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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시대의 두 인물, 김원봉과 백선엽..
Korea, Republic of 돌통 0 493 2019-08-20 04:33:17

다음에 시간날때 글을 써서 올리려고 했는데  오늘 지금 약속이 취소되서 이왕 컴퓨터가 켜져있을때 짧게 나마 그을 올리려고 한다.


 

백선엽, 김원봉  이 두인물을 보려면 우선 당연히 그들의 인생사를 어느정도 윤곽이라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해서 그들의 인생길을 여러자료와 함게 간접적으로나마 써보려고 한다.



그런데 이글 너무~~ 길게 쓸거 같은데 지루하지 않을까??



 

              * 김원봉 (金元鳳)


 

이치. 별칭.  호 (약산 若山)

출생 : 1898년   사망: 1958년

성격: 독립운동가, 정치인.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광복군 제1대장및 부사령관등을 역임 독립운동가,정치인.


 

출신: 경상남도 밀양         본관: 김해 (金海)

아버지는: 김주익 (金周益)            어머니는: 이경념 (李京念)

 

관련사건: 남북제정당회단체연석회의

 

대표관직,경력: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광복군 제1대장및 부사령관

 

생애 및 활동: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908년 보통학교 2년에 편입하였으며, 1910년에 인근 동화중학(同和中學) 2년에 편입하였다. 1913년에는 서울의 중앙학교에 다니기도 하였으며, 1916년 중국에서 독일어를 배우기도 하였다.

 

1918년에는 김약수.이여성 등과 난징의 진링대학에 입합, 중국에서 망명생활 시작

 

 3·1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 귀국하는 김약수·이여성 등과 헤어져 길림(吉林)을 거쳐 서간도에서 폭탄제조법을 습득하는 등 일제와의 무장투쟁노선을 분명히 함.

 

1919년 12월 윤세주(尹世胄)·이성우(李成宇)·곽경(郭敬)·강세우(姜世宇) 등과 의열단(義烈團)을 조직.. 의백(義伯: 단장)에 피선됨.  의열단의 암살대상은 이른바 칠가살(七可殺)에 해당되는 자들로서 조선총독 및 총독부 고관, 군부 수뇌와 매국적 친일파 거두 등이었다. 그들은 본거지를 만주와 상해·난징 등지로 전전하면서 국내의 경찰서 폭파, 요인 암살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지속함.

 

6년 여에 걸쳐 의열단 단장으로 대규모 암살계획 및 경찰서·동양척식주식회사 등에 대한 폭탄 투척사건 등을 배후에서 지휘 조종하며 무력 항쟁에 의한 일제와의 투쟁을 지속함,

그러나 연합투쟁 및 조직투쟁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6년에는 황포군관학교[黃?軍官學校] 훈련생으로 입소하여 투쟁노선을 변경함..

 

1927년에는 중국 국민당의 북벌(北伐)에 합류, 1929년 상해에서 정치학교를 개설.. 1932년 난징에서 조선인혁명간부학교를 창설. 창설에 중국 국민당계의 도움을 받음. 

 

1930년경 북경에서 조선공산당 엠엘파(朝鮮共産黨ML派)인 안효구(安孝駒)와 제휴함.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결성하고, 레닌주의정치학교를 개설함.  기관지 『레닌』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1932년 11월에는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 혁명세력의 결집을 꾀함. 1935년에는 신한독립당·한국독립당·대한독립당·조선혁명당·의열단의 5개 단체를 규합하고 한국민족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칭)을 조직함.

 

1937년 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우한(武漢)으로 가서 조선민족혁명당이 중심이 되어 전위동맹·혁명자연맹·민족해방연맹 등 단체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여 대일선전전(對日宣傳戰)에 주력함.

 

1938년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를 편성하고 대장에 취임함. 또한, 장개석(蔣介石)의 주선으로 김구(金九)와 함께 각 혁명단체가 공동 정강하에 단일조직을 만들 것을 제의하는 「동지동포에게 보내는 공개서간」을 1939년 5월 발표함.

 

이러한 중국 국민당과의 관계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합작노력은 최창익(崔昌益) 등과 달리 당시의 민족운동은 계급에 기반을 둔 공산주의운동이 아니라, 일본과의 투쟁을 위한 연합전선 결성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노선에서 출발하였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으로부터는 ‘소시민적 기회주의자이며 개인영웅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자신이 조직한 조선의용대의 대원들이 이탈하여 김두봉(金枓奉)의 독립동맹으로 흡수되기도 하였다.

 

1944년에는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에 취임하고,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등을 역임하였으며, 1945년 12월 임시정부 귀국시에는 군무부장의 자격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전에 발표된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군사부장으로 명단에 올랐으며, 귀국 후 계속 환국한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좌우합작을 추진하였다.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도하던 임시정부측이 좌우합작을 거부하자 비상국민회의에서 탈퇴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의 한 사람으로 피선되어 임시약법기초위원(臨時約法起草委員)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6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을 인민공화당으로 개칭하고 지속적으로 연합전선구축에 노력하였으나, 여운형(呂運亨)이 암살되고, 친일 경찰고문기술자 노덕술에 의해 온갖고문을 당함.

