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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신. 이오시프 스탈린. 독재의 최고봉. 제 12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04 2019-11-05 04:46:46

관료제 내부의 무능을 잡으려고 스탈린은 레닌그라드 당에서 두각을 나타낸 급진파 안드레이 즈다노프를 기용한다.


 

즈다노프는 지금 관료제의 상태가 전반적으로 개판인 건 당원들이 정치와 당의 역사에 대해 개념이 없어서 그런 것이고 지역당 조직 내부가 대중들과 유리되어 있어서 민주적인 참여가 제한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당시 공산당에서는 "님 뭔 소리 하시는 거죠?" 라고 통할 만한 급진적인 주장을 하였다.


 

즈다노프는 심지어 당 조직 내부에서 상급자를 비밀선거로 뽑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펼치는데, 스탈린은 이에 흡족해하면서 당원들을 이 수단으로 통제하고자 노력하며 각지에 "님들 정치교육 빨리 좀 돌리셈." 하는 공문을 발송한다.

 

그리고 즈다노프와 스탈린의 합작품으로 나온 것이 바로 1936년의 스탈린 헌법이었다. 그리고 그 즈음하여 스탈린의 교시가 하나 등장하는데, 바로 붉은 군대 사관학교 연설에서 행한 "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라는 말이었다.(이는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는 간부가 결정권을 독점한다는 의미는 아니고, 이제 산업화 열심히 해서 최신 기술 많이 들여놨는데 기술을 쓰는 간부들의 상태가 노답이다.

 

그러니 이제 간부의 숙련도가 소련이라는 국가를 다스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규율을 철통같이 강조해야 할 사관학교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여러모로 스탈린이 이 말을 한 의도를 극적으로 드러내준다.) 

 

즈다노프는 지금 당 내에서 중요한 건 비판과 자아비판이며, 자유로운 비판의 분위기가 만들어질 때야말로 당 관료조직의 일이 효율적으로 처리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지역당의 자치권을 억제하기 위하여 지역의 독자적인 경제 및 재정권한, 사형을 핵심으로 하는 사법권한을 은근슬쩍 박탈해놓은 상태였다.

한편 중앙당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었다. 스탈린 파벌 내부에서의 싸움이 격화되는 중이었던 것이다. 트로츠키, 부하린에 대한 강경한 처벌과 산업생산에서의 급진적 움직임을 지지하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이들 당 내 반대파들에 대한 유화적인 해결책과 온건한 산업투자를 지지했던 세르고 오르조니키제의 다툼이 격화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몰로토프는 당시 소련의 정부부처라고 할만한 인민위원회들의 회의를 주관하는 소브나르콤(소브나르콤이란: 소련 장관회의의 전신) 의 의장으로 있었고, 오르조니키제는 5개년 계획의 성공을 위해서 모든 국가자원을 먹어치우고 있었던 중공업인민위원이었는데, 몰로토프가 오르조니키제의 상관임에도 불구하고 오르조니키제 개인의 인망과 중공업인민위원회가 갖는 막대한 권력으로 둘의 다툼은 관료제 내부까지 스며들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트로츠키를 지지하던 몇몇 당원들이 어설프게 일을 벌이다가 잡히는 일이라던가, 트로츠키가 소련 내부의 지지자와 사적으로 연락하던 게 걸리는 일 등이 발생하였고, 결정적으로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이 벌어짐에 따라 온건파의 입지는 굉장히 취약해졌다.

 

이 시기 스탈린이 매우 상징적인 행보를 보였는데, 바로 겐리그 야고다를 내리고 니콜라이 예조프를 NKVD 위원장으로 앉힌 일이었다. 니콜라이 예조프는 반대파들에 대한 색출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자는 급진적인 입장을 보였는데 야고다는 그에 반대하고 적당히 몇 놈 잡아서 족치는 수준에서 끝내자고 치워버린 것.

 

야고다는 우편인민위원회라는 엄청난 중책(...)을 떠맡게 되고 공산당 중앙위 산하 당통제위원회의 의장이었던 예조프가 그 위치를 점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처음에 한 일은, 과거 트로츠키파의 일원으로 현재 오르조니키제의 충실한 부하로 변신한 퍄타코프를 숙청하는 일이었다. 몰로토프는 오르조니키제가 공격받는 것에 신나서 그를 극딜했으며, 퍄타코프는 투옥되었고 오르조니키제는 얼마 안 가서 자살한다.

