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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독재,괴물 인민공화국 제23편. 북한건국과정.역사
Korea, Republic of 돌통 0 208 2019-11-11 16:01:25
박헌영,­김일성 비밀회동



◎견제­협력하며 권력놓고 경쟁/미소공위 급진전에 3차 평양행/김등 고위간부들 외곽까지 마중




해방직후부터 분단까지 조선공산당의 활동은 많은 부분이 비밀에 묻혀 있다.

음모와 공작이 소용돌이치는 해방정국 탓이기도 했고 공산당의 비밀스런 조직운영 때문이기도 했다.

더욱이 서울의 당중앙과 평양의 북조선분국은 조선공산당의 두 기둥이면서도 거의가 역사의 조명 뒤안에 숨겨져 있었다.



처음으로 밝혀진 박헌영과 김일성의 6차례에 걸친 비밀회동 사실을 보면 두사람이 중요한 고비때마다 따로 만나 모든 문제의 지침과 방향을 풀어갔다.



그들은 미소군정의 지배라는 상황속에서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불가피하게 협력하면서 권력의 정점을 향한 경쟁을 벌여 나갔다.



북한에 있어서 김일성 항일 빨찌산파의 세력이 공인되는 계기가 됐던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창립이 바로 두사람의 1차회동을 통해 이루어졌고 남한을 찬탁·반탁의 소용돌이에 몰아넣고 급기야 분단으로까지 이어지게 만들었던 조선공산당의 찬탁선회도 바로 김일성·박헌영 2차회동의 결과물이었다.



그들은 이 과정에서 무수한 견제와 균형의 신경전을 벌였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한사람은 조선공산당 중앙임에도 서울에 머물며 행동을 구속받아야 하는 한계가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명목상 분국지도자에 지나지 않지만 소련의 후원을 든든한 배경으로 삼고 있는 실세였다는 「부조화」 자체가 양자의 갈등을 예고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들의 회동은 신탁통치문제로 한반도 전체가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미소 두 강대국간 냉전의 조짐이 드러나면서 더욱 잦아졌다.



이런 상황들이 바로 한반도의 장래를 결정할 중요한 요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신탁통치결정이 던진 충격파는 시간이 지나면서 초기의 혼란상태를 벗어나 가닥이 잡혀가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에 각자의 이데올로기적 입장이 채색되면서 점차 목소리는 찬탁과 반탁으로 뚜렷이 양분되기 시작했다.



○이북,찬탁기지화



이북은 찬탁,이남은 반탁진영으로 큰 방향을 잡아갔다.



이북에서 반탁에 나섰던 민족주의 계열은 조만식선생의 연금으로 구심점을 잃고 대부분 월남했으며 일부 기독교 계열과 청년학생층만이 지하로 잠복했으며 공산주의자의 찬탁지지 시위만이 거리를 메웠다.



거기에 김일성이 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됨으로써 이북은 찬탁의 기지화 됐다.



이와는 반대로 이남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처음부터 우익진영 대부분이 반탁에 나섰고 이북에서 월남한 민족계열은 반탁진영에 힘을 보태줬다.



그러나 이남의 조선공산당이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시위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자진의 찬탁입장을 알려갔다.

그 와중에 벌어진 충돌은 서로간의 감정을 고조시켰다.



이남에서의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대립은 극한 대립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이남의 반탁정서와 관계없이 신탁통치문제 논의를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착착 진행돼 갔다.



46년 4월2일 박헌영은 38선을 넘고 있었다.



2차회동 3개월만에 다시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을 방문하는 길이었다. 박헌영의 3차 평양방문은 당시 현안이었던 미소공동위원회(이하 미소공위)에 대한 공동대처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걸음이었다.



분국결성과 관련된 1차방문과 신탁통치와 관련된 2차방문처럼 고도의 정치적인 현안논의와는 조금 다른 실무적 차원의 방문이었다.



