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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신. 이오시프 스탈린. 독재의 최고봉 4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45 2019-10-06 17:33:34

오래 전부터 스탈린이 사실은 비밀경찰 오흐라나의 프락치라는 음모론이 있었다.  (여기서 프락치 라는 뜻은? 

 

특수한 사명을 띠고 어떤 조직체나 분야에 들어가서 본래의 신분을 속이고 몰래 활동하는 사람.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스파이 이고 일부의 경우는 지능형 안티 이다.  비슷한 의미의 순우리말로 '끄나풀'이 있다. 또 간첩도 되겠다.  이후 프락치는 독재정권이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던 학생운동권 세력을 분열시키기 위해 잠입시킨 스파이를 가리키는 용어로 주로 쓰이게 된다. )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어서 ...

 

주요 의문점은 살해까지 저지른 은행 강도가 유배형을 받고, 유배지에서도 나름 편하게 지냈으며 심지어는 애인까지 사귀어 사생아를 두는게 말이냐 되냐는 것,

 

게다가 여러차례 유배지에서 탈출했다는 점이 의심 받았다. 또한 대숙청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다른 프락치 출신 동료들을 묻어버리기 위해 계획했다는게 음모론의 골자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 이 음모론은 그저 음모론으로 취급된다.

스탈린 시절과는 달리 러시아 제국의 유배는 사실상 보내버리고, 방치하는 것에 가까웠다. 제대로 맘 먹고 돈만 어떻게 구해서 위조 서류를 만들면 역으로 가서 기차 타고 떠나면 됐다.

 

스탈린도 자유인 시절 벌어둔 돈을 동지들에게 융통해 놓은 뒤 밀반입 시켜 탈출했다.

 

여기서 재밌있는 실화가 2개가 있는데, 하나는 이때 어떤 동지가 이 돈을 삥땅쳤는데, 후일 스탈린에 의해 숙청됐다고 한다.. 그리고 두번째는 한 번은 스탈린이 여장을 해서 탈출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제정 러시아 말기 혁명가나 기타 반정부 사상가 치고 유배 한 번 안가본 사람 없고, 탈출 못해본 사람 없었다.

 

당장 블라디미르 레닌, 레프 트로츠키 같은 볼셰비키부터 시작해 멘셰비키, 미하일 바쿠닌과 표트르 알렉셰에비치 크로프트킨 같은 아나키스트들도 다 한두번 씩은 유배 갔다가 탈출한 전적이 있다.

 

애시당초 비밀경찰들은 프락치를 정말 필요한 일이 아닌 이상 유배 보낼 일이 없다.

 

그냥 멀쩡하게 당 내부에 심어둬서 프락치질 하게 놔두지 뭣하러 시베리아까지 보내서 당장 눈 앞에 있는 혁명 조직에대한 정보 수집을 약화 시킬까?



물론 스탈린이 아니였다는 거지, 실제로 볼셰비키 내부에는 프락치가 꽤 있었다. 그중 대표라 할만한 인물은 고위 간부 로만 말리놉스키라는 인물인데, 레닌의 측근으로 볼셰비키 당원으로서 두마, 러시아/의회 의 의원직을 역임했었다.

 

말리놉스키는 볼셰비키와 관련된 체포나 수사에 항상 연관되었었고, 의심받자 독일로 도망쳤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자 한자리 받을 속셈으로 돌아왔다가, 비밀경찰 오흐라나의 기록을 모두 접수한 볼셰비키에게 전직 프락치임을 들켜 체포 후 처형 당한다. ㅋㅋ 그의 그릇만큼 말로는 처형..

 

다만 이 인물의 경우 레닌과 스탈린을 포함한 핵심 간부들의 옹호로 목숨을 건진 전적도 있고해서 볼셰비키가 오흐라나에 역으로 침투 시킨 이중 스파이라는 견해도 있다.



어쨋든 이 일과 유사한 여러 사건들로인해 학자들은 '오흐라나는 프락치를 통해 볼셰비키를 붕괴시킨다는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으나, 이들이 서로를 의심해 죽고 죽이게 만들어 자멸의 길로 이끌었다'고 평한다.

