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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신. 이오시프 스탈린. 독재의 최고봉 6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85 2019-10-09 15:02:03

스탈린의 대숙청시기때 내뱉은 말들이 그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가장 믿음이 가는 사람이 가장 먼저 의심받아야 될 사람이다.

        - 이오시프 스탈린.



레닌이 오래 살았다면 그도 감옥으로 갔을 것이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아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가 1936년 8월의 모스크바 재판을 방청한 후 남긴 말이다. 


참고로, 스탈린과 레닌의 아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의 관계는, 스탈린과는 죽을 때까지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 때문에 크룹스카야가 1939년 사망했을 당시 스탈린이 그녀를 독살한 게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나돌았다.



"붉은 군대의 베테랑들을 다 없애버린게 네놈 아니냐? 네가 유능한 장군들을 다 죽여버렸잖아!"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에게 비난하는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내뱉은말이다.  겁대가리 없이...


    이일과 관련하여 일화가 있다..


식사 도중 스탈린이 보로실로프에게 겨울전쟁의 졸전에 대해 비판하자 이렇게 항의하며 그릇들을 내동댕이쳤다고 한다.


그 강철의 스탈린도 여기에 여간 찔렸던 게 아니었는지 이런 불경한 발언을 한 보로실로프를 그냥 해임하는 선에서 끝냈다고 한다.



그렇게 자신을 디스하던 이들을 숙청하고 자신의 절대권력 확립을 위하여 스탈린은 전대미문의 대숙청을 실시한다.



여기서 스탈린의 측근인 니콜라이 예조프의 명언이 있다.


Лучше пусть пострадают десятки невинных, чем пропустить одного шпиона. Лес рубят ? щепки летят.
한 명의 스파이를 놓치는 것보다 수십 명의 무고한 사람이 고초를 겪는 것이 더 낫다. 숲을 베어내다 보면 나무조각이 튀기 마련이다.

        - 니콜라이 예조프


그러나 막상 예조프도 스탈린과 베리야의 음모로 누명쓰고 숙청되었다.



1937년~1938년 사이의 기간 동안 소련의 정치, 경제, 국방, 행정, 사법, 언론, 문화예술, 과학기술, 교육, 농업, 산업 등 전 분야에서 스탈린 체제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이거나, 혹은 비판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조리 숙청당한 사건.


주도적인 위치를 담당한 니콜라이 예조프의 이름을 따 예조프시나(Ежовщина)라고 하기도 하며,


영어로는 Great Purge, Great Terror, Stalin's terror 등으로 불린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기획한 것이기는 하나 그가 어느 정도까지 관여했는지는 아직 논란이 있다.



"우리는 그런 적들을 모조리 없애버릴 겁니다.

설사 그들이 옛 볼셰비키라도! 우리는 그들의 일족, 그들의 가족까지 없애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과 행동으로 (그렇습니다. 생각만으로도) 우리 사회주의 국가의 통일을 해치는 자는 모두 가차없이 처단할 것입니다.

그들은 물론 그들의 일족까지 모든 적을 섬멸하기 위해서!"

-1937년 11월 8일 스탈린의 연설



1934년 12월 공산당 고위 정치인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 이후 소련에서는 반혁명분자 색출이라는 명분으로 과거 스탈린 반대파에 선 적이 있는 많은 고위 공산당원들이 체포되었고,

1936년 스탈린의 정적이었던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가 처형되며 금기시되던 '고참 볼셰비키 혁명동지'들에 대한 처형의 문이 열렸다.

1937년 봄에는 고위 공산당원들 뿐만 아니라 군부와 사회 전 분야로 숙청이 확대되면서 본격적인 숙청의 해일, 즉 대숙청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당 내의 스탈린 반대파들이 걸려들었다. 레닌이 사망한 이후에 스탈린, 트로츠키와 권력투쟁을 벌이던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가 먼저 처형당했고



이후 니콜라이 부하린, 알렉세이 리코프 등 레닌과 함께 혁명을 이끈 고참 볼셰비키들이 대부분 처형되거나 체포되기 전 자살했다.

(여기서 하나 생각할께...이들의 상당수는 레닌 사후에 스탈린과 손잡고 트로츠키를 실각시키는데 가담했다.

하지만 공통의 적인 트로츠키가 밀려나자 스탈린은 이들 하나 하나를 각개격파하는 식으로 한직으로 밀어냈고, 결국은 대숙청을 일으켜 모조리 제거한 것이다. )  


그리고 이들과 연계된 당과 행정부의 중간 간부들이 끌려가기 시작했고, 점점 퍼져나가서 학계와 언론, 문화예술계를 거쳐서 결국에는 민간인을 포함한 온사회로 확산되었다.

대숙청이 절정을 이루던 1938년에는 그동안 성역으로 여겨지던 소련군까지 숙청의 파도에 휩싸여서 장교단의 상당수가 희생되었다.


이쯤해서  니키타 흐루쇼프의 연설문을 읽어보자


스탈린은 지도와 사업에서의 집단성을 전혀 용납하지 않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변덕과 독단을 기준으로 자기 방침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해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는 설득과 해명, 다른 사람들과의 세심한 작업 등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방침을 강요하고 자신의 견해에 무조건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행동했습니다.


이에 저항하거나 자신의 관점을, 자신이 옳음을 주장하려는 사람은 지도 집단에서 배제되고 도덕적 그리고 육체적 파멸이 뒤따르는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스탈린은 '인민의 적'이라는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이 말은 논쟁 상대인 개인 또는 사람들의 사상적 잘못을 어떻게든 입증해야 할 필요성에서 단번에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이 말은 무언가 스탈린과 견해가 다르거나 단지 적대적 의도를 가졌다고 의심되는 모든 사람을, 그리고 단순히 중상모략을 받은 모든 사람을 혁명적 준법성의 모든 규범을 위반하며서 매우 잔혹하게 탄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습니다.


사실 이런 '인민의 적' 개념은 현실적으로 중요한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해서 어떤 사상 투쟁을 전개하거나 자기 견해를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빼앗고 없애버렸습니다.

그 결과 혁명적 준법성은 경악스러울 정도로 파괴되었으며, 과거에 당의 노선을 지지했던 그 어떤 잘못도 전혀 저지르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니키타 흐루쇼프의 연설문, <개인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하여>



             이상.  제 7편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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