○「현안」 협상 급선무



이제 남북공산당의 모든 현안들은 두 남북지도자들의 직접적이며 실무적인 비밀협의를 통해 해결되는 방식이 굳어져감을 의미했다. 그것은 북조선 분국의 비중이 그만큼 커졌다는 의미도 되며 당시 사실상의 지침이 소군정에서 나온다는 점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기도 했다.



서용규씨는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박헌영은 46년 4월2일 밤에 38선을 넘어 3일 오후 평양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김일성등이 이북의 지도자들과 만난뒤 4월6일 오전 11시쯤 점심을 먹기전에 평양을 떠났습니다.』


박헌영의 3차방북 당시 상황은 남북공산당지도자의 밀담을 요구할 만큼 중요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46년 1월16일에 신탁통치문제 논의를 위해 미소대표가 서울에서 1주일정도 예비접촉을 가졌고 이어 1월25일부터 2월5일까지 예비회담이 열렸다.


회담뒤 발표된 성명에 따라 3월20일 서울에서 제1차 미소공위가 열렸다. 곧 회담진행절차와 방법을 알리는 1,2호성명이 나오고 29일에는 임시정부수립 논의를 위한 미소공위의 기본입장을 표명한 3호 성명이 나왔다.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됐던 미소공위의 논의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자 북조선 조직위원회내에 「조직위의 입장을 정리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동시에 남북 공동보조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됐다(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은 45년 11월 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이름을 북조선조직위원회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이하 조직위로 사용).


○임정대책등 논의


서용규씨의 증언.


『미소공위의 논의가 곡절을 겪을줄 알았는데 열흘만에 임시정부수립에 대한 3호 결정이 나오니까 조직위원회 지도부는 예상외의 순조로운 진행에 다소 놀랐습니다.


그런데 이미 미소공위가 개최된 다음날에 조직위는 집행위원회를 열어 「우리가 바라는 임시정부의 성격」을 밝히기로 결정한 바가 있었습니다.


이북에서는 미소공위라든가 임시정부수립에 대해 이처럼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남은 달랐습니다. 특히 조선공산당의 움직임이 실망스러웠지요.


뭔가 대책을 마련하는 것으로 전해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20개조 정강에 대해서도 이렇다할 반응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3월29일에 3호 결정이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남북이 공동대처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4월초 조직위 집행위원회에서 임시정부 수립대책을 논의하기로 하고 이 자리에 박헌영의 참석을 요청키로 했습니다.


곧 3월말에 두명의 연락원이 박헌영에게 파견돼 4월2일 밤 38선을 넘게 됐던 겁니다.』


박헌영은 후에 강동정치학원 정치담당부원장을 지낸 박치우와 함께 38선을 넘은뒤 미리 와 있던 박문규등과 합류했다(박치우는 49년 오대산 빨찌산 총사령부의 정치위원을 하다 6·25때 사망했다. 박문규는 일제때 토지전문가로 46년 3월 토지개혁법령이 발표되기 전에 법령작성에 참가하기 위해 이북으로 이미 올라와 있었다).


3차방북때는 2차방북때처럼 의전이나 기타문제를 둘러싼 미묘한 갈등이 없었다. 2차 방북때 서로 신경전을 벌였던데 대해 내부에서 비판과 반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씨의 증언.


『승용차를 가지고 갔던 것은 박헌영의 2차방북때 차문제로 일어난 시비를 의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리원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 3∼4시쯤 평양에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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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근처 선교리 대동교 건너편,지금의 낙랑구역까지 김일성을 비롯한 조직위 간부들이 마중나갔습니다. 김일성은 옛날에 제사공장이 있던 부근의 둑까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조직위 지도자들은 2차방북때와 달리 박헌영을 극진히 맞이했습니다. 박헌영도 지난번 왔을 때의 시비를 의식한 탓인지 이번에는 동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동지」라고 불렀습니다.』



2차방북때와는 다른 우호적인 분위기속에서 박헌영은 도착하자마자 활발하고 폭넓은 접촉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상..   끝.  제2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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