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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1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85 2019-10-06 17:30:27
독자노선 걷는 북조선분국

 
 
 
◎「분국」아닌 「중앙국」으로 둔갑/모른척한 박헌영 스스로 권리를 포기/국내파 반발속 김일성 기반 착착 강화

 
 
 
 
 

서북 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 이틀째인 45년 10월11일.

크지는 않지만 주목할만한 대립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발언파동에 지나지 않지만 김일성파와 국내파 공산주의자들간의 노선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립이었다.




문제는 이번에 김일성이 제기했다.




김일성은 국내파가 제기하는 정치노선인 「인민전선」이 조선의 실정을 무시한 것이라고 공격했다.



『옳은 노선을 위하야』(조선산업노동조사소,45년 11월발행)에 수록된 정치노선확립조직확대강화에 관한 결정서 11항(60쪽)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회의는 국제적 평화를 파괴하는 행동은 일본제국주의자의 전론재차기도를 영합하는 것이며 국내 전인민전선의 통일을 방해하는 행동은 친일적반동분자의 의사를 영합하는 것이라고 본다. 고로 대회는 연합군과의 친선을 도하야 전인민전선의 통일을 기하야 투쟁하여야 할 것을 명시한다.』



여기에 나오는 「인민전선」은 국내파가 제기했던 깃이었다. 이날 대회에서 김일성은 인민전선에 동의않고 「민족통일전선」노선을 주장했었다.



전 북한고위관리 서용규씨의 증언.



『김일성은 인민전선에서 말하는 통일전선적 의의나 원칙은 같더라도 조선의 실정은 민족통일전선을 요구하고 있다. 인민전선과 민족통일전선은 대상과 목적이 다르니만큼 이북실정에 맞는 민족통일전선의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2차대전때 반파시스트 통일전선이었던 인민전선은 파시스트와 협조적 관계를 유지했던 자본가·지주 등을 타도 대상으로 삼았었다.



○김,민족전선 주장



국내파는 일제에 협력했던 모든 자본가·지주는 새국가건설에 참여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고 김일성파의 주장은 민족반역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동참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는 자본가·지주와의 협조를 어떻게 보는가가 문제의 핵심이었다.



이는 정세인식과 노선에 관한 근본문제였다. 심각해지면 이론투쟁으로까지 발전할 수도 있었다.



대립은 자연스럽게 발생했다.



서씨의 증언은 계속된다.



『김일성의 주장이 나오자 정달헌이 「지주 자본가도 돈만 내면 된다는 얘기냐」고 따졌고 김재갑은 김일성의 노선이 「소 부르좌적 우경투항주의」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자 빨찌산 가운데 이론가로 통하는 안길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안은 화난 목소리로 「동지에 대한 모독이다」고 소리치며 「반파쇼인민전선에서는 히틀러에 반대한다면 자본가든 지주든 다 수용했다.

 

지금은 조국건설,민주주의건설을 위해 민족반역자는 심판하되 나머지는 모두 힘을 모아야할 때다. 공산당이나 공산주의자들만으로 건국사업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이 논쟁은 사실 해방정국에서 공산계열의 힘을 어느 정도로 평가하는가와 관련된다.



공산계열의 힘이 충분하다고 판단되면 지주·자본가들과 손잡을 필요성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그러나 당시 공산계열의 힘이 강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서씨는 열성자대회가 열릴 당시 이북 공산당원은 1천명 수준이었지만 제대로 된 당원은 5백명정도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 공산당의 형세는 그토록 형편이 없어 이무렵 평양시 구역당비서를 했던 한 간부당원(현재 중국망명)은 『오기섭이 45년 10월과 11월 사이에 공산당원을 1천명 정도 조직했는데 그중에서 진짜당원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3백명도 안됐다』고 전하고 있다.



전 평양시 당위원장을 지내다 해외에 망명한 S씨는 이렇게 당시를 증언했다.



『45년말께입니다. 김일성이 당간부 7∼8명과 이그나티예프 소군정 정치부장하고 무정장군의 집을 찾았습니다.

 

그때 김일성은 「공산당이 세워졌는데 세포도 없고,조직도 없어 큰일입니다. 동무들이 잘하고 있지만 더 잘해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당시 사동구역이 모범이었는데 당원이라고 이름은 걸었지만 얼굴도 안 내미는 사람이 수두룩했습니다.』



그렇다면 국내파가 정세판단을 잘못했고 오히려 김일성파가 제대로 판단했다는 말이 된다.



○“어린놈” 인신공격



그러나 논쟁은 이론대립이 아니라 감정대립으로 비화됐다.



서씨의 증언.



『안길이 말을 마치자 정달헌이 일어나 「새파란게 뭘 안다고 건방지게 나서느냐」고 했습니다. 인신공격이었죠. 당시 안길이 30세였고 김재갑은 40대중반,정달헌은 40대 후반을 넘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러자 정달헌보다 나이가 많은 강진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신 무슨 소리를 하느냐. 안동무 나이가 어리다해도 공식회의발언인데 새파랗게 젊으니

뭐니라고 하면 되겠는가」하고 끼여들었습니다.


박정애·이주연·이일규·김덕영 등이 잇따라 일어나 정달헌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했고 김책도 「공식회의에서 모욕적인 언사는 피하는게 좋겠다」고 거들었습니다. 결국 회의는 소란끝에 휴회됐습니다.』


휴회동안 지도부는 김재갑에게 사과하라고 설득했다. 김재갑이 속개된 회의에서 사과함으로써 소란은 일단락됐다.


