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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13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308 2019-10-09 14:04:10
비운의 혁명가, 무정...



◎팔로군서 활동하며 「조선해방」준비/대장정 참여해 포병장교로 용맹떨쳐/45년말 조선의용군 간부들과 평양에..





해방 북조선에는 두명의 장군에 관한 전설이 풍미했다. 그 한사람이 항일 게릴라전의 영웅 김일성이라면 또 한사람은 중국군에서 용맹을 떨친 무정장군이었다.




팔로군 포병사령관이자 조선의용군 총사령관이었던 무정은 김일성과는 다른 또 하나의 전설을 쌓고 있다.



북한정치사에서 무정은 신비속의 인물로 남아있다. 그의 등장과 몰락이 마치 혜성처럼 휘황찬란했다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45년 11월 화려했던 중국해방투쟁의 위광을 업고 북한정치무대에 등장한 그는, 곧 빛을 잃고 전설처럼 흔적만 남긴 채 사라진다.



한때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2비서로 올라가 자리를 잡는 듯 했으나 곧 인민군의 포병사령관 위치로 내려앉았고 6·25전쟁중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그래서 무정의 삶과 죽음의 역사는 아직도 대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무정은 조선인으로서 중국군 포병이 되어 중국공산당의 주력인 팔로군의 포병사령관까지 올라갔으며 조선의용군 사령관을 했다는 수준이다.



전형적인 군인으로 중국혁명에 몸을 바친 뒤 해방이후 귀국했으나 6·25패전의 책임을 지고 억울하게 숙청된 뒤 죽었다는 정도다.



그러나 최근 조금씩 공개되는 무정에 대한 자료와 증언은 그에게 드리워진 신비의 베일을 조금씩 걷어준다.



그 자료와 증언들은 무정이 중국 팔로군 소속의 군인이었지만 조선의 독립을 위해 고뇌하고 노력했던 비운의 혁명가였음을 보여준다.



특히 전 평양시 당위원장을 지낸 뒤 해외에 망명한 S씨(75)의


「고뇌하는 조선혁명가 무정」에 대한 증언은 무정연구의 새 지평을 열어준다.



○14세때 3·1운동



S씨는 『무정이 팔로군 간부시절,계속 조선혁명에 관심을 갖고 국내와의 긴밀한 연락을 유지했으며


해방이 가까워오면서 독립이후 조선정치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나름대로 정치적인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 모색했었다』는 지금까지의 무정에 대한 인식과 전혀 다른 새롭고 생생한 증언을 하고 있다.



우선 그의 출생 및 초기 경력과 관련된 혼란의 가닥을 잡아보자.



중국 영변출판사에서 출판한 『관내지구 조선인 반일투쟁자료휘편』은 무정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다. 이 자료의 무정편은 초기 그의 경력을 이렇게 쓰고 있다.



『무정,1905년생. 본명은 김무정. 고향은 함북 경성,서울에서 고학하며 자랐다. 14세때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으며 그후 서울 중앙고보에 입학해 18세(1923년)에 퇴학당했다.



23년 3월 압록강을 건너 만주를 거쳐 북평으로 갔다.』



이 자료는 무정의 출생시기·본명·출신학교 등을 처음으로 자세히 공개해주고 있다.



기록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더욱 주목되는 것은 무정이 서울에 살때 여운형선생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조선공산당 초기인물들과 교분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S씨의 증언.



『조선공산당 화요계의 인물가운데 김명시라는 여성이 여운형선생의 심부름으로 연안에 와 무정을 찾았을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무정이 여운형선생의 집에 머무르던 시절 같이 있었다는 겁니다.

김명시라는 여성은 연안과 여운형선생을 연결하는 연락책이었다는 셈이지요.



김은 무정을 짝사랑했는지 「무정이가 너무 무정하구나. 무정이가 그렇게 무정하냐」라는 타령을 했답니다. 이 여성은 해방직전에도 여운형선생과 연락을 담당했었습니다.



무정은 또 「박헌영·최창익(제3차 조선공산당의 ML파 인물이자 연안파의 지도적 인물로 후에 북한부수상을 지내다 숙청된 인물)과 서울에 살던 시절 알고 지냈다」고 말했습니다.』



무정이 여운형·박헌영 등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최초로 밝혀진 역사적 사실이면서 동시에 당시 국내의 공산당 계열,민족주의계열과 연안파의 관계를 새로 조명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해준다.



