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만해도 서울에선 조선공산당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은 없었지만 활동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때였거든요.
태성수가 이 문제로 따지려니까 김일성·안길·김책·주영하·김용범 등이 나서서 「별문제를 삼지말고 넘어가자」고 달래서 논쟁은 더이상 없었습니다.』
정강정책이 전반적으로는 쉽게 타협됐지만 토지개혁부분은 논란이 많았다. 이 회의가 있기 한달전인 46년 3월5일 이북에서는 토지개혁법령이 실시됐고 회의가 열렸을 때는 토지개혁이 마무리되는 시점이었다.
당시 토지개혁의 내용은 자작농에게만 5정보의 농지소유를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지주들은 해체되어야 했다.
상당수 지주들은 월남의 길을 택하는등 반발이 상당히 거셌다.
때문에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도 『토지개혁이 너무 급진적이어서 전국적으로 실시하려면 반발이 심각해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소리도 나오기 시작했다.
서씨의 증언.
『토지문제는 주영하등 국내파가 문제를 제기했어요. 이북에서 실시됐던 토지정책이 이남에서도 실시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죠.
박헌영은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련파는 이북에서 실시된 방식을 이남에도 그대로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소련파는 「이북에는 지주소유의 토지규모가 작지만 이남은 토지규모가 크니까 이남에서 토지개혁이 완화된다면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었죠.
이에 대해 주영하는 「전국범위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면 지주계급이 많은 이남은 이북보다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남에서 이북식의 토지개혁을 강행하면 더욱 지주들의 반발이 거세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수의견도 그런 쪽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상몰수·무상분배원칙만 정해놓고 개혁에 포함되는 토지면적은 나중에 구체적으로 논의하자는 선으로 모아졌습니다.』
토지개혁문제가 매듭지어진 뒤에는 남조선 정세토론이 있었다.
먼저 박헌영의 이남의 반탁운동 실태보고가 있었다.
당시의 이남정세는 박헌영에게 결코 유리한 것이 아니었다.
46년 1월중순 미소공동위원회 개최를 위한 예비회의 개시시점을 전후로 「신탁통치의 주모자는 소련」이라는 소문이 번져갔다.
이에 스탈린은 3월23일 주소 미국대사를 불러 항의하는 동시에 삼상회의 결정 채택과정의 내막 즉,『미국이 제안한 것을 소련이 수용했다』는 내용을 46년 3월25일자 프라우다지에 보도하도록 명령했다.
이 보도가 타스통신을 통해 흘러나오자 이북에서는 당일로 정당·단체·개인들이 타스통신 지지성명을 냈다.
그러나 이남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찬탁진영은 미국을 규탄하고 나섰다. 아울러 『제국주의 미국의 음모가 드러났다』고 기세를 올렸다. 반탁기세는 더욱 커졌고 이에 따라 찬탁의 기치를 내걸고 있던 조선공산당과 충돌이 잦아졌다.
그러면서도 조선공산당은 조금씩 밀리는 형국이었다. 미군정하의 공산당이 갖는 한계였다. 조직위회의에 박헌영이 참석했을때 조선공산당의 위세는 완만한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서씨의 증언.
『이 자리에서 박헌영은 조금 궁지에 몰렸을 거예요. 일부는 박헌영에게 「반탁목소리가 높은 것은 공산당이 인민들에게 삼상회의의 결정내용을 옳게 전달하지 못한 탓이 아니냐」고 호되게 비판했죠.
또 「조선공산당측이 타스통신 보도를 잘 살려 기회로 삼지 못했느냐」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박헌영의 반응은 묵묵부답이에요.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했습니다.
박헌영이 그렇게 앉아있으니까 입이 무겁고 신중하기로 소문난 박치우가 민망스러움을 감추지못하면서 거들었어요. 「이남의 형편이 이곳 같지않다. 우리도 계속 찬탁선전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3월25일이라는 시점은 대세를 돌려놓기에 너무 늦은 시기였다」고 말을 했어요.』
회의가 마무리될 무렵의 주제는 찬탁을 더욱 활성화시키기 위해 이남·이북에서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였다.
서씨의 증언.
『4월10일 평양과 서울에서 임정수립촉진 군중대회를 동시에 갖고 그뒤에는 각 지방별로,단체별로 군중집회를 갖기로 결정이 됐습니다.
또 청원서나 진정서를 미소 양군사령부와 미소공동위원회의 의장앞으로 보내기로 합의됐죠.
그 결과 청원운동,진정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어요.
북에서는 농민단체·청년단체 등이 나서 이름과 주소를 쓰고 도장을 찍은 서명지를 모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이를 트럭으로 소련군사령부에 넘기기도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회의의 마무리단계에서는 ▲후견제인 만큼 4개국위원회는 임시정부의 상부기관으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임정을 도와주고 지원해야 한다.
▲임정의 독자적 활동을 제약하지 않고 4국은 협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등 신탁통치를 담당할 국가를 겨냥한 두가지 원칙이 채택됐다.
이 회의를 마친 다음날 박헌영은 서울로 돌아갔다. 그러나 박헌영을 기다리고 있는 이남의 정세는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46년 5월8일 미소공위가 무기휴회로 들어가고 정판사건이 터지면서 조선공산당은 수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상. 끝.. 27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