 

또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본격화되자 월북하여 1948년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세칭 남북협상)에 참가하였다. 그 뒤 북한에서 국가검열상·내각 노동상·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하였으나 1958년 11월 숙청당하였다.

 

  다음은 또 다른 한 인물..

 

           백선엽..

 

백선엽(白善燁, 1920년 음력 11월 23일 - )은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외교관이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9기로 졸업하여 만주국의 장교로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하였으며 만주군 중위로 있을 때 1945년 광복을 맞았고, 해방 직후에는 고당 조만식의 비서로 활동하였다.

 

이내 소련군이 이북 지역에 진주하게 되자, 1945년 12월에 월남하게 된다. 1946년 군정기 남조선국방경비대에서 활동하였고, 1949년 제5사단장이 되었으며 1950년 한국전쟁에 대한민국 국군 장군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

 

1950년 제1사단장으로 승진한 뒤, 줄곧 전쟁에 참전하다가 1952년의 휴전 회담 때 한국측 대표단의 한사람으로 휴전문서에 조인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예편 후에는 중화민국·프랑스·캐나다 대사 등의 외교관을 지냈다.

 

호는 우촌(愚村), 운산(雲山), 산남(山南). 본관은 수원(水源),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

 

 

  좀더 백선엽의 출생과 인생항로를 들어가보자..

 

 

1920년 일제 강점기 조선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백윤상(白潤相)과 어머니 방효열(方孝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주변에 의지할 친척이 없어, 홀어머니 아래에서 동생들과 함께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백선엽이 일곱살 때 생활고로 온가족과 함께 대동강에 뛰어 자살하려고 했으나, 그의 누이의 설득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후 그의 어머니는 길쌈과 밭일, 누이들은 공장의 여직공으로 입사하여 가정의 생계를 꾸려갔다.

 

학창 시절

 

유년시절의 그는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었으나 생각이 깊고 신중하였다. 그는 평양부립도서관에 자주 다니며 책을 읽고 신문사설을 읽는 것을 즐겼다.

 

그는 군인이 되기를 희망하였으나 변변치 않은 가정 환경으로 인하여 평안남도 강서 약송소학교를 중퇴한 이후 평안남도 평양사범학교로 진학한다.

 

1939년 3월 평양사범학교를 졸업 후, 교직에 종사했다. 그러나 군인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여기서 안타깝게 만주국 봉천군관학교에 진학하였다.

 

만주국 군인 활동

 

1941년 12월 30일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제9기로 졸업하고 견습군관을 거쳐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자무쓰 부대에 배속되었다가, 1943년 2월 간도특설대로 전근, 3년 동안 근무하였다.

 

1943년 12월 러허성에(열하성)서 간도특설대 기박련 소속으로 팔로군 공격작전에 참가했다. 간도특설대는 1938년 12월 1일 기존에 있던 조선인 국경감시대를 폐지하는 대신에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창설된 기구였으며 사령부는 간도성(젠다오 성) 연길(延吉, 옌지) 부근 명원구에 있었다.

 

보병 기갑 혼성 부대로 출발한 이 부대는 당초 360명으로 발족되었으나 나중에는 800명 가까이 늘어났다 한다. 부대장은 일본인 장교였으나 중대장의 반수와 소대장 이하 전 사병은 조선인이었다.

 

이 부대는 1938년 12월 창설 직후 간도, 길림, 통화 일대에 출몰하는 안창길(安昌吉), 양정우:(楊靖宇),{동북항일연군시절 민생단 사건때 김일성을 도와준 인물이다..},, 진한장(陳翰章), 최현(崔賢) {현재북한의 2인자 최룡해의 아버지이다. 또한 동북항일연군시절 김일성과 보천보전투를 같이한 인물이기도 하다.} 등의 반만 항일(反滿抗日) 세력의 토벌에 투입되었다.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패망으로 해산할 때까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에 대해 모두 108차례 토공(討攻) 작전을 벌였다.

 

백선엽의 간도특설대에서의 구체적 역할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백선엽이 남긴 회고록에 그의 활동 내역이 일부 보인다. 《군과 나》에 따르면,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에서 김찬규(金爛奎), 송석하(宋錫夏), 김석봉(金錫範), 신현준(申鉉俊), 이용(李龍), 윤춘근(尹春根), 박창함(朴菖岩) 등과 함께 근무했다.

 

백선엽은 윤봉길 의사가 목숨바쳐 폭사시킨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側) 일본군 대장의 이름으로 창씨개명까지 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후반

 

태평양 전쟁

 

.
1944년 봄 열하성(熱河省)과 중국 북부에서는 팔로군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에 일제는 만주군 3개 여단을 파견했다. 백선엽과 간도특설대는 만주군 철석부대 산하에서 정보수집, 반공 선전, 체포된 항일세력 심문 등을 맡았다.
 