 

이게 자살인지 아닌지는 여전히 논란이 많을 정도로 의미심장한 사건. 공산당 내 온건파는 이를 기점으로 몰락한다. 실제로 몰로토프가 오르조니키제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알 수 있는 사건이 있다. 바로 오르조니키제의 장례식. 이 날 얄궂게도 몰로토프가 장례식 연설을 맡게 되었는데, 처음엔 오르조니키제를 엄청 칭찬하다가 그가 퍄타코프와 같은 불순분자를 중용한 건 매우 큰 실수였다고 디스(...). 오죽 서로 안 좋았으면 장례식에서까지 그런 말을 하겠는가. 여담으로 오르조니키제가 죽기 직전 중공업인민위원회는 몇 개의 소위원회로 차츰 분리되고 있던 시점이었고 오르조니키제가 죽자 완전히 공중분해되어버린다.



거기에 예조프가 올라가자마자 한 일은, NKVD의 조직개편과 조직장악을 실시하는 일이었다. 기존의 NKVD는 각 지역의 지부들이 지역 당 조직과 사실상 협력 관계를 구성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감사가 진행될 것이라는 정보가 뜨면, 지역의 NKVD 위원장이 나서서 감사 정보를 흘려주는 막장스러운 일도 많았다. 예조프는 야고다 체제 하에서 이루어지는 이런 유착관계와 업무태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고 잔혹한 조직개편 및 숙청을 실시하였다.

 

NKVD 지부들의 상부 인원들을 싹 다 교체하고 체포하였으며 기존 야고다와 연줄이 있는 그룹은 다 갈려나갔다. 사라토프 주의 NKVD 의장인 로만 알렉산드로비치 필랴르를 소환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예조프 : 인민의 적을 체포하는 데 왜 이리 안일하게 일하시는지?

필랴르 : 우리는 체포될 필요가 있는 사람은 누구든 체포했습니다.

예조프 : 그렇소, 그러나 그들은 고립된 개인일 뿐이었지. 그리고 그들은 진정한 위협을 제기하는 이들은 아니오. 여기, 이 리스트를 읽어보시오.

필랴르 : 제가 알기로 이 사람들이 국가적대행위에 가담했다는 어떤 증거도 없습니다. 어떻게 사람들을, 아니, 당과 정부와 붉은 군대의 중요 직책을 차지한 공산주의자들을 어떤 법적 근거도 없이 체포한단 말입니까?

예조프 : 어떤 근거가 없다고?

필랴르 : 법적 근거 말입니다.

예조프 : 이 리스트를 받아가시오. 삼일 주겠소. 당신 일을 체크 할 테니..

 


필랴르는 3일 후 체포되어 그의 자리는 예조프의 심복들로 교체되었다.애초에 필랴르가 폴란드 귀족 출신이었는데다가 볼셰비키 혁명에 가담하기 전에 멘셰비키에 몸담은 이력이 있었던 것 때문에 숙청 대상으로 지목된 것이라고 현재 생각된다.
 
 
1937년 5월 16일에 체포된 필랴르는 4개월도 채 되지 않은 9월 2일에 반역죄로 유죄 선고를 받고 즉시 총살당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 스탈린 사후인 1957년에 복권되었다. 
 
 
이제 NKVD는 지역당과 공조하는 관계가 아니라 철저하게 지역당을 감시하는 역할을 자임하게 된 것이다. 이 일로 많은 지역당의 수뇌부가 멘붕을 겪게 된다.
 
 
이를테면 스베르들롭스크 주의 당 제1서기인 카바코프는 숙청 당할 때 NKVD가 진행한 심문에서 "지역 NKVD 대표 레셰토프가 교체되고 새로운 대표인 드미트리예프가 도착했을 때, 상황은 급격히 바뀌었소. 우리 발 밑의 땅이 너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어서 나는 곧바로 나와 나의 동료들의 일들이 밝혀지는 것은 오직 시간 문제라는 것을 이해했소"라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동시에 스탈린이 교묘하게 진행한 것이 바로 지역당의 제1서기들을 자리바꿈한 것이었다. 제1서기는 대충 주지사 정도 되는 위치라고 할 수 있는데, 지역의 최상급 당원이자 전체 관료제 내부에서 중급 정도에 위치하는 이들의 막강한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조치 중 하나였다.
 