 

실제 레닌은 이후 동지들을 완전 신뢰치 않고, 무분별한 숙청을 시작했다. 이 뒤를 이은 스탈린도 마찬가지여서 스케일을 더 키워 대숙청을 벌였다.

 

1925년의 캅카스 3인방이라 불리었던 3명의 사진, 아나스타스 미코얀, 이오시프 스탈린, 세르고 오르조니키제  이 세사람의 사진이 있는데 사정상 삭제했음..

 

여기서 이 두인물을 살펴보면 아나스타스 미코얀은, 그의 동생인 아르툠 미코얀은 미하일 구레비치와 함께 미그 사를 창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 세르고 오르조니키제.. 라는 인물은,  1886. 10. 24. ~ 1937. 2. 18, 그루지야 출신의 혁명가로, 소련 공산당 정치국에 몸담았으며 스탈린의 최측근이었다.

 

그리고 대숙청 당시 숙청 위기에 몰리자 자살했다. 덕분에 가족은 숙청되지 않았고 크렘린 벽 묘지에 뭊혔다.

 

한편 스탈린은 캅카스 지역의 멘셰비키에 대한 열렬한 투쟁으로 캅카스의 레닌이란 별명도 얻고 1910년대 어간에 프라우다 창간에 참여하여 첫 편집인으로 활동하고 중앙위원에 선출될 정도로 세간의 인식과 달리 혁명가로써 두각을 보이던 스탈린이었지만

 

오흐라나에 체포됨으로 그의 혁명가 이력은 한방에 훅갈 위기에 처한다. 시베리아 한복판에 끌려가 무려 4년이나 썩어야 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신검까지 끌려가 차르의 군대에 징집될 위기에 처했다가 왼팔 부상 때문에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 와중에 러시아 혁명이 터지고 차르 정부가 무너진 후에야 시베리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 그 중요한 차르의 붕괴 시기에 한 일이 없었던 것은 당연했고

 

그 영향으로 10월 혁명에 대한 유명한 미국인 사회주의자 존 리드의 르포 <세계를 뒤흔든 10일>에서도 겨우 두번 이름만 언급될 정도이다. 

 

여기서 또 분석할것은.  레닌은,  물론 트로츠키나 지노비예프는 거의 매장마다 언급되는데, 스탈린은 자신의 이름이 많이 나오지 않고 트로츠키가 더 많이 나왔다고 이걸 금서로 만들어서 소련 인민의 접근을 차단한다.

 

참고로 이 책은 레닌이 만국의 노동자들로 하여금 읽으라고 서문을 써준 책이다!



거기에 4년이 넘는 시베리아 유형 사이에 스탈린은 완전히 잊혀져 버려서 명색이 전직 중앙위원인데도 인정받지 못하고 '중앙위원회에서 일했던 사람' 정도로 소개받아 말단 취급을 받는 굴욕을 당했다.

 

보다 못한 레닌이 그의 신원을 보증해 줄 정도였다. 사실 레닌조차 스탈린의 이름을 잊어먹어서 "코바의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 나는 사람?" 하고 주변에 물어볼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ㅋㅋㅎ

 

ㅎ    거기에 스탈린 본인이 스스로도 내성적이라 나서기를 꺼려(이는 트로츠키와 매우 대조적이다.) 이러한 정황이나 훗날 권력에서 밀려난 트로츠키가 스탈린을 눈에 안띄는 듣보잡 정도로 묘사한 것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면서 한때 스탈린이 혁명 중에 한 일이라곤 없는 그저 레닌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이 주된 묘사였으며 위에서 봤듯이 심지어 프락치라는 의혹도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저술한 스탈린 전기에 나온 것처럼 잉여인사가 아니라 오히려 은행강도 등으로 단련된 도시 뒷골목 어둠의 세력과의 커넥션으로 레닌의 망명이나 자금 동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주요 당대회에 참석하며 존재감을 드러냈으며 위에서 언급했듯이 중앙위원에도 선출되는 등 볼셰비키 혁명가 중에 최소 주류의 말석에는 들어가는 비중을 차지했다. 괜히 레닌이 말년에 서기장을 준게 아니다.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고 러시아 내전이 벌어지자, 스탈린은 붉은 군대의 정치장교로 입대하여 직업군인의 충성을 감독하고 동향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