1944년 여름, 간도특설대는 러허 성(熱河省)을 떠나 허베이 성(河北省)으로 이동했다. 백선엽과 간도특설대는 여기서 1945년 1월까지 항일 세력을 상대로 한 작전을 벌였다.작전이 끝나자 그는 원대복귀명을 받고 귀대했다.

 

1944년 가을, 평양에서 노인숙과 결혼하였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할 당시 백선엽은 만주군 ""헌병"" 중위였다. 그는 만주 전략공세작전을 만나 명월구에서 강제 무장해제를 당했다.

 

간도특설대 활동 회고

 

1993년 일본에서 출간된 ‘간도특설대의 비밀’에서 백선엽은 아래와 같이 회고했다. "간도특설대가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어 커다란 전과를 올린것은 당연한 일이였고 간도특설대가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고 했다.

 

그는 회고에서 간도특설대를 우리라고 표현하였는데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동포에게 총을 겨눈것이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라고 했다.

 

또한 간도특설대의 활동에 대해 "민중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평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간도특설대는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에 총 108 차례의 토벌작전을 벌였고 이들에 의해 살해된 항일세력과 민간인은 확인된 것만 172명에 달한다.

 

2000년 일본어로 발간된 회고록 《젊은 장군의 조선전쟁》에서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에 대해 "일종의 특수부대로서 폭파, 소부대 행동, 잠입 등의 훈련이 자주 행해졌다"고 썼다.

 

간도특설대는 對비정규전 특수부대 형식을 취하고 있어 기동타격, 공작, 정보, 심리, 매복, 추격, 섬멸작전을 주로 행했고 또한 만주군 헌병대에도 종전까지 근무하여 향후 국군 육군 정보국장을 하고 한국전쟁시 빨치산토벌의 선봉장이 되는 계기가 된다.

 

또한 이는 그의 일본어 저서 대 게릴라전-미국은 왜 졌는가'로 이어지며 같은 1사단장을 지낸 전두환이 對비정규전 부대인 '특공여단'을 후방 2군직할부대로서 창설하는 것으로 맥을 잇는다.

 

군정기와 해방 정국

 

조만식
(1945년 8월부터 12월까지 그는 조만식의 비서로 활동하였다.)

 

종전 후, 조선으로 돌아와 당시 민중들로부터 많은 신망을 받고 있었던 고당 조만식을 찾아갔다. 이때 조만식은 그를 비서로 채용하여 백선엽은 해방직후 잠시 조만식의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자신의 친일행적을 감추기 위한 방편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이후 조만식의 민족주의 운동에 참가하지만, 북한에서의 공산주의체제 성립을 피해, 1945년 12월 24일에 월남하였다.

 

소련군의 일제 부역자에 대한 처벌과 지주들에 대한 재산 몰수에 반감을 품게 된 그는 반공주의자로 변신한다. 그러나 그는 반공주의 청년단체에는 가담하지 않는다.

 

월남 후 1945년 12월 5일에 만들어진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고, 1946년 2월 26일에 임관하여, 국방경비대 육군부위(중위)가 되었다.

 

그 뒤 같은 해 1월 15일에 창설된 국방경위대에서 입대하여 제5연대장을 맡았다. 연대장 부산에 도착, 부산항에 도착한 미군의 물자를 관리하고 감독하는 업무를 완벽하게 처리하여, 군수품을 중간에서 빼돌리는 군납업자와 내부에서 협조한 하사관과 장교들을 적발하고 분실률을 2-3%로 낮추게 된다.

 

물자 분실률을 50%대에서 10%대 미만으로 줄이게 되자, 미군은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됐고, 이후 백선엽의 능력을 믿고 신뢰하게 되었다.

 

조병옥의 건의로 미군정 하에서 국방부격인 통위부가 조직되자 그는 통위부로 대기발령되었다가, 곧 통위부장 유동열에 의해 능력을 인정받아 1948년 4월 통위부 정보국 국장에 임명되었다.

 

군 복무 활동

 

군 경력..   간단히 정리..