 
1936년에서 1937년으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지역의 많은 제1서기들의 부임지를 싹 셔플링해버리는데 이 과정에서 이들의 권력기반이라고 할 수 있었던 측근들을 같이 데리고 이동하는 것을 금지시켜버렸다. 손발이 잘린 상태에서 완전 타지로 옮겨가게 된 이들의 권력기반은 많이 취약해지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대숙청에 기여를 한 것은 또한 1936년부터 줄곧 이어진 소련의 경제위기였다. 전통주의적 관점에서는 대숙청으로 유능한 관료진이 썰려나가면서 경제가 악화된 것이라고 여겼으나, 실제로는 경제위기가 대숙청을 불러왔던 것으로 여겨진다.
 
 
1936년 안 좋았던 날씨로 인한 작황 현황, 가뭄으로 수로가 말라붙으면서 생긴 수송 문제의 악화, 그로 인한 철도 체제의 과부하, 농업생산의 추락, 목재 생산 및 석탄 생산의 위축으로 인한 연료 수급 문제의 악화 및 건설의 둔화, 노동력 공급의 심각한 부족 등등 온갖 문제가 다 겹쳤으며 설상가상으로 동서 양쪽 파시스트 국가들의 부상으로 군비가 엄청난 경제적 부담이 되고 있었던 것.
 
 
특히 제1차 5개년 계획으로 잔뜩 들여놓은 신기술과 기계들을 운영 인력들의 미숙한 운영으로 다 말아먹는 것도 주효했다. 또한 지역의 경제주체들이 계획된 대로 예산을 집행한 것이 아니라 일단 추가집행해놓고 더 달라고 하면 주겠지 하는 식의 방만한 예산 운영도 국가의 재정에 매우 큰 부담이 되었다.
 
 
이런 경제의 종합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스타하노프 운동을 비롯한 각종 자구책들이 입안되었고 실행되었으나, 오히려 소련에 존재하던 사회적 긴장을 더욱 높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소련이 곧 있으면 제국주의 국가들과 전쟁을 할지도 모르는 급박한 상황에서, 몇 년까지만 해도 잘만 돌아가던 경제가 갑자기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은 분명 외부의 누군가가 소련을 괴롭히려고 조작한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소련을 지배했고, 그에 대해서는 누군가 책임을 져야만 했다.


1937년 2월, 17차 당대회가 시작되었다. 이번엔 아주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는데, 스탈린보다 즈다노프와 몰로토프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당대회였던 것이다.
 
 
그간 스탈린의 모호하면서도 치밀한 행보로 이들의 위상이 얼마나 올라가게 되었는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즈다노프는 주로 당 내 민주주의의 확대, 일반당원과 간부당원의 긴밀한 연결 및 협조, 경제 문제에만 천착하지 말고 정치와 교육 문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라는 말을 주로 했고
 
 
몰로토프는 반대파 놈들 족쳐야 한다는 말 위주로 이야기를 진행했다.
 
 
스탈린은 여기에 추임새를 넣으면서 이들의 이야기를 지지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당원 그룹의 리더십 대신에, 평화롭게 살고자 신중하신 당원들로 구성된 가까운 친구들의 자그마한 파벌들을 잘 이해하고 있소. 그들은 자신들의 더러운 빨래를 말리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칭찬의 노래나 불러댔고, 그리고 이따금 구역질나고 알맹이 없는 '성공'의 보고서나 보내왔소."
 
이에 대해 대부분의 당원은 당연히 자신들을 저격하는 것이라고 직감하고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 와중에 부하린과 리코프가 출당되어 반대파 사냥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당대회가 끝나고 몇 달 뒤까지도 아무나 잡고 반대파라고 하는 일은 많이 없었다. 흔히 생각하는 대숙청의 레토릭은 지나가던 사람 잡고 "얘 트로츠키주의자에요. 숙청해 주세요." 인데, 1937년 6월까지도 그런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았다.
 
 
반대파에 대한 숙청과 지역당에 대한 장악을 위한 숙청이 이때까지는 명백히 구분되던 일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물론 그렇다고 전국적인 대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자신들의 직속 상관이라고 공개비판으로 까기를 두려워했던 일반 당원들이 프라우다의 즈다노프 사설을 인용하면서 상급자에 대한 무자비한 폭격을 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몇몇 간부들이 갈려나갔고, 설상가상으로 제2차 5개년 계획이 신통치 않게 끝날 기미를 보이자 간부당원 사이에서의 연대도 무너지고 있던 중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몇몇 지역은 완전 풍비박산이 나기 시작했다.

 
 
     이어서. 제 1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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