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관훈클럽 행사가 열릴 때마다 주한 미국공보원의 한국 책임자였던 존 맥나이트(John McKnight)가 참석하여 미국의 언론, 객관적 보도의 중요성, 언론의 자유 등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승만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관심은 한국의 정치 지도자 양성 프로그램(Leader Program) 도입으로 표출되었다.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장래가 유망한 공무원이나 국회의원, 정치인을 미국에 초청하여 미국의 발달된 정치기구와 기업체 시찰 기회를 제공하고, 미국식 민주주의의 핵심 본질을 경험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 프로그램은 미국 정부가 한국의 정치인과 시민 지도자 중에서 이승만 정권에 맞서 자신의 주장을 제시할 수 있는 인재들과 관계를 맺는 것에 초점을 두고 추진되었다.
지도자 프로그램은 대상자 선발 과정에서 국회의원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이승만이 이끄는 자유당이 국회를 장악했지만, 이승만 정권에 대한 가장 격렬한 반대가 터져나오는 곳이 국회였기 때문이다.
후에 대통령에 오른 김영삼과 김대중도 젊은 국회의원 시절, 이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백선엽의 회고에 의하면 이승만 정권 말기에 미 CIA 한국지부장으로 부임한 피어 드 실바(Peer de Silva)는 이승만의 정적(政敵)인 장면 부통령에 크게 주목했다. 실바는 장면 부통령과 자주 만나 깊은 관계를 맺었다.
실바 지부장은 장면 부통령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이승만 대통령 말년에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싸였던 한국의 정치판을 안정시키려 했다(「백선엽의 6·25 징비록」①, 조선일보 2013.11.8.).
한국군에게 ‘시위대와 정권 사이에서 중립’ 요구한 미국
미국의 영향력으로부터 강렬한 영향을 받은 것은 군부도 마찬가지였다. 1950년부터 1957년까지 7000여 명의 한국군 장교(육군 4729명, 해군 920명, 해병대 189명, 공군 1503명)들이 코누스(CONUS·Continental United States) 프로그램에 의해 미국의 군사학교에서 교육받았다.
국방통계연보와 문교부 통계에 의하면 1951년부터 1960년까지 군사 해외유학 인원은 1만 1,595명이었는데, 같은 기간 중 민간인 해외 유학 인원은 5,423명에 불과했다(박진환, 『박정희 대통령의 한국경제 근대화와 새마을운동』, (사)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2005, 47쪽). 5·16 당시 군 장교단 약 6만 명 중 10% 정도가 미국 유학 경험을 갖고 있었는데, 이것은 외무부(현재의 외교통상부) 공무원보다 높은 비율이었다.
미국의 경제와 군사원조 담당자들은 개발도상국가의 군대를 “경제 발전을 위한 전령사”로 전폭적으로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군 지휘관들은 미국 유학을 다녀온 한국군 장교들에게 “당신들이 국가를 지도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고 고무했다.
이승만은 한국군 장교집단의 쿠데타 기도나 정치적 야망을 사전 차단하기 위해 군의 핵심 지휘부인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라이벌 관계였던 백선엽(평안도), 정일권(함경도)을 교대로 임명하여 상호 견제하도록 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다양한 훈련과 교육을 받고 온 젊은 장교 집단의 정치적 야망을 언제까지 억누를 수는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제 문제는 “과연 소장파 장교들이 정치에 관여할 것인가”가 아니라 “이들의 활동이 언제 시작될 것인가”로 귀결되었다.
1960년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시민들의 시위가 격화되기 시작했다. 4월 19일, 이승만의 하야를 요구하기 위해 경무대로 몰려든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발포하여 183명이 사망하고 6,259명이 부상했다.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발생하자 이승만 정부는 이날 오후 계엄령을 선포했다.
하지만 시위 진압을 위해 출동한 계엄군은 경찰과는 대조적으로 중립을 지켰고,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유연하게 대처했다. 계엄군은 시위 현장에 전차를 출동시켰으나 그들은 이승만 정부를 수호하고자 하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시위 진압을 위해 군대가 출동할 때마다 시위대는 박수와 환호로 그들을 맞았고, 시민들은 전차 위에 올라가 태극기를 흔들었다.