 

1941. 12. XX. : 만주 봉천군관학교 졸업, 만주군 소위로 임관 제 2차 세계대전 종전시 만주군 육군 헌병 중위 - 당시 헌병은 Military Police가 아닌 지금의 정보,기무,특수전 병과와 유사

1946. 02. XX. : 군사영어학교 졸업
1946. 02. 26. : 국방경비대 부위(중위) 임관, 보병 제 5연대 A중대장
1946. 09. XX. : 제 5연대 제 1대대장
1947. 01. 01. : 중령, 제 5연대장
1947. 12. 01. : 제 3여단 참모장
1948. 04. 11. : 통위부 정보국장 겸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정보처장 - 만주군 간도특설대(정보,첩보, 對비정규전 항일토벌부대), 헌병(역시 비정규, 공작, 정보) 경력을 바탕
1948. 12. 25. : 대령
1949. 07. 30. : 제 5사단장
1950. 04. 23. : 제 1사단장
1950. 07. 25. : 준장
1951. 04. 15. : 소장, 제 1군단장
1951. 07. 10. : 휴전회담 한국 대표
1951. 11. 16. : 백 야전군 사령관 - 만주군 간도특설대(정보,첩보, 對비정규전 항일토벌부대), 헌병(역시 비정규, 공작, 정보) 경력을 바탕
1952. 01. 12. : 중장
1952. 04. 05. : 제 2군단장
1952. 07. 23. : 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1953. 01. 31. : 대장(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대장)
1953. 05. XX. : 육군대학 총장 겸직
1954. 02. 14. : 제 1야전군 사령관
1957. 05. 18. : 육군 참모총장
1959. 02. 23. : 연합참모의장
1960. 05. 31. : 전역

 

대한민국 국군 입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방경비대가 정식으로 국군으로 재편되면서 그는 국군 제5연대장과 육군본부 정보국장을 거쳐 1950년 4월에 개성을 관할로 하는 1사단장(당시 계급 대령)으로 부임하여 1951년까지 사단을 지휘하였다.

 

육본 정보국장 재직 중에 발생한 여순 14연대 반란 사건(1948년10)이후 공산 게릴라 소탕 및 숙군 사업을 지휘하였다. 속사정을 잘 몰랐던 백선엽은 이승만에게 속았다고 후에 이를 두고두고  후회한다. 

 

국방부는 1948년 12월 15일, 육군본부 정보처 소속이던 백선엽 등 8명의 중령을 대령으로 특진발령하였다.

 

남로당 적발과 숙군 작업..

 
 

국군 1사단장 시절


백선엽

 

이후 그는 남로당 빨치산의 토벌과 군내 좌경 인사 숙군 작업에도 주력한다. 이때 김창룡의 강경책과 달리 좌익 혐의자 중 단순가담자를 선별하여 가벼운 징계를 내릴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킨다.

 

숙군 과정에서 박정희의 재능을 아깝게 생각한 그는 박정희에게 전향을 권고한다. 백선엽은 숙군 과정에서 검거되었던 박정희의 구명에 대해서 적극적이었다.

 

당시 박정희는 육군사관학교 좌익 용의자의 한 사람으로 검거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은 상태였다. 1949년 초 어느 날 특무대의 김안일 소령은 백선엽에게 박정희 소령이 조사 과정에서 군내 침투 좌익 조직을 수사하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점을 들어 박정희를 만나 줄 것을 부탁했다.

 

박정희를 만난 백선엽은 도움을 부탁하면서도 시종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던 그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박정희
(1950년대 후반 무렵)

 

옥석을 가리기 힘들었던 만큼 무리한 일이 없었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바로 1년 후에 터지는 동족상잔의 대 전란을 앞두고 적어도 군내의 좌익 조직을 일소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으로서도 다행이다
 

박정희를 남로당(당시 남한안의 빨갱이당)..  박정희는 실제로 그가 존경하는 그의 형인 박상희의 영향으로 남로당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의 총책으로 본 김창룡 등은 박정희를 숙청하려 했으나 그는 박정희의 구명에 적극적이었다. 백선엽은 정보국 고문관인 이드 미 육군 대위에게 부탁하여, 하우스만 미 육군 대위와 로버츠(William Roberts) 미 육군 준장에게 박 소령의 구명을 요청했고,

 

육군본부에 재심사를 요청하여 박정희에 대한 형 집행정지 조치를 얻어냄으로써 그를 불명예 제대시키는 선에서 문제를 매듭지었다.

 

그 후 그는 국군 내부의 반대와 일부 장교들의 비난을 감수하고, 박정희가 문관 신분으로 정보국에서 근무하도록 배려했다. 공식 보직이 부여되지 않은, 편제외 인원으로 비편제 군무원 자격으로 근무하던 박정희에게는 급여가 없었으나, 백선엽은 동료, 부하 장교들을 설득하여 장교들의 월급에서 일부 갹출하여 박정희의 문관 월급으로 주었다.

 

백선엽은 어머니를 옥중에서 잃고, 연인과도 사별하여 의기소침한 박정희를 독려하여 동기를 부여한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박정희는 기적적으로 회생하여 현역으로 복귀하여 정보국 제1과장으로 전쟁에 참여한다.

 

1949년 7월 백선엽은 국군 제5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한국 전쟁 초기
 

1950년 대구에서의 백선엽

 

 

1950년부터 1953년간의 한국전쟁의 경과

 

 

4월 22일, 광주에 주둔하던 5사단장에서 1사단장으로 부임해 부대사정을 소상히 파악하기도 전에, 6월 14일부터 시흥(始興)소재 보병학교에서 고급간부 재훈련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경, 서울에 있던 백선엽은 사단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의 숨가쁜 전화를 받았다. "사단장 각하, 전방에서 적이 전면적으로 침공해 왔습니다.

