으로 가든지 하면 좋을 것 같아요. 북한에 인터넷이 없잖아요. 거기에 랜선 깔려면 내가 할 일이 많은 거 같아요. 고향 친구들한테 가서 컴퓨터도 가르쳐주고. 고향 땅을 3D로도 만들어 보고 싶어요. 탈북자 중에 자기 고향 지도를 그리는 분이 있대요. 저는 3D로 아예 그려보려고요. 저희 집은 디자인해놨어요. 학교에서 전산부장이라서 Vegas로 생일 동영상 같은 거 만드는데 지금까지 배운 기술 잊어먹지 않으면 돼요. 지금 시급한 건 검정고시니까 일단 그거하고...
- 한국에 사는 탈북자들도 많이 알고 지낼 텐데, 어른들이 기억하는 북한하고 본인이 기억하는 북한은 어떻게 다른가요?
= 그분들은 옛날 북한을 기억하죠. 저랑 같은 하나원 기수에 고난의 행군 때 러시아에 벌목꾼으로 나갔다가 탈출한 50-60대 분들이 있는데요. 저랑 다른 사람들이 북한 이야기하면 거짓말이라고 해요. TV도 있고 녹화기도 있다고 하면. 러시아에서 숨어 살아서 북한 사람을 못 봐서 북한 얘기를 잘 모르거든요. 90년대 고난의 행군 때를 많이 기억하니까. 지금은 북한이 못 산다고 해도 발전되긴 했죠. 그건 인정해줘야 하는데 몰라요.
그리고 제가 아는 것도 이제는 북한 최신 정보가 아니에요. 여기 와서 2년 있었으니까. 내 있을 때 그랬다, 이렇게 말해야지.. 괜히 말했다가 후배들한테 욕먹어요. (채널A 프로그램)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나오는 사람들은 여기 와서 5년, 10년 넘게 산 사람들이잖아요.
그분들 하는 소리가 맞는 것도 있는데 틀린 것도 많죠. 내 생각엔 90%가 옛날 말 하고 있어요. 탈북민들도 재미로 보는 거죠. 북한이 바뀌는 속도가 빨라서, 지금 공산주의라 해도 공산주의는 절반이고 속은 자본주의예요. 농촌 가면 자기 개인 논밭 없는 집이 없어요. 없는 집은 굶는 집. 개인 밭에서 나오는 소득 가지고 장사도 하고. 보안원 와이프들도 장사해요. 그래서 (시장이) 돌아가요.
- 통일이 될 것 같아요?
= 진짜 잘모르겠어요.
-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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