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보편적 상식, 지금까지의 언론보도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3월15일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 ~
이번에는 우파중에서 대표적인 한분이신 분의 학술적 주장인데 이는 어쩌면 우리가 몰랐던 또 하나의 진실임을 간과 해서는 안되는 역사적 의의다.
비밀 해제 된 미국 외교문서에 의하면 1960년 4월 학생·시민들의 시위 과정에서 미국은 주한 미국대사, 주한미군 사령관, CIA 한국지부장 등을 통해 과도한 간섭과 도를 넘는 압력, 심지어 군부를 움직여 쿠데타를 시행하려 했다.
미국은 이승만 정부를 지원하면서도 한편에선 한국의 지식인, 언론인, 종교인, 정치인들으로 반정부 세력을 형성, 언제든 이승만에 대한 브레이크를 걸 수 있게 만들었다.
우리의 보편적 상식, 지금까지의 언론보도,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 의거로 시위가 격화되자 하야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현대사를 좀 더 정밀하게 들여다보면 새로운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들이 발견된다.
1956년 미 중앙정보국(CIA)는 남북한을 비교하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에서 CIA는 북한이 산업 발달, 1인당 국민소득, 그리고 주요 경제지표에서 한국을 얼마나 앞서고 있는지를 자세히 밝혔다.
CIA는 북한이 심각한 전쟁 피해, 부족한 인력, 숙련된 기술 인력의 부족, 1953~1955년의 흉작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소련의 지원에 힘입어 경제 재건에 성공했다고 지적했다.
이 보고서를 접한 미국 관료들은 한국이 아시아에서 자본주의의 쇼윈도가 되기를 기대했으나 북한의 지속적인 경제 성장에 비해 남한은 장기적인 경기침체를 겪는 모습을 비교하면서 근심에 빠졌다.
월터 로스토(Walter Rostow)를 비롯한 경제 발전 전문가들은 신생 독립국가에서 공산주의를 제압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경제발전이라고 주장했다. 기술·경험·자본·인력 등 모든 것이 부족한 후진국에서 경제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비상한 수단이 필요했다.
한국에 대한 원조금액 삭감하여 이승만 정부 타격
로스토는 자신의 저서 『경제 성장의 여러 단계들(The Statges of Economic Growth)』에서 “전통 사회가 정상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엘리트가 필요하며, 이들에게 현대 산업사회 건설을 추진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정치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주장이 제기된 후 미국의 관심은 한국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정치 지도자에게 쏠렸다. 미국 정부는 이승만이 이러한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미국 관료들은 이승만이 국가 발전에 방해가 되고 있다고 평가하고, 이승만 반대 세력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여 대체 세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이승만 정권에 대한 압박 작전은 원조 금액 삭감으로 시동을 걸었다. 1957년 3억 8289만 3000달러로 정점을 찍었던 원조금액은 1958년 3억 2127만 1000달러, 1959년에는 2억 2220만 4000달러로 축소되었다(그렉 브라진스키 지음·나종남 옮김,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 책과 함께, 2012, 180쪽). 미국의 원조가 줄어들면서 이승만의 정치적 위상과 지위가 점차 낮아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건국 이후 재정이 부족할 때마다 한국은행에서 화폐를 발행하여 정부 살림을 이끌어갔다. 덕분에 인플레가 심해졌는데,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에 안정화 정책을 강력하게 요구하여 이승만 정부의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
경제 안정화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실행한 곳은 한미합동경제위원회(CEB·Combined Economics Board)였다. 한미합동경제위원회는 이승만 정부가 더 이상 화폐 발행을 못하도록 억제함으로써 이승만이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수단을 박탈했다.
1959년 7월 조봉암을 사형 집행하자 미 국무부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이 나서야 할 때가 되었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미국 관료들은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때와 비슷하게 이승만 반대세력이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적절히 이용한 것이 한국의 언론과 야당 정치인들이었다. 6·25 이후 미국을 비롯한 국제구호단체들은 전쟁으로 파괴된 한국의 언론·출판 시설을 복구하기 위해 장비와 비용을 제공했다.
미국의 재건 단체들은 한국의 언론사와 출판사에 종이 수입 자금을 제공했고, 전쟁 중 파괴된 군산의 한국제지 공장을 복구하여 종이 부족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미국 정부와 민간단체가 경영난에 허덕이던 한국의 언론사와 출판사들을 재정 지원하는 과정에서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한국에서 추구하는 목적과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언론사들을 집중적으로 후원했다.
미국공보원은 1952년부터 출판보조금을 집행했는데, 전쟁이 끝나자 이 보조금은 거의 대부분 이승만 정권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출판사들에게 돌아갔다.
장준하와 「사상계」 잡지 전폭 지원한 미국
전후(戰後)에 미국의 지원을 받은 대표적 인물은 잡지 「사상계」를 주도한 장준하였다. 장준하는 미국의 체제를 동경하여 많은 미국인으로부터 좋은 평가와 대접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장준하가 주도했던 「사상계」의 출판 및 운영비용은 모두 미국 공보원이 부담했으며, 시사 주간지 「타임(Time)」과 사진 잡지 「라이프(Life)」의 한국어판 출판 저작권도 부여받았다.
그 결과 「사상계」 잡지는 1950년대 중반부터 한국 사회를 주도하는 지식인 저널로 성장했다(그렉 브라진스키 지음·나종남 옮김,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 책과 함께, 2012, 100쪽).
이와 함께 미국 정부는 1950년대 중반부터 언론인 양성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특히 1955년부터는 한국의 저명한 언론 엘리트들에게 미국 연수 기회를 제공했다. 당시 한국 언론의 현실에서 해외 연수 기회를 얻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어 수백 명의 지원자가 해외 연수 프로그램에 신청했는데, 선발자는 그 중 12~15명 정도였다.
미국 정부는 의도적으로 이승만 정부에 비판적인 성향의 언론인을 선발했다. 이 프로그램이 실시된 후 처음 2년 동안은 이승만 정권에 가장 비판적이었던 천주교가 운영하는 경향신문 기자가 반드시 포함되었다.
한국의 엘리트 언론인들은 미국 대학에서 연수를 받고, 미국의 언론사를 현장 방문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언론 자유가 크게 제약을 받고 있음을 깨달았다.
1963년 미 국무부가 작성한 보고서에 의하면 “영향력 있는 한국 언론인 중 미국에서 연수를 마친 사람의 비중은 20%”였다. 이들은 미국 연수 과정에서 ‘언론의 자유’라는 원칙에 뜨거운 열정을 갖게 되었다고 미 국무부는 분석했다. 미국에 연수를 다녀온 언론인들은 관훈 클럽을 결성하여 한국 사회에서 언론의 자유를 확대재생산하는 데 앞장섰다.
이어서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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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이나 처먹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