 

개성이 대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개성은 벌써 점령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것이 백선엽이 받은 6.25전쟁에 대한 제1보였다.

 

백선엽은 급거 귀대하여 육군 제1사단을 지휘하였으나, T-34/85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 밀려 후퇴를 했다.

 

개성, 문산지구 전투, 고랑포지구 전투
 

6월25일 오후 신속히 1사단 병력과 김점곤 대령, 김익렬 대령이 이끄는 부대가 합류하면서 개성과 문산지구로 출동하여 남하하는 중인 조선인민국과 맞서 교전하였다.

 

6월26일에는 경기도 장단군 고랑포에서 최경록 대령이 이끄는 연대와 함께 조선인민군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6월26일 화력과 장비의 준비 부족으로 부득이 퇴각하게 되었고 사단 편제는 그대로 유지하는 데 성공하였으니, 개전 초기 한국군 전방 사단 중에서 편제를 유지하며 후퇴한 사단은 김종오 대령의 6사단(춘천 주둔), 이성가 대령의 8사단(강릉 주둔)이 유일하였다.

 

대구로 후퇴하던 중 이 공로로 백선엽은 대령에서 준장으로 승진한다.

 

장군 진급과 낙동강 전투
 
작전 계획중인 백선엽
 
육군 소장 시절
 

이후 낙동강까지 후퇴한 1사단은 한국군 부대 중에서 유일하게 미국 1군단에 배속되어 지원나온 미군 2개 연대와 함께 경북 칠곡의 다부동를 치렀다.

 

전투 중 한국군 병력의 후퇴와 무단이탈이 심하자 함께 다부동을 지키던 미군 27연대장 마이켈리스(Michaelis) 대령이 "전선 좌측의 한국군 부대가 무단 이탈하고 있다"며 다급하게 전황을 알려왔다.

 

그가 나가보니 한국군이 후퇴하고 있었고, 당시 병사들은 이틀을 굶은 상태였다 한다. 그는 후퇴하는 한국군을 막으며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미군)이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며 싸울 것을 호소하였다.

 

한국전쟁

때의 어느 전차

 

그 후 미국 1 기병 사단, 24 보병 사단과 평양 점령을 경쟁하여 제일 먼저 평양에 입성하는 부대가 되기도 하였다. 평안북도 운산까지 진출한 1사단은 중공군의 반격에 밀려 다른 유엔군과 함께 38선 이남으로 철수하였다.

 

미국이 북한 및 중국과 휴전협상을 시작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에도 백선엽은 휴전회담의 한국군 대표로 참석하였고, 회담 도중 동부전선 상황이 악화되어 군단장으로 다시 강릉으로 부임하였다.

 

1951 겨울에는 지리산의 빨치산 소탕을 위한 "백(白) 야전사령부"를 구성하였으며, 이 사령부를 모태로 이듬해인 1952년 4월에는 한국군 최초로 근대화된 2군단을 창설하게 된다.

 

기존에도 2군단이 있었으나, 1952년 11월 중공군 2차 공세 시 덕천, 영원에서 괴멸하자 해체된 바 있다(이후 한동안 한국군 사단들은 군단급 이상 사령부 없이 미군 각 군단에 분산배치되기도 하였다).

 

전쟁 고아 보육원 설립
 

전쟁 중 그는 국군과 경찰의 유자녀, 전쟁 중 학살과 실종 등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위해 서울에 보육원 성격의 유아원을 설립하고 '백선 유아원'이라 하였다.

 

백선유아원은 1952년 지리산 토벌 작전 뒤 버려진 고아들을 수용해 생활토록 하는 시설로, 당시 전라남도 광주 송정리에 세워졌다.

 

한국 전쟁 이후 그는 손을 뗐지만 그 뒤 83년 백선사회봉사원으로 이름을 변경했다가 88년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대구관구에 넘겨져 운영되고 있다.

 

현재는 보건복지부와 광주광역시의 요청으로 정신지체인 아동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원래 명칭은 설립자인 백선엽을 기리는 의미의 ‘백선’이었으나 여기에 수녀회 성인인 사도 바오로의 영성을 뜻하는 ‘바오로’를 담아 ‘백선 바오로의 집’으로 바뀌었다.

 

이때 세운 보육원은 후일 그가 정계에서 은퇴한 후 교육 사업에 투신하는 시발점이 된다.

 

휴전과 대장 승진

 

1951년 11월 야전전투사령부 사령관에 선출되었다. 그는 지리산의 빨치산 소탕을 위한 "백야전사령부"를 구성하였으며, 이 사령부를 모태로 한국군 최초로 현대화된 2군단을 창설하게 된다.

