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13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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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혁명가, 무정... ◎팔로군서 활동하며 「조선해방」준비/대장정 참여해 포병장교로 용맹떨쳐/45년말 조선의용군 간부들과 평양에..
「고뇌하는 조선혁명가 무정」에 대한 증언은 무정연구의 새 지평을 열어준다.
해방이 가까워오면서 독립이후 조선정치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나름대로 정치적인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 모색했었다』는 지금까지의 무정에 대한 인식과 전혀 다른 새롭고 생생한 증언을 하고 있다.
무정이 여운형선생의 집에 머무르던 시절 같이 있었다는 겁니다. 김명시라는 여성은 연안과 여운형선생을 연결하는 연락책이었다는 셈이지요.
군관학교시절 남구전투에 참가해 천진을 점령하는 전투에서 공을 세운 뒤 졸업,중국 포병대위로 임명됐고 22세때 포병중좌로 진급,2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가 2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면 중국공산당중에서도 원로급에 속한다. 그는 이때부터 중국공산당의 혁명역사에 몸을 싣게 된다. 무정장군의 신화는 이때부터 조금씩 만들어졌다. 『27년 장개석의 공산당 토벌때 체포되어 무창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때 무창시 중국학생등 1만여명이 대시위를 하며 즉시석방을 요구했고 무창법원 동지들의 도움으로 상해로 도피했다. 29년 상해대폭동때 폭동지휘부에 참가하다 영국인들에게 체포돼 2개월동안 투옥됐다가 석방된 뒤 홍콩으로 갔다.』 이같은 경력보다 무정이 중국혁명과 관련된 명성을 굳히게 된 계기는 유명한 2만5천리 대장정때다. 무정이 대장정에 참가한 10여명의 조선인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조선인이라는 것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무정은 대장정이 끝난 뒤 연안에서 자신이 대장정에서 혼자 살아남게 된 것을 이렇게 회고했다고 한다. S씨는 무정의 회고담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2만5천리 대장정 막바지인 36년 2월 황하를 건너야 하는 상황이 됐소. 그때 장정초기부터 참가했던 조선인은 다죽고 홍군(중국공산당군) 15군단 75사의 참모장이 돼있던 양용과 나만 남게 됐소. 그러나 양용이 황하를 건너는 선봉장으로 뽑혔소. 그러나 돌격대란 사실상 죽음의 길이었소. 황하를 건너는 교두보를 확보하기는 했지만 양은 총알이 배를 관통해 창자가 끊어지는 중상을 입게 됐지요. 그렇지만 치료도 못받고 고통만 당하다 하루만에 죽었소.』 양용의 죽음은 묘하게도 무정과 중국당 지도부의 팽덕회에게 인연을 맺어줬다. 무정은 팽덕회와 친하게 된 계기를 대장정이 끝난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양용이 죽은 뒤 팽덕회가 중앙에 문제를 제기했소. 「중국해방전투에 외국혁명가들을 너무나 많이 희생시키고 있다. 이들을 다 희생시킨다면 어떻게 되는가. 기왕에 희생된 사람들은 몰라도 더 이상 외국혁명가의 희생은 안된다」고 제기했소. 팽덕회가 나를 데리고 있겠다고 해서 그때부터 팽덕회와 같이 일하게 됐소.』 ○유일한 조선인 간부 무정과 팽덕회는 이미 30년 악주전투 때부터 인연이 있었다. 당시 중국 홍군가운데 대포를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두사람이 팽덕회와 무정이었기 때문이다. 무정은 대장정시절 중국공산당의 유일한 조선인 간부가 되면서 중국공산당과 하나가 되어갔다. 이어 37년 홍군에서 개편된 팔로군 총사령부 작전과장으로 37년 말에는 중국최초의 포병부대인 팔로군 포병단단장(연대장)으로 사실상 포병사령관이 됐다. 그의 진급은 파격적이었다. 대장정 이후 파격적 진급은 무정의 신화를 더욱 키웠고 점차 무정은 팔로군내의 조선인뿐 아니라 그의 이름을 아는 모든 조선인에게 구심점이 되어갔다. 무정은 자타가 공인하는 포병최고의 권위자가 됐다. 그의 권위는 스탈린이 41년 7월 그에게 대독전 참가를 요청함으로써 더욱 커졌다. 조선의용군 출신인 한청씨(79·심양 거주)는 당시 팔로군 보위과장이었던 고점공에게 들은 이야기라며 그때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41년 독소전쟁 발발후 7월쯤 스탈린이 특별기를 연안에 보내 무정을 소련으로 초청했습니다. 중국공산당이 동의해 수속을 밟게 됐습니다. 그런데 당시 장개석의 국민당이 반대했습니다. 중국공산당으로서는 당시 국민당과의 관계를 고려해 가지말 것을 종용했습니다.』 결국 가지않았지만 그 일은 군인 무정의 명성을 확인한 계기였다. 군인 무정은 41년이 되면서 조금씩 다른 행보를 한다. 조선독립과 관련,적극적 행동을 시작한 것이다. 41년 1월10일 태행산 동요에서 대회가 열려 화북조선 청년연합회가 결성됐다. 이 연합회는 규모는 작았지만 중국공산당과 조선인 모두에 의미가 큰 것이었다. 연합회는 팔로군소속 조선인들과 팔로군 소속이 아닌 조선인을 규합해 별개의 조선인 조직을 만든 것이었다. 42년 7월 열린 연합회 2차대회에서는 이 연합회의 조선해방 성격을 분명히 해 이름을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바꾸고 산하의 군대조직으로 조선의용군을 두었다. ○국내정치에 관심 무정은 이 과정에서 중심역할을 했다. 한청씨의 증언. 『무정은 41년 연합회를 조직할 때 주도적 역할을 했고 42년 만들어진 조선의용군 결성때는 팔로군 포병 연대장을 그만두면서까지 사령원(사령관)이 됐습니다.』 그런데 무정이 화북조선청년연합회 결성 및 의용군 창설에 적극적이었던 것이 본인의 의사인지 당의 지시인지 아직 밝혀지고 있지 않다. 이 점에서 S씨는 주목할 만한 증언을 한다. 사실 당시 조선독립은 까마득한 장래로만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무정은 달랐습니다. 가까워진 조선혁명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정이 중국 해방전선에서 투쟁하면서도 항상 조선의 해방을 염두에 두었다는 의미다.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촉진위원회」라는 것입니다. 조선공산당이 이미 서울에서 만들어져 있는 것을 통신을 통해 금주에서 전해들은 만큼 그것은, 조선공산당을 부인하는 행동이었습니다.
『44년 겨울에 벌써 무정은 독립이후의 조선정치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무정은 「소련군대가 전쟁에 참전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러시아 사람밑에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러시아말을 잘하는 양용이 있어야 하는데」라며 안타까워 했습니다.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를 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안했던 때입니다.』 조선정국에 대한 민감한 관심을 갖고 무정은 45년 11월말쯤 조선의용군 간부 70여명과 함께 평양역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이북의 정세는 그에게 우호적이 아니었다. 이상.. 제 1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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