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입북(入北) 전후의 행적
김일성, 對日 해방전 참가 못해
해방 한달쯤 후인 45년 9월 19일 오전, 원산항 앞바다에 소련 군함 1척이 조용히 들어와 닻이 내렸다.
이 소련군함 푸카초프호에는 「전설적인 항일빨찌산투사 김일성장군」이 타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뿐이었다.
해방 후 첫 추석을 맞아 들떠있던 주민들에게도 이런 사실은 비밀에 부쳐졌다. 김일성의 도착은 은밀하게 이뤄져야 했던 것이다.
이날 항구에는 당시 원산시 인민위원장 강계덕을 비롯해 부위원장 태성수(太成洙), 보안대장 박하섭 등 원산시 인민위원회 간부들과 소련군 장교 등이 승선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이 중에는 소련 해병대 중위로 웅기·청진 등지에서 對日戰에 참가했다가 그때 원산시인민위원회 교육부 차장을 맡고 있던 정상진(鄭尙進. 74 전 북한 문화성 부상·알마아타 거주)도 포함돼 있었다.
푸카초프호가 정박하자 한 무리의 조선인들이 하선하기 시작했다. 소련 하바로프스크 근처 브챠츠크 비밀기지에 주둔했던 88특별여단 소속 항일빨찌산 출신 조선인 등이 고국땅에 발을 디딘 것이다.
소련군 대위 김일성이 그들을 지휘했다. 정상진씨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입북 당시 나이 숨겨, 이름은 김성주로 소개
『45년 9월 18일 원산 주둔 소련군 사령부의 대좌로부터 「내일 김일성이 원산항에 도착하니 함께 나가 통역을 맡아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다음날인 19일 오전 소련군 사령부 고위장교 2명과 함께 부두에 나갔지요. 푸카초프호에서 맨 먼저 내린 사람은 머리가 반백이며 단정한 용모의 소좌 견장을 단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이 김일성장군이라고 생각하고 「김일성장군이시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 소좌는 대위 계급장과 적기훈장을 단 사람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김일성이라고 알려 주더군요.』
이 백발의 소좌는 훗날 노동당 초대 조직부장을 맡았다가 보건성 부상으로 김일성의 주치의 역할을 했던 이동화(李東華. 사망)였다.
당시 김일성과 함께 푸카초프호로 귀국했던 유성철(兪成哲. 전. 조선인민군 작전국장)는 타슈켄트에서 발행되는 고려일보 91년 5월 29일자에 자신이 직접 쓴 「피바다의 비화」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우리 일행은 자동차를 타고 목단강에 도착했다. 처음 계획은 안동과 신의주를 거쳐 평양까지 기차로 갈 예정이었으나 압록강철교가 파괴됐다고 했다.
우리 일행은 다시 자동차로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港까지 왔다. 이곳에서 군운송선 푸가초프호를 타고 9월 19일 원산항에 상륙했다. 그날이 바로 추석 하루 전날이었다.』
다시 유씨는 회고.
『원산시 인민위원회의 초청을 받고 추석행사가 한창인 시 공설운동장으로 가게 됐다. 이에 앞서 김성주(김일성)는 우리 일행을 모아놓고 이렇게 지시하기 시작했다.
「동무들, 오늘은 추석날인데 조심하시오. 술도 마시지 말고 방탕질도 하지 마시오. 혹시 사람들이 김일성을 보았는가 하면 우리는 선발대가 되어 보지 못하였다고 하고 그 분은 뒤에 올 거라고 말하시오. 연세를 물으면 보지 못했기에 모른다고 하시오.」 이것이 고국땅에서 한 김일성의 첫 교시였다.』
유씨의 증언은 계속된다.
『이 말을 듣자 함께 온 최용건은 혼자말로 「쓸데없는 소리」라고 중얼거렸다. 최용건동무는 김의 내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씨의 증언도 비슷하다.
『김일성은 배에서 내린 후 환영 인사들과 인사를 나눌 때 「김성주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더군요.』
김일성의 45년 9월 19일 입북은 兪·鄭씨 이외에도 다른 증언자 및 학자들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25군.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장군은 당사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9월 중순쯤 원산 주둔 위수사령부의 대좌가 전화로 김일성이 도착했다고 보고해와 열차편으로 그를 평양으로 보내라고 지시했습니다.
25군사령부는 그가 이날 원산항을 통해 평양으로 온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수송계획 등 만반의 준비를 했지요.』
『북조선왕조 성립비사』를 쓴 임은(林隱. 본명 許眞·在소고려인협회부회장), 북한문제 전문가인 서대숙교수(미 하와이大) 등도 「9월 19일 입북」엔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망명 전. 노동부 간부 서용규씨는 김일성이 8월말에 귀국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몇 가지 실례를 들고 있다.
원산 도착 직후「김성주」로 첫인사
『나는 김일성이 8월말에 입북했다고 들었어요. 왜냐하면 김이 9월 19일에 원산에 왔다면 평양에는 20일이 지나서 도착했다는 얘기인데, 그럴 경우 설명이 안되는 대목이 있습니다.