 

1952년의 휴전 회담이 체결되자 그는 한국측 대표단의 한사람으로 휴전문서에 조인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 후, 육군 제2군단장을 거쳐 1952년 7월,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32세였다. 이때 그는 미군의 밴 플리트 장군과 함께 한국군 증강계획을 세워 추진한다. 미국의 신뢰 외에도 영어를 잘 구사했던 그는 대한민국의 입장과 이승만 대통령을 변호하여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의 관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였다.

 

참모총장과 퇴역

 

 

육군 대장 시절의 백선엽

 

참모총장 재직 시 그는 군 훈련체계의 개혁, 보급체계 개편, 상이군인들에 대한 복지 향상 등에 힘쓰기도 하였으며, 군 근대화를 위한 미국 군사유학 강화(본인 자신도 레벤워스 미 참모대학으로 군사 유학을 다녀옴), 10개 상비사단 창설(11사단~20사단), 10개 예비사단 창설 등을 추진하였다.

 

열악한 한국군의 피복과 식량 등의 처우 개선을 건의하기도 하였으나 이승만의 측근들에게 묵살되었다.

 

1953년 1월 대한민국 육군 대장으로 진급하였고, 1954년 2월에는 동양 최초로 제1야전군을 창설하고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백선엽은 이승만의 끝없는 욕심 독재에 실망하고..  이때 그는 155마일 휴전선 방어책임을 미8군으로부터 사실상 인수 받아, 43개월의 장기간 동안 초대 1군사령관으로 야전군의 기틀을 다져놓았으며, 1957년 5월, 다시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이후 1958년부터 발생한 일방적인 감군 여론에 반대하였으며 그해 11월 출국하여 유럽 각국의 소년단 운용을 시찰하고 11월 25일 귀국하였다. 1959년에는 연합참모본부 의장으로 취임, 최신식 무기 도입 등 한국군의 근대화에 공헌했다.

 

그러나 육군 중령 김종필 등을 중심으로 하는 신진 장교들에 의한 청군 운동으로 스스로 용퇴를 결심, 1960년 5월 30일 퇴역했다.

 

퇴역 후는 외교관에 임명되어 1960년 07월 주중화민국대사로 부임하였다.

 

1961년 7월 주프랑스 대한민국대사 겸 네덜란드·벨기에 대사를 지냈고, 중화민국·프랑스 대사를 역임했다. 5.16 이후 자신을 살려준 은혜에 대한 특별 보답으로 해임되지 않고 1961년 7월 16일 한국 세네갈 친선사절단의 대표로 세네갈을 방문하여 세네갈 수상 두두 티암을 만나 면담하고 돌아온 뒤 윤보선 정권에서는 1962년 가봉, 토고, 세네갈, 카메룬, 차드, 모리타니 주재전권대사를 겸임했다. 1963년 8월 27일, 신임 카메론 주재 한국 대사 백선엽(당시, 주프랑스 대사 겸임)은 아마두아히즈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였다.

 

박정희 정권에서는 1965년 7월 캐나다 대사로 전보되었다가 1969년 10월 교통부 장관이 되었다. 교통부 장관으로 서울의 1기 지하철 건설을 지휘했다. 퇴임 후 반공, 안보 강연을 다녔다.

 

기업인 활동과 은퇴..

 

1971년 충주비료 사장에 선출되어 기업인이 되었고, 한국종합화학공업의 사장을 겸임하였다. 곧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의 한사람에 선출되었다. 1972년 2월 28일 호남비료 사장에 겸임되었으나 얼마 뒤 사퇴하였다.

 

그 뒤 1972년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하였고 1973년 고려대학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하였다.

 

1973년 4월 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에 재선임되었으며, 같은 해 (주) 한국에탄올 사장에 선출되어 1980년까지 재직하였으며, 겸임으로 1974년 겸임 대한화학펄프 사장에 선출되었다가 1975년 비료공업협회 회장이 되었다.

 

1976년부터 1981년까지는 한국화학연구소 이사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1976년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하였다.

 

그밖에도 그는 자신이 가난한 가정에서 면학하였으므로 일부 고학생들의 장학금을 후원하다가 친동생인 백인엽과 함께 인천광역시에 소재해 있는 인천대학교를 비롯한 선인재단의 여러 사립학교를 설립과 운영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또 하나의 그의 인생에서 오점을 남긴다.

 

선인재단은 재단 내부의 극심한 비리와 부패 행위로 말미암아 1994년 선인재단의 모든 학교는 공립학교로 전환되었다.

 

그는 1974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붕괴 뒤에도 한국 전쟁에 참전한 공로가 인정되어 사회원로로 각종 행사에 초빙, 초청되었으며 1981년초 선인재단의 간부들의 비리, 부패행위가 문제가 되자 책임을 지고 선인재단 이사장직을 사퇴하였으며, 그해 3월 한국종합화학 사장직에서도 사퇴하였다.