계속되는 그의 경력.



『23년 중국에 온 무정은 24년에는 북방 군관학교에 들어가 포병과를 졸업했다.


군관학교시절 남구전투에 참가해 천진을 점령하는 전투에서 공을 세운 뒤 졸업,중국 포병대위로 임명됐고 22세때 포병중좌로 진급,2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가 2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면 중국공산당중에서도 원로급에 속한다. 그는 이때부터 중국공산당의

혁명역사에 몸을 싣게 된다.


무정장군의 신화는 이때부터 조금씩 만들어졌다.



『27년 장개석의 공산당 토벌때 체포되어 무창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때 무창시 중국학생등 1만여명이 대시위를 하며 즉시석방을 요구했고 무창법원 동지들의 도움으로 상해로 도피했다.


29년 상해대폭동때 폭동지휘부에 참가하다 영국인들에게 체포돼 2개월동안 투옥됐다가 석방된 뒤 홍콩으로 갔다.』


이같은 경력보다 무정이 중국혁명과 관련된 명성을 굳히게 된 계기는 유명한 2만5천리 대장정때다.



무정이 대장정에 참가한 10여명의 조선인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조선인이라는 것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무정은 대장정이 끝난 뒤 연안에서 자신이 대장정에서 혼자 살아남게 된 것을 이렇게 회고했다고 한다. S씨는 무정의 회고담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2만5천리 대장정 막바지인 36년 2월 황하를 건너야 하는 상황이 됐소.

그때 장정초기부터 참가했던 조선인은 다죽고 홍군(중국공산당군) 15군단 75사의 참모장이 돼있던 양용과 나만 남게 됐소.


그러나 양용이 황하를 건너는 선봉장으로 뽑혔소. 그러나 돌격대란 사실상 죽음의 길이었소.


황하를 건너는 교두보를 확보하기는 했지만 양은 총알이 배를 관통해 창자가 끊어지는 중상을 입게 됐지요. 그렇지만 치료도 못받고 고통만 당하다 하루만에 죽었소.』


양용의 죽음은 묘하게도 무정과 중국당 지도부의 팽덕회에게 인연을 맺어줬다.



무정은 팽덕회와 친하게 된 계기를 대장정이 끝난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양용이 죽은 뒤 팽덕회가 중앙에 문제를 제기했소. 「중국해방전투에 외국혁명가들을 너무나 많이 희생시키고 있다.


이들을 다 희생시킨다면 어떻게 되는가. 기왕에 희생된 사람들은 몰라도 더 이상 외국혁명가의 희생은 안된다」고 제기했소. 팽덕회가 나를 데리고 있겠다고 해서 그때부터 팽덕회와 같이 일하게 됐소.』


○유일한 조선인 간부



무정과 팽덕회는 이미 30년 악주전투 때부터 인연이 있었다. 당시 중국 홍군가운데 대포를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두사람이 팽덕회와 무정이었기 때문이다.


무정은 대장정시절 중국공산당의 유일한 조선인 간부가 되면서 중국공산당과 하나가 되어갔다.


이어 37년 홍군에서 개편된 팔로군 총사령부 작전과장으로 37년 말에는 중국최초의 포병부대인 팔로군 포병단단장(연대장)으로 사실상 포병사령관이 됐다.



그의 진급은 파격적이었다. 대장정 이후 파격적 진급은 무정의 신화를 더욱 키웠고 점차 무정은 팔로군내의 조선인뿐 아니라 그의 이름을 아는 모든 조선인에게 구심점이 되어갔다.



무정은 자타가 공인하는 포병최고의 권위자가 됐다.



그의 권위는 스탈린이 41년 7월 그에게 대독전 참가를 요청함으로써 더욱 커졌다.



조선의용군 출신인 한청씨(79·심양 거주)는 당시 팔로군 보위과장이었던 고점공에게 들은 이야기라며 그때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41년 독소전쟁 발발후 7월쯤 스탈린이 특별기를 연안에 보내 무정을 소련으로 초청했습니다.