김이 평양에 온 뒤 농민들이 추석을 어떻게 쇠는지를 알아보려고 대동군의 한 농촌을 들른 적이 있답니다. 김이 대하리라는 농촌에 다녀오다가 길가에서 배탈이 난 한 노인을 만났대요.
김은 이 노인을 차에 태워 자신의 거처에서 응급치료를 해 돌려보냈답니다. 이 노인은 며칠 후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金의 거처인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찾으려 했으나 못찾고 근처에 해맸다는 거예요. 그때 김,을 따라 다녔던 이호선이란 사람이 노인을 발견하고 김,의 거처로 데려와 주었다는 것입니다.』
서씨는 이런 증언도 했다.
『추석을 쇠고 난 김일성은 3일이 지나서인가 南浦에 있는 강선제강소를 찾아갑니다. 강선제강소를 가려면 만경대를 지나 옛날 자기 집 삼거리를 지나가게 돼있지요.
김,은 이곳을 지나다 부관 김성국을 자신의 할아버지·할머니에게 보내 자기가 이미 평양에 와있다는 얘기는 하지 말고 손자 성주가 며칠 있으면 조국에 개선한다고 말해놓도록 지시했다는 얘를 들었습니다.』
徐씨는 『강선제강소에는 김의 첫 방문날짜(9월 중순)를 크게 써놓은 것을 본 적이 있다』며『이는 북한의 공식史科에도 분명히 나와 있다』고 했다.
북한당국도 김일성이 항일해방전에 참여했다는 전제 위에서 8월 말 입북을 주장하고 있다.
81년판 조선전사 22권―.
『혁명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1945년 8월 9일 드디어 전체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 및 병사들에게 일제를 패망시키고 조국해방을 실현시키는 데 대한 명령을 내리셨다.
조선인민군혁명군대는 일제(日帝) 관동군에 치명적 타격을 주면서 장춘을 비롯한 중국 동북지방의 많은 지역을 해방시키고 진격을 계속해 적들의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했던 웅산만(雄山灣) 고개의 방어시설들을 돌파하고 웅기·나진·남양 등을 해방하고 청진 방면에 대한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조선인민해방군은 지상에서 공격하는 부대들과 더불어 해상 상륙작전을 병행했다. 청진·나남·원산 일대를 해방하고 공격의 성과를 남쪽으로 확대했다. 조선인민혁명군 각 부대들은 도처에서 정예를 자랑하던 일제의 조선 주둔군을 격멸, 소탕하면서 진격해 드디어 일제를 패망시키고 조국을 반세기에 미치는 오랜 일제 식민지 통치의 굴레서 해방시켰다….』
그러나 이 같은 북한의 주장은 여러 증언자들에 의해 즉각 부인된다. 레베데프 장군은 이 부분에 대해 명백하게 증언하고 있다.
『김일성이 부관 문일을 앞세우고 소련 카피탄(대위)계급장을 단 채 45년 9월 하순 우리사령부를 처음 찾아왔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몇 마디 인사를 나눈 뒤 「사령관님, 항일 빨찌산도 해방전에 참전한 것으로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하는 것 아니겠어요. 나는 그의 요구를 거절했지요.』
레베데프는 『당시는 그의 항일투쟁 경력을 감안, 애교로 돌렸지만 홋날 평양 방문시 그들이 사실을 왜곡한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고 회고했다.
전 북한 외무성 부상 박길용(朴吉龍)박사의 증언은 차라리 「희극적」이다.
『북한의 그 역사책은 소련 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가 발간한 「조선의 해방」이라는 책의 내용을 변조한 것이죠.
구체적으로 말하면 「조선의 해방」에 수록된 치스차코프 25군사령관의 회고록「제25군의 전투행로」에 나오는 내용 중 「소련군 25군」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바꾸어 옮겨 적은 것에 불과합니다.』
蘇軍 사령부의 호통 맞고 두만강서 되돌아가
박길용씨의 증언―.
『58년 가을 헝가리의 페렌스뮤니크 총리가 평양을 방문, 함흥(咸興)시찰을 나갔을 때 최용건·남일과 같이 김일성을 수행했었지요.
그때 김일성이 빨찌산 부대가 항일전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회고하더군요. 그때 「원동사령관 말리노브스키 원수에게 조국해방에 참전케 해달라」고 두번이나 편지를 썼는데 회담이 없더래요. 그래서 부대원을 트럭에 싣고 두만강까지 나갔으나 사령부에서 「너희들 할 일은 다른 데 있으니 돌아가라고」고 호통을 쳐서 되돌아 갔답니다.』
이 전투에 참전했던 레베데프 장군도『나는 국경지역에서부터 전투부대를 따라 웅기·나진·청진·함흥까지 갔으나 김일성빨찌산부대가 참전했단 말은 못들었다.』
원산으로 김,을 마중나갔던 정상진씨가 바로 조국해방전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이다. 정상진씨는 김일성의 참전을 알지 못한다.
물론 정씨가 「항일 빨찌산」의 참전에 대해 알았을 리도 없다. 그러나 그가 인민위교육부 차장으로 있으면서 원산까지 내려가서 김일성을 마중나갔다면 김,의 항일전 참전과 8월 말 입북은 설득력이 없다. 이어서 ~~ 끝.. 제 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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