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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제 20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17 2019-11-05 04:49:37
평양 다녀온 박헌영 돌연  "찬탁"|신탁통치 소용돌이..

 
 
 
해방의 해도 거의 저무는 45년 12월28일 밤 박헌영은 38선을 비밀리에 넘고 있었다. 일행은 모두 5명이었다. 어둠 속에서 몇 사람들이 나타나 이들을 맞았다. 일행은 소련군 지프를 타고 평양으로 향했다.

 


박헌영의 2차 비밀 평양방문이었다.

 
 
 

미소간 결정 후에도 북 반응 없자 답답|김일성·소 군정사령관 만나 지침 받아


 

 

 

박헌영이 38선을 넘은 그날 오전 한반도에는 엄청난 정치적 폭풍이 몰아 닥쳤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 방침이 서방통신을 타고 전해진 것이었다.



결정사항은 4개였다.



첫째, 한반도의 이남과 이북지역을 즉시 통합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둘째, 민주단체와 협의하여 임시정부를 조기에 수립한다.
 
셋째, 신탁통치의 조건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임시정부와 협의하여 결정한다.
 
넷째, 신탁통치 기간은 최고 5년 이내로 종결한다는 것이었다.

 


독립정부 수립이 유보되고 다시 신탁통치를 받게 된다는 소식은 전국을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목소리가『반탁』(신탁통치 반대)으로 모아졌다. 정태식 등 조선 공산당의 몇몇 간부들은 『만일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가 사실이라고 하면 우리는 절대로 반대한다.
 
 
5년은 커녕 다섯 달이라도 반대한다』고 했다. 박헌영은 공식의견을 말하지 않았지만 항상 『하루빨리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고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매진할 것』을 역설해 왔기 때문에 그 역시 반대하는 것으로 간주됐다.


좌익계열인 조선인민당은 『36년간 노예생활을 해온 우리가 또 다시 남의 노예로 살아야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고..
 
조선학술원의 백남운 역시 『조선의 완전 자주독립이 없이는 동아의 항구적 평화를 기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분명히 반대의사를 밝혔다.


우익도 일치단결해서 반대했다.


<처음엔 "반대"목소리>


김구는 즉각 반탁동원위원회를 구성했고 이승만 역시 『5개년 단축시기라는 감언에 견유치(유혹되지)말라』고 당부하고 나섰다.
 
 
한민당의 송진우 역시 『3천만이 한사람도 빠짐없이 일대 국민운동을 전개하여 반대해야한다』고 역설했다.


좌우는 물론 같은 진영내의 모든 계파 싸움도 중지되고 반탁의 전선으로 모여들었다.

반탁투쟁을 의한 민족통일전선 결성 움직임도 논의됐다. 남쪽의 좌우가 한곳으로 모이는 듯 했다.

이북에서도 조만식의 조선 민주당을 비롯해 우익계열은 격렬히 반탁을 부르짖었다. 심지어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산하의 군당 조직에서도 『신탁통치 반대』소리가 나왔었다.


그러나 박헌영이 5일간의 비밀 평양방문을 마치고 해를 넘겨 서울로 돌아온 46년 1월2일부터 상황은 급변했다.
 
 

반대입장을 견지하던 조선공산당이 느닷없이 『신탁통치는 일제의 침략과는 다른 것』이라며 『민족이 통일하여 5년이라는 기한을 단축하자』는 성명을 냈다.



신탁통치를 찬성한다는 말이었다.



반탁일색이던 이남의 우익은 당연히 비난에 나섰다. 조선공산당의 급선회로 남쪽은 격렬한 좌우대립의 수라장으로 변해갔다.



반탁의 한 목소리로 모이는 듯 했던 좌우는 완전히 결별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남과 이북을 반탁과 찬탁진영으로 확연히 갈라놓고 말았다.



찬탁과 반탁의 극렬 대립은 신탁통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47년10월까지 계속됐던 미소 공동위원회에서도 끝내 수렴되지 못했다.



결국 남쪽에 먼저 대한민국 단독정부가 들어서고 따라서 북쪽에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 돼 한반도는 두개의 진영으로 갈라서고 말았다.



신탁통치 문제는 좌우의 대립을 불러오고 그것이 남북분단의 고착으로 이어진 셈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궁금한 수수께끼 중의 하나가 박헌영의 급선회 배경이다.



지금까지는 막연히 「소련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추측만 있었을 뿐이다.



북한에 있을 때 소위 박헌영 사건에 연루된 남로당 출신이 쓴 자술서를 검토한 전 노동당 고의간부 서용규씨는 역사에 전혀 공개되지 않았던 박헌영과 김일성의 2차 회동이 바로 박의 급선회의 배경이었다고 처음으로 공개하고 있다.



『박헌영은 신탁통치 문제로 45년12월28일 밤 38선을 넘어 29일 오후 평양에 도착했고 신탁통치 문제와 기타 전반적 사항에 관해 김일성 및 분국간부들과 논의한 뒤 46년 1월2일 서울로 돌아갔습니다. 그 뒤 조선공산당은 찬탁 성명을 냈습니다.』



박헌영이 1차 때와 달리 2차 때는 김일성에게 회동을 요구하게 된 배경에 대한 서씨의 증언.