왜 그랬을까? 백선엽 장군은 “미군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군의 누군가를 내세워 정국에 개입하려 마음을 먹는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미군은 당시 서울 북방의 의정부 라인을 포함해 수도권 일원을 모두 통제하고 있었다. 병력의 이동을 장악하고 있어 전선 또는 후방의 한국군이 서울에 드나드는 길목을 마음껏 막거나 열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이승만을 버리다
당시 한국군의 최고통수권자는 대통령 이승만이었지만, 작전 지휘권은 주한미군 사령관이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국군통수권자의 명령이 아니라 작전지휘권자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미 CIA 한국지부장 실바는 4·19 직전, 백선엽 장군(당시 합동참모의장)에게 이승만 정부 전복을 위한 군사 쿠데타를 제안했다(「백선엽의 6·25 징비록」①, 조선일보 2013.11.8).
4월 21일, 월터 매카나기 주한 미국대사는 경무대를 방문하여 이승만 대통령에게 부정선거 관련자를 처벌하고 재선거를 치르지 않으면 중대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날 매카나기 대사는 허터 미 국무장관으로부터 온 ‘ 시국 수습을 위한 미국의 견해’를 전달했다.
미국의 견해 중 의미심장하게 봐야 할 부분은 “미국은 학생·시민의 시위가 민중 분노의 반영이라고 믿는다”고 한 제2항과 “경찰과 군의 정치개입으로 한국의 안정과 안보가 위태롭게 되고 있는데 이는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에 쉽게 이용당할 수 있다”라고 한 제3항이다.
시위가 민중분노의 반영이니 이것은 정당한 것이란 뜻이고, 경찰·군을 정치에 개입시키지 말란 뜻을 전한 것이다.
4월 25일 서울시내 대학교수들이 “정부는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면서 이승만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요지부동이자 이번에는 실바 한국지부장이 움직였다.
실바는 4월 25일 김정렬 국방부장관에게 이승만은 하야해야 한다는 미국의 강령 입장을 전하며, “2시간 안에 물러나지 않으면 당신들 모두 죽게 될 것”이라고 최후통첩을 했다.
매카나기 대사는 4월 26일 오전 경무대를 방문, 이승만 대통령에게 “국민은 오랫동안 무거운 짐을 져온 각하께서 이제는 젊은 사람에게 정부를 물려주고 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라고 하야를 권유했다. 그제야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권고를 한국을 돕고자하는 뜻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답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6일 오후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이날 이 대통령이 발표한 하야 성명의 주요 내용은 ①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 사임, ②3·15 정·부통령 선거에 부정이 있었다고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 ③이기붕 의장 모든 공직 사퇴, ④국민이 원하면 내각책임제 개헌이었다.
다음날인 4월 27일 오후 3시, 국회에 제출된 이 대통령 사임서가 수리되었으며, 헌법 규정에 따라 수석국무위원인 허정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이화장으로 돌아갔다.
1953년 휴전 과정에서 미국은 에버레디 작전을 통해 이승만을 실각시키고 군정을 실시하려 했으나 덜레스 미 국무장관의 반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는 미국이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때부터 준비했던 이승만 제거 프로그램(에버레디 작전)의 실질적인 발동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자 워싱턴 정가에서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내정간섭이 논란이 되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4월 27일 기자회견을 열어 “이승만 대통령에게 부정선거에 관한 우려를 ‘우호적인 태도로’ 표명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시민이 먼저 움직여야 미국도 움직인다
하지만 비밀 해제 된 미국 외교문서에 의하면 4월 학생·시민들의 시위 과정에서 미국은 주한 미국대사, 주한미군 사령관, CIA 한국지부장 등을 통해 과도한 간섭과 도를 넘는 압력, 심지어 군부를 움직여 쿠데타를 시행하려 했던 사실들을 생생하게 입증하고 있다.
미국은 이승만 정부를 지원하면서도 한편에선 한국의 지식인, 언론인, 종교인, 정치인들을 움직여 반정부 세력을 형성토록 함으로써 언제든 이승만에 대한 브레이크를 걸 수 있게 만들었다.
또 한 가지, 의미심장하게 봐야 할 부분은 미국은 아무리 심한 독재정권이라도 그 나라 국민들이 확실하게 들고 일어나 권위주의(독재) 정권이 유지되기 힘들다고 판단될 때 자신들의 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움직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입장은 4·19 때도 그랬고, 박정희 정권(부·마 사태가), 전두환 정권(6·10 시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점은 매주 토요일마다 “좌익 종북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는 애국우파세력들이 반드시 참고해야 할 부분이다.
이상..끝.
네 에미년 구멍이나 핥아라.
너같은 개색기에게는 이런 욕이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