그러나 이같은 소동에도 불구하고 민족통일전선의 내용은 채택되지 않았다.


정세인식과 노선싸움에서 김일성측은 줄곧 밀렸다.


집행위원 선출을 둘러싸고 또 한차례의 소동이 있었다.


서씨의 증언.


『발기인회의에서는 집행위원을 투표로 선출하지 않고 전형위원회에서 추천하는 방식으로 구성키로 했었습니다. 그런데 엉뚱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10월13일 열성자대회의 막바지에 김용범의 사회로 지도부구성에 관한 의견을 재차 확인할 때였습니다.
 
발기인회의의 합의대로 하자는 의견이 나와 박수가 터져나오려는 순간 강원도대표 가운데 한사람이 일어나 「발기인회의의 결정에 대해 반대한다. 집행위원은 비밀투표로 뽑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발언이 끝나기 무섭게 함남과 강원대표 일부가 「우리의 지도자 오기섭 동지,주영하 동지,이주하 동지 만세」라고 외쳤습니다.』


참석자들의 규탄으로 한차례의 해프닝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전형위원회에서는 소련파의 인선을 둘러싸고 또 의견이 엇갈렸다.


계속되는 서씨의 증언.


『전형위원회가 선출돼 위원 9명이 회의를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소련파인 이동화와 태성수의 집행위원 선출여부를 둘러싸고 소란스러워졌습니다.


이들이 추천되자 오기섭과 정달헌이 「그들은 조선인이라도 소련군인이다. 조선공산주의 운동에서 한 일이 뭐 있느냐」고 따졌고,
 
다른 한쪽에서는 「소련군정과의 관계도 있고 하니 포함 시키자」고 했습니다.


옥신각신끝에 소련파 두사람은 빠지고 강진건과 장종식이 집행위원에 들어가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승인서 내용바꿔
 


대회는 곡절끝에 13일 오후 6시30분쯤 끝났다.


30개 항목에 이르는 결정서가 채택됐다. 국제정세 인식,분국설치 조직확대,당기강확립,북부조선당부(북부 5도당)의 좌우경적 오류지적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결정서는 주영하·안길·김응기·이봉수·장순명·김교영·이동화·태성수로 구성된 결정서 초안작성위원회에서 만든 초안에 기초한 것이었다. 대회의 결정서는 김일성파의 완전 승리가 아님을 잘 보여줬다.


분국을 얻은 것을 제외한 대부분의 문제에서 김일성파는 국내파에 밀렸다고 하는 편이 정확했다. 정세인식과 노선은 국내파의 입장들이 주로 반영됐다.


특히 대회에서 제기된 이영·최익한·정백등 장안파를 분파라고 했던 비난이 결정서에 채택된 것(30항)은 박헌영의 승리라고도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무튼 분국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북 공산주의자들의 실질적 중앙으로 자리잡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먼저 분국은 서울중앙의 승인을 받는 절차를 밟았다.


조선공산당 서울중앙은 10월23일 북조선분국의 창설을 승인했다. 분국은 서울중앙의 승인서를 받아 24일 북부5도당에 분국승인 사실을 통보했다.


그런데 서울중앙의 승인을 받고 각도에 통보하는 과정에서 묘한 혼란이 빚어졌다.
 
서울의 승인서는 분국은 분국일 뿐이라는 점을 명시하고 있지만 분국의 각도 통보서는 마치 새로운 중앙이 만들어진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서씨의 증언.


『이 통보서가 각도에 전달되자 「중앙지도부」「중앙위원회」「중앙」이 어디를 말하는 것이냐는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중앙지도부는 평양의 지도부를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그냥 그렇게 부르는 것이었지 공식명칭은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함남·강원·평북도에서는 이 문제를 가지고 한동안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서울의 승인서와 분국 통보서의 뉘앙스 차이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서울 당중앙 무시


의도적인 듯한 혼란이 여기저기 발생했다. 공식명칭은 분국이었지만 중앙국으로도 불렸고 공식문서에도 사용됐다.


서씨의 증언.


『서울중앙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중앙국이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공식서류 3분의 2 가량은 중앙국으로 되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공청같은 곳에서는 「중앙국 지시에 의해서」라는 식으로 아예 중앙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분국내 각 부서에 있는 직인도 처음 며칠동안은 분국것만 있었는데 곧 중앙국이라는 직인이 등장했습니다.』


분국은 창설되자마자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 파장은 서울중앙의 권위부정으로 향했다.


계속되는 증언.


『분국이 결정되자 서울중앙이, 이북공산당조직을 지도할 수 없는 현실적 상황에서 중앙이 될 수 있느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박헌영의 권위가 일각에서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분국이 만들어진 뒤 박헌영이 파장을 최소화시킬 수는 없었을까.


서씨는 박헌영이 분국을 장악할 기회를 스스로 버렸다고 지적한다.
 
『박헌영은 치명적인 실수를 했습니다. 분국창설뒤 자신이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책임자로서 취해야할 권한행사를 하나도 하지 않았습니다.
 


서울의 당중앙위원회에 분국집행위원회 위원들을 보충하는 조치를 안취했습니다.

 

분국이 만들어진 특수사정을 반영해 북부를 지도할 수 있는 「특수국」이라도 서울중앙에 만들었어야 했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스스로 버린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북부중앙을 인정한 셈이죠.』



김일성의 입북이후 지방조직파악,예비회의,박헌영과의 비밀회동,열성자 대회라는 큰 일들이 국내파의 강한 반발속에서도 한달도 채 안되는 시간사이에 숨가쁘게 진행됐다.


 

 

          이상..    끝..  ~~ 제 1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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