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제 20편.. |
---|
평양 다녀온 박헌영 돌연 "찬탁"|신탁통치 소용돌이.. 해방의 해도 거의 저무는 45년 12월28일 밤 박헌영은 38선을 비밀리에 넘고 있었다. 일행은 모두 5명이었다. 어둠 속에서 몇 사람들이 나타나 이들을 맞았다. 일행은 소련군 지프를 타고 평양으로 향했다. 박헌영의 2차 비밀 평양방문이었다. 미소간 결정 후에도 북 반응 없자 답답|김일성·소 군정사령관 만나 지침 받아
박헌영이 38선을 넘은 그날 오전 한반도에는 엄청난 정치적 폭풍이 몰아 닥쳤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 방침이 서방통신을 타고 전해진 것이었다. 결정사항은 4개였다. 첫째, 한반도의 이남과 이북지역을 즉시 통합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둘째, 민주단체와 협의하여 임시정부를 조기에 수립한다. 셋째, 신탁통치의 조건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임시정부와 협의하여 결정한다. 넷째, 신탁통치 기간은 최고 5년 이내로 종결한다는 것이었다. 독립정부 수립이 유보되고 다시 신탁통치를 받게 된다는 소식은 전국을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목소리가『반탁』(신탁통치 반대)으로 모아졌다. 정태식 등 조선 공산당의 몇몇 간부들은 『만일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가 사실이라고 하면 우리는 절대로 반대한다. 5년은 커녕 다섯 달이라도 반대한다』고 했다. 박헌영은 공식의견을 말하지 않았지만 항상 『하루빨리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고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매진할 것』을 역설해 왔기 때문에 그 역시 반대하는 것으로 간주됐다. 좌익계열인 조선인민당은 『36년간 노예생활을 해온 우리가 또 다시 남의 노예로 살아야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고.. 조선학술원의 백남운 역시 『조선의 완전 자주독립이 없이는 동아의 항구적 평화를 기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분명히 반대의사를 밝혔다. 우익도 일치단결해서 반대했다. <처음엔 "반대"목소리> 김구는 즉각 반탁동원위원회를 구성했고 이승만 역시 『5개년 단축시기라는 감언에 견유치(유혹되지)말라』고 당부하고 나섰다. 한민당의 송진우 역시 『3천만이 한사람도 빠짐없이 일대 국민운동을 전개하여 반대해야한다』고 역설했다. 좌우는 물론 같은 진영내의 모든 계파 싸움도 중지되고 반탁의 전선으로 모여들었다. 반탁투쟁을 의한 민족통일전선 결성 움직임도 논의됐다. 남쪽의 좌우가 한곳으로 모이는 듯 했다. 이북에서도 조만식의 조선 민주당을 비롯해 우익계열은 격렬히 반탁을 부르짖었다. 심지어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산하의 군당 조직에서도 『신탁통치 반대』소리가 나왔었다. 그러나 박헌영이 5일간의 비밀 평양방문을 마치고 해를 넘겨 서울로 돌아온 46년 1월2일부터 상황은 급변했다. 반대입장을 견지하던 조선공산당이 느닷없이 『신탁통치는 일제의 침략과는 다른 것』이라며 『민족이 통일하여 5년이라는 기한을 단축하자』는 성명을 냈다.
타스통신보도도 없었고 모스크바로 갔던 소 군정 민정사령관 로마넨코도 아직 평양으로 돌아오지 않아 자세한 상황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이북에 아무 움직임이 없고 서울의 소련영사관마저 「본국훈령이 없었다」며 함구만 하고 있으니까 지침이 필요하게 된 거죠.
조선공산당지도부도 박헌영이 평양을 가야한다고 했고 더구나 서울주재 소련 부영사 샤브신도 박헌영에게 평양행을 권했다고 합니다.』
그날 오후에는 김일성과 박헌영이 참석한 가운데 공산당 간부들의 협의회도 있었다.
로마넨코는 「미국이 신탁통치를 주장해, 하는 수 없이 절충안으로 5년간 후 견제를 실시하기로 했다. 후견세는 신탁통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 같은 지침을 박헌영이 직접 받아왔다는 점이다.
두 번째 결정인 임시정부 구성문제였다.
이상. 끝.. 제 21편에서 계속...
신고 0명
게시물신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