 

흔히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군사적 재능은 있었다고는 한다. 그는 내전 초기에 남부전선으로 파견되었고, 백군의 반격으로 볼가 강 인근의 차리친, 후에 스탈린 그라드가 될 도시로 후퇴하여 그곳에서 업무를 보게 된다.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심어둔 구 제정 출신 장교들과 불화를 빚었고, 자신의 명령을 잘 듣지 않는 몇몇을 경질시키고 체포한 후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를 남부전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군 전체를 통솔하는 모스크바의 트로츠키는 당연히 이런 스탈린의 행동에 격노하였고, 스탈린-보로실로프 라인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며 이 문제를 둘을 중재할 능력이 있는 레닌에게 직접 가져가기에 이른다.

 

레닌은 스탈린을 모스크바로 불러들이고 보로실로프를 우크라이나로 보내 트로츠키의 불만을 일단락 시켰다.

 

거기에 갓 건국된 폴란드가 국가 막장 테크를 타고있던 소련을 침공해온 소비에트-폴란드전쟁 때, 그가 지휘-감독 하던 소련군은 폴란드군에게 역관광당해 대패했고,

 

여기서 패배한 이유를 살펴본다면 트로츠키 회고록에서는 이 패배를, 권한을 넘어선 스탈린의 지휘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으나 실제론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트로츠키도 패배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현재의 유력한 설. 이 패배는 스탈린의 책임은 아니라는 것이 오늘날의 연구 결과이다. 

 

폴란드 주변의 혁명운동을 퍼트리고 폴란드 내의 소수민족에 대한 혁명고취를 위해 잘 나가던 진격을 무리하게 옆으로 돌리게 한 것이 결정적 패인이라는 분석이 있는데, 이 명령은 스탈린이 아닌 레닌이 거의 억지로 밀어붙혀서 만든 당 차원의 권고였고

 

민족문제에 정통한 스탈린은 여기에 반대했다가 레닌이 폴란드 침공을 강하게 주장하자 찬성으로 돌아섰다.

 

트로츠키는 강하게 반대한 축이었다.   소련측에 우세했던 전쟁 양상은 폴란드측으로 흐른다. 이러한 이유로 국방장관 트로츠키와, 전선사령관인 미하일 투하쳅스키와 엄청나게 사이가 나빠지고, 이 때문에 스탈린은 군직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는데,

 

여기서 트로츠키의 야비한 성격이 나타나는데.. 폴란드와의 전쟁을 스탈린의 책임으로 100% 물어버리고 당 차원의 추방을 논한 사람이 바로 트로츠키였다. 

 

그는 이전에도 스탈린을 탐탁찮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훗날 자신을 디스하던 이들을 스탈린은 처형과 암살로 복수하였다.



이후 스탈린은 정부로 돌아가서 소수민족 출신이라는 메리트를 강조하여 민족문제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원래 정권을 잡기 전까지도 스탈린이 남들에 비해서 비교우위를 갖는 분야는 소수민족 문제 분야였고, 실제로 민족 문제 관련 일을 많이 했으니 당연한 일.

 

이 자리는 스탈린에게 상당한 이득을 가져다줬는데, 소수민족 출신의 공산주의자들을 자신의 권력기반으로 포섭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교묘한 정치적 책략과 소련 내 민족 업무에서 보여준 과단성 등으로 세력을 키워나갔고, 

 

실제로 당시 스탈린의 직위는 스탈린은 볼셰비키 정권 내에서 민족문제 위원이었으나 사실 서기장직(엄밀히 말하면 간사장)도 업무량만 많고 권한은 별로 없는 직위였다.

 

다만 스탈린에 대한 신임으로 레닌이 임명해준 것이다. 그런것과 무관하게 스탈린은 여러 업무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면서 능력과 식견을 뽐내면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1922년 스탈린은 마침내 소련 권력의 핵심 서기장에 선출된다. 그리고 취임 한 달만에 레닌은 지병으로 쓰러진다.


 

        이어서 ~~ 제 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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