중국공산당이 동의해 수속을 밟게 됐습니다. 그런데 당시 장개석의 국민당이 반대했습니다. 중국공산당으로서는 당시 국민당과의 관계를 고려해 가지말 것을 종용했습니다.』


결국 가지않았지만 그 일은 군인 무정의 명성을 확인한 계기였다. 군인 무정은 41년이 되면서 조금씩 다른 행보를 한다. 조선독립과 관련,적극적 행동을 시작한 것이다.



41년 1월10일 태행산 동요에서 대회가 열려 화북조선 청년연합회가 결성됐다. 이 연합회는 규모는 작았지만 중국공산당과 조선인 모두에 의미가 큰 것이었다.



연합회는 팔로군소속 조선인들과 팔로군 소속이 아닌 조선인을 규합해 별개의 조선인 조직을 만든 것이었다.



42년 7월 열린 연합회 2차대회에서는 이 연합회의 조선해방 성격을 분명히 해 이름을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바꾸고 산하의 군대조직으로 조선의용군을 두었다.



○국내정치에 관심



무정은 이 과정에서 중심역할을 했다.



한청씨의 증언.



『무정은 41년 연합회를 조직할 때 주도적 역할을 했고 42년 만들어진 조선의용군 결성때는 팔로군 포병 연대장을 그만두면서까지 사령원(사령관)이 됐습니다.』



그런데 무정이 화북조선청년연합회 결성 및 의용군 창설에 적극적이었던 것이 본인의 의사인지 당의 지시인지 아직 밝혀지고 있지 않다.



이 점에서 S씨는 주목할 만한 증언을 한다.



사실 당시 조선독립은 까마득한 장래로만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무정은 달랐습니다. 가까워진 조선혁명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정이 중국화된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외였습니다.



무정은 37년 항일전쟁이 터지기 전에도 은밀히 조선인을 모아왔습니다. 그러다 항일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무산됐지요.



무정은 공산당이 아니라도 조선인만의 독립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무정이 한때 「조선혁명연합회」라는 것을 만들었지만 당시 연안에 들어와있던 최창익등의 반대로 해산시켰습니다.』


이는 무정이 중국 해방전선에서 투쟁하면서도 항상 조선의 해방을 염두에 두었다는 의미다.



즉 무정이 조선해방에는 신경을 안쓰고 중국혁명에만 몰두했다는 빨찌산파나 국내파의 통념과는 다른 증언이다.



무정은 중국내 조선인 규합과 동시에 국내와의 연계도 꾸준히 해나갔다.



S씨의 또다른 증언.



『무정은 해방전 박헌영그룹과도 연락이 있었습니다. 여운형의 사람인 김명시가 연락책이었죠. 무정이 김과 나눈 얘기를 다하지는 않았지만 박헌영의 콤그룹에서 연안에 사람을 보낸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해방이 되자 조선혁명에 대한 무정의 관심은 더욱 커진다.



해방을 전후한 무정의 움직임에 대해 S씨는 중요한 증언을 한다.



『해방이 된뒤 45년 10월쯤 연안에 있던 조선의용군들이 심양에 집결해 있을 때입니다. 무정이 독자적인 조직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촉진위원회」라는 것입니다. 조선공산당이 이미 서울에서 만들어져 있는 것을 통신을 통해 금주에서 전해들은 만큼 그것은, 조선공산당을 부인하는 행동이었습니다.



무정은 그것을 몇몇 사람에게 은밀히 타진했습니다만 반대가 컸어요. 결국은 흐지부지됐습니다.』 무정이 해방과 더불어 자기나름대로의 조직을 결성하려 시도했었다는 최초의 증언이다.



계속되는 S씨의 증언.



『44년 겨울에 벌써 무정은 독립이후의 조선정치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무정은 「소련군대가 전쟁에 참전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러시아 사람밑에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러시아말을 잘하는 양용이 있어야 하는데」라며 안타까워 했습니다.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를 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안했던 때입니다.』


조선정국에 대한 민감한 관심을 갖고 무정은 45년 11월말쯤 조선의용군 간부 70여명과 함께 평양역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이북의 정세는 그에게 우호적이 아니었다.




           이상..  제 1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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