 

1980년3월 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을 사임한 뒤 그해 한국후찌쯔 사 고문으로 위촉되었고, 이후 비료공협 회장, 한국화학연구소 이사장, 국제상공회의소 국내위원장 등에 피선되었으며, 안보, 강연활동 등을 다니다가 1986년 국토통일원 상임고문에 위촉되었다.

 

정, 재계 은퇴 이후..

 

1988년부터 경향신문에 그의 자전적 칼럼 "군과 나"를 연재하였고, 이를 단행본으로 엮은 백선엽 회고록 <군과 나>가 1989년 6월 한국전쟁 39주년을 맞아 대륙연구소에서 출판됐다.

 

그해 12월 “대한민국의 평화와 자유를 지켜온 예비역 장성들의 모임” 성우회(星友會)가 만들어졌고, 초대 회장에 백선엽이 선임됐다. 1990년 주식회사 한국후지쯔사 고문에 재선출되었다.

 

1998년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위원에 위촉된 뒤, 동 기념사업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99년 11월 한국후찌쯔 사 고문직을 사퇴하였으며, 1999년부터 2001년에는 노근리사건 대책단 자문위원회 자문위원장으로 위촉되었다.

 

2002년 4월 9일 경기도 동두천시 미 보병 제2사단 캠프 케이시에서 열린 '제너럴 백선엽 히어로 룸' 개관식에서 백선엽 예비역대장(왼쪽)이 러셀 아너레이 미 2사단장과 함께 자신의 흉상과 업적이 새겨진 현판을 보고 있다.

 

동두천시 미2사단 캠프 케이시에서 2002년4월9일 개관식을 갖은 이 기념관은 미군측이 부대 근접전투 전술훈련장(the Close Combat Tactical Trainer)을 백 장군 이름으로 명명, 사후 강평실로 사용한다. 100여평 규모의 기념관은 중·소대 전투훈련 상황을 부대원이 시뮬레이션을 통해 강평할 수 있도록 시설을 마련했다.

 

일제강점기 때 항일인사 토벌에 나선 만주군 간도특설대 장교로 2년 반 동안 복무한 전력이 있다. 이 때문에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의 군 부문에 수록되었으며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는 백선엽을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시켰다.

 

그 뒤 2008년 5월 '대한민국 건국 6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됐다. 2009년 3월 23일,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한국전쟁 발발 60주기를 기념하여 백선엽을 명예 육군 원수로 추대할 계획임이 보도되었다.

 

실행된다면 백선엽은 대한민국 최초의 원수계급 보유자가 된다. 대한민국 정부가 그를 명예 원수로 추대하면 한국 전쟁 참전군인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국민들의 안보의식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언론과 시민단체, 학계의 반대가 컸고 결정적으로 “베트남전쟁의 영웅” 채명신 장군과 일부 한국전쟁 참전 군 원로들이 반대해 명예원수 추대는 무산됐다.

 

그의 만주군·간도특설대 경력과 김일성이 주도한 항일 무장 독립운동 세력(동북항일연군)을 토벌했던 사실 때문이다.

 

그는 일본에서 출판된 자신의 책들에서 항일연군을 ‘게릴라’로 칭하면서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도 독립이 빨라졌다고 할 수 없었을 것”(<대게릴라전-미국은 왜 졌는가>, 29쪽, 1993)이라고 했다.

자신의 과오에 대해 변명했을 뿐 사죄하지 않았다. 이기적인 억지로 뀌어맞춘 반성이 없는안타까운 글이다. 안타깝다.

 

근황..

 

 

81세의 백선엽

 

2009년 2월 미 보병재단의 제리 화이트(예비역 소장) 회장이 백 장군에게 편지를 보내 2009년 3월 19일 개관 예정인 미국 국립보병박물관에 소장할 “백 장군의 생생한 전투 경험담을 직접 녹음해 달라”고 요청했다.

 

화이트 회장은 “백 장군의 육성은 전 세계에서 가장 돈독하게 유지되는 한·미동맹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백 장군은 미 보병학교 졸업식에 열릴 박물관 개관식에 외국 장교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초청됐다.

 

2010년 육군본부의 신축 강당에 '안중근 장군실'과 '백선엽 장군실'이 마련되었다.

2010년 3월 10일 육군 1사단은 백선엽 장군 기념석을 제막했다. 육군 보병 1사단은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초청해 그의 전승과 공적을 기념하는 비석 제막식을 열었다.

 

전쟁 지휘관 개인의 이름을 딴 기념비가 세워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10년 6월 21일 '한국전쟁기념재단'이 출범했다. 여기서 백선엽이 초대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

 

2013년 8월 29일 주한 미 육군은 백선엽을 미8군 명예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미 육군은 백선엽이 한국전쟁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부터 대한민국을 방어하는 데 있어 탁월한 업적을 세웠음을 이 명예직 임명의 이유로 밝혔다.