『당시 사정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신탁통치 결정이 서울에 알려진 뒤였는데도 평양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타스통신보도도 없었고 모스크바로 갔던 소 군정 민정사령관 로마넨코도 아직 평양으로 돌아오지 않아 자세한 상황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이북에 아무 움직임이 없고 서울의 소련영사관마저 「본국훈령이 없었다」며 함구만 하고 있으니까 지침이 필요하게 된 거죠.

 

조선공산당지도부도 박헌영이 평양을 가야한다고 했고 더구나 서울주재 소련 부영사 샤브신도 박헌영에게 평양행을 권했다고 합니다.』



<자세한 상황은 몰라>



박헌영과 일행은 29일 오후 평양에 도착했다.



조선공산당 서기국원 김태준, 서울대 교수이며 이론가인 박치우 등 4명이 동행했다.



김일성이 주령하·김용범·박정애·허가이 등 분국간부들과 평양교외까지 나와 「당 중앙」을 영접했다.



도착은 했지만 막 바로 현안논의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소련의 의도를 설명해주어야 할 군정의 민정사령관 로마넨코 아직 평양에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평양에 도착한 당일 박-김 회동은 개괄적인 남북정세 교환 및 입장전개에 그쳤다.



서시의 증언.



『사일 회동에서 김일성은 북조선분국 2, 3차 확대집행위원회 개최상황, 조선민주당 창당 등 이북의 정세를 실명했습니다. 박헌영은 서울중앙내부에 반탁입장이 거세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이 때 분국은 이남에서 신탁통치문제가 소란스럽고 조선공산당도 반탁입장을 밝힌 것을 알고 있었어요. 김일성은 아무 말 없이 입맛만 다시고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실행 방법 찾기 골몰>



박헌영은 이어 30일에는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은 연안파 사람들을 만나고 소 군정사령부에 가서 군정관계자와 상견례를 가졌다.



당시 고려호텔에 머무르고 있던 조만식도 잠시 만났다.

 

그날 오후에는 김일성과 박헌영이 참석한 가운데 공산당 간부들의 협의회도 있었다.



이 자리에서 박헌영은 분국 지도자들에게 서울중앙이 왜 반탁조치를 내렸는가 설명했다.



수습책을 포함해서 신탁통치 문제는 로마넨코가 평양으로 돌아온 바로 다음날인 기일에 가서나 본격적으로 논의됐다.



로마넨코는 30일 영사 발리얀 스키와 평양으로 돌아왔다.



서씨의 증언.



『로마넨코는 박헌영과 김일성을 만나 신탁통치에 대한 소련의 입장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로마넨코는 「미국이 신탁통치를 주장해, 하는 수 없이 절충안으로 5년간 후 견제를 실시하기로 했다. 후견세는 신탁통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는 박의 의견을 묻는 자리가 아니라 결정된 내용을 통보하는 자리였다.



남아있는 일은 결국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실행하는 방법을 찾는 것뿐이었다.



31일 오전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분국의 17명 상무위원이 참가한 집행의 상무위원회가 열렸다.



(서씨에 따르면 이 회의는 북한에서 4차 확대 집행회의라고』불린다.)



서씨의 증언.



『먼저 당 조직부국장 허가이가 삼상회의 결정을 보고했습니다.(허는 3차 확대 집행위에서 부국장으로 선출됐다.)



이어 신탁통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당과 근로 대중단체를 확대, 강화하고 삼상회의 결정내용과 의미를 정확하게 사람들에게 알려서 청원운동이나 지지운동을 전개하는 방법 등이 채택됐습니다.



<임시정부 구성 논의>



또 조선공산당과 북조선 분국이 46년1월2일 찬탁입장을 밝히고 다음에 단체별로 군중집회를 갖고 진정서를 내기로 했습니다.



또 2주일 이내에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릴 수 있도록 서울의 조선공산당과 이북의 북조선 분국이 소 군정과 미군정에 청원서나 진정서를 보내는 문제도 논의됐습니다.



조선공산당은 특히 주도적으로 나서 반탁진영 내부를 분열시키고 삼상회의 결정에 대한 지지여론을 확산시켜 반탁진영 자체를 고립시키도록 한다는 방침도 채택됐습니다.』



이 같은 결정사항은 동시에 반탁으로 발표된 조선공산당의 입장을 찬탁으로 변경시키는 자연스러운 방법이었다.



서씨의 증언은 두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첫째, 조선공산당이 입장을 급히 바꾼 것은 소련 및 김일성의 「행동지침」에 따른 것이었다는 점이며

 

두 번째는 이 같은 지침을 박헌영이 직접 받아왔다는 점이다.

 


이는 소문과 추측으로만 전해져 온 역사적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이어 중점적으로 논의된 것은 삼상회의

두 번째 결정인 임시정부 구성문제였다.



계속되는 서씨의 증언.



『이 논의에서는 임시정부 구성의 원칙이 마련됐습니다. 공산주의 세력과 기타세력의 비율을 2대1로 한다는 것이었죠.



이북의 분국과 이남의 좌익세력이 각각 별개의 세력으로 임시정부에 들어가고 이남의 우익 등 나머지 세력은 하나의 세력으로만 인정해 임시정부를 구성한다는 것이었죠.



한마디로 공산당이 임시정부를 리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회의를 마치고 바로 다음날인 46년1월1일의 신년연회에 참석한 박헌영은 그날 밤 평양을 떠나 다음날 새벽 서울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날 오전 찬탁성명을 냈다.



그 성명은 한반도에서의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싼 극렬한 좌우투쟁의 신호탄이었다.


 

     이상.  끝..   제 21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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