   자~~


이..  두인물을 살펴보면서 김원봉은 일찍히 일제와 싸웠고 여러 눈부실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때  주위의 여건과 환경과 친일 악덕 고문기술자 노덕술에게 억울하게 온갖 치욕과 고문과 치욕을 당했는데... 

 

예를 들어 한가지만 살펴본다면 김원봉이 화장실에서 큰 볼일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문을 열고 그 자세에서 노덕술이 김원봉의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끌고 다녔다고 한다. 

 

물론 주위에는 여자,남자 할것없이 많은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후에 일제때도 이런 일은 없었다고 자존심 강한 김원봉은  나중에 무죄로 풀려 집으로 돌아와 10일을 이불을 부여잡고 울었다고 한다.

 

어쨋든 그는 북으로 가서 간부로 일하다가 김일성과 맘이 맞지않아 간첩죄인가? 당시 북한에선 어떤 죄라고 해야할지?  이게 오해도 할만한게 대만의 장개석 총통의 어떤 가까운 친인척 관계였다고 하는데  사위 였다고 하던가...   하여튼간.. 직접 찾아보심..

 

어떤 사건에 연관되서 그래서 오해를 얻어 숙청됐다.. 그때가 1958년인가?  아니면 이미 1956년 숙청 되었다가 58년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또 한명은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 군인이 되고 싶은 사나이가 있었다.

 

그러나 그 사나이는 시대를 잘못만났다..  바로 일제강점기 시대였다..   젊었을땐데 이땐 욕망과 야망도 컸을땐데  꿈을 이루지 못하고 당시 교사 생활을 하다가..  그러나 이를 참지못하고 군인이 되기 위해서 만주군관학교에 간다. 이런점은 우연인지 몰라도 박정희 전대통령과 비슷하다.

 

백선엽은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장교가 되어 해서는 안될 아니 일본군으로선 어쩔수 없는 일들을 한다.  물론 일본을 위해서 독립군들도 많이 죽였다. 

 

중엔 하나도 항일동북항일연군과도 인연이 깊다고 한다. 어쨋든 이일들은 그가 인생길을 갈때마다 마이너스로, 감점으로 정신적으로 그를 괴롭힌다.

 

여러 부분에서 그이 고뇌가 엿보인다.  나는 개인적으론 이해가 된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또 그시대가 그랬고 또 그는 패기가 넘친 꿈많은 젊은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는 감성적인거나 인정을 그렇게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 공평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어쨋든 그는 6.25때의 군인으로서 큰 업적을 남겼고 지금의 대한민국이 된것에 큰 기여를 했다. 그 리고 그이후에도 물론 운도 따랐지만 사회적으로도 많은 긍정적인 일을 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의 과오는 교사를 때려치우고 만주군관학교에 가서 일본군인이 되서 독립군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것이고  

 

잘한것은:  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살리는데 공여를 했다는것 그리고 그밖의 한국을 위해서 나름대로 한일들 ..

 

물론 또하나의 과오라고 할것은..  내가 인천토박이라 잘아는데 바로 인천의 인천대학교를 포함한 여러학교의 선인재단의 비리와 횡포등이다. 그때당시 재단안의 학교는 학교가 아니라 완전히 군대였다고 한다.  아니..   그이상의..   또 하나의 북한같은 독재체제인 재단 이었다고 한다.  

 

이건 그의 동생 백인엽과 본인인 백선엽의 잘못이고 시대착오적인 그의 생각이었다.

 

어쨌든 이 두사람다 시대를 잘못만난 격동의 시대에 태어나  바로 일본의 일제시대의 흔적으로 가슴아프고 짠한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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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ovarish ip1 2019-08-23 00:04:56
    다 됐고 결과가 중요한거야. 내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했는데 대학 못가면 고졸이지 대졸이 아닌거잖아. 김일성이 아무리 자기가 농업에도 천재고 어쩌고, 과학에도 천재라고 우상화하고 허풍질해도 최종 학력은 육문중학교 중졸인 것처럼.
    김원봉이 독립운동해서 우리나라가 독립된 것이 아니라, 미군이 원자탄 떨구고,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고 외교의 천재 이승만과 모윤숙같은 애국자들이 외교전을 벌여서 유엔이 대한민국을 독립국가로 허락한거잖아.
    감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이성적으로 생각해...당시 비행기 탱크에 항공모함까지 가진 나라를 게릴라전해서 이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잖아.
    결국은 김원은 그냥 빨갱이 공산당 - 대한민국 주적의 일당이고, 백선엽은 친일한 과거가 있어도 6.25. 전쟁 영웅인거야.
    미국사람들은 흑인인권에 대해서 얘기하면 마틴루터킹 목사를 생각하고, 한국전쟁에서 한국인 영웅을 얘기하면 백선엽장군을 생각한다고...
    미국 전국 돌아다니며 한국전 베테랑들 기념하는 기념비나 조각품 같은 것을 보면 꼭 백선엽장군의 이름이 거론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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