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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독재 괴물 인민공화국28편. 건국과정.역사.
Korea, Republic of 돌통 0 230 2019-11-16 15:17:13
남한「좌우합작」큰 시각차


 
&& 박헌영,­김일성 4차회동/박 “결국 미군정에 이용당한다” 김 “도와줘야”/주역인 여운형에 대한 평가도 갈려




박헌영의 평양걸음이 잦아지면서 북조선공산당 본부는 남한정치상황실처럼 되어갔다.


박헌영,­김일성회담의 주제는 대부분 점차 남쪽 정치의 핵심 현안들에 관한 것들이었다.


박헌영­,김일성회담의 의견조정방향에 따라 남측의 정국이 흔들렸다.


46년 6월29일 열린 북조선 공산당협의회에서 토론된 좌우합작문제는 당시 남한정국의 핵이었다.


여운형과 김규식이 주도하는 좌우합작이 시작된 것은 46년 6월초였다.


6월 중순이 되면서 좌우합작은 김규식,한민당의 원세훈,인민당의 여운형,신민당의 허헌의 4자회담으로 이어졌고 합작 3대원칙을 마련하는데까지 나갔다.


좌우합작이 탄력을 얻으면서 커다란 정치흐름을 만들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에 따라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나 북조선공산당의 김일성은 모두에게 「좌우합작에 대한 입장정리」가 현안으로 대두됐다.


그러나 입장정리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좌우합작의 주역 여운형에 대해 박헌영은 부정적이었지만 김일성은 그렇지 않았다.


또 좌우합작과 미군정의 관계도 논란의 대상이었다. 박헌영은 「좌우합작 배후에 미군정이 있다」고 단정했지만 김일성은 유보적이었다.


입장차이는 박헌영의 4차 평양방문에서 해소되지 못하고 박헌영의 5차방북에 가서나 마무리됐다.


때문에 협의회에서 날카로운 대립까지는 없었지만 토론에는 그같은 입장차이가 깔릴 수 밖에 없었다.


전 북한고위관리 서용규씨의 증언.


『좌우합작문제에 대해 박헌영과 김일성의 입장차이는 컸습니다.


박헌영은 좌우합작운동을 「야심가 여운형이 미군정을 등에 업고 새 국면을 주도해 나가려는 음모」라고 봤어요.


미군정은 정판사사건을 구실로 공산당을 탄압하면서 동시에 좌우의 통일전선을 분열시키기 위해 여운형을 끌어들인다는 분석이었죠.


아무리 좋게 봐준다해도 여운형은 이남,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노리는 미군정에 이용당할 뿐이라는 입장이었어요.


그러나 김일성은 조금 달랐어요. 여운형의 좌우합작을 도와줘야 한다는 입장이었어요.』


그러다 박헌영과 김일성의 입장이 처음부터 달랐던 것은 아니었다.


46년 6월 좌우합작운동이 제기됐을 때만 해도 김일성이나 이북 공산당 지도자들은 이를 부정적으로 봤다는게 서씨의 설명이다.


여운형이 주도하는 좌우합작의 첫 모임이 미군정 정치고문인 버치의 집에서 열린 것이 의심을 사는 결정적 이유였다.


좌우합작이 버치의 조종에 의한 것이라고 본 박헌영은 이 모임이 미군정의 조작이라고 비판하고 나섰고 김일성도 비슷한 견해를 갖는 듯 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입장은 곧 바뀌었다.


그렇게 된데는 이유가 있었다.


서씨의 증언.


『이남 정세가 복잡해지고 여운형과 박헌영의 관계가 좌우합작을 둘러싸고 미묘해지기 시작한 46년 6월중순 김일성은 밀사를 이남에 파견했습니다.


당시 북조선공산당 중앙위의 통일전선부 부부장인 성시백이 대남연락실 실무자 두명과 함께 서울로 잠입했습니다.


(성시백은 중국 상해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연안·중경 등에서 활동했고 특히 중국의 국공합작공작에도 참여한 베테랑 공작원 출신으로 해방이후 평양으로 들어왔다. 성,은 50년 5월 「북로당 남반부정치위원회사건」으로 서울에서 체포됐다. ­중앙정보부,『북한 대남공작사』72년판)


그 전,달인 5월에도 정황파악을 위해 북조선 임시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의 비서실장이 서울로 밀파됐지만 그때만해도 좌우합작운동이 없었기 때문에 상황이 바뀜에 따라 다시 밀사를 보낼 필요가 생긴 거죠.


성시백은 5∼6일 정도 서울에 머물면서 좌우합작운동을 집중적으로 조사했습니다.


박헌영·김규식·엄항섭·조소앙·백남운·허헌 등 좌우를 막론하고 여러 인사들을 두루 접촉했죠.


그런데 좌우합작에 대한 박헌영의 조선공산당과 여운형의 인민당의 얘기가 정반대였습니다.


성시백이 여운형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여운형 주변인사들의 얘기는 「여운형의 입장은 좌우합작이 시급하고 미소 공위재개도 중요한만큼 미군정을 등에 업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박헌영은 「이 상황에서 미군정을 업자는 것은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채우려는 것밖에 안된다」는 정반대의 주장을 폈습니다.


성,은 평양으로 귀환하면서 여운형의 기자회견내용이 담긴 신문을 가져왔지요. 그때부터 이북,지도부의 여운형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기자회견 내용은 :「민주주의 통일정부 수립은 오직 남한에서의 좌우합작의 토대위에서 이북과의 합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 기자회견을 본 김일성은 「신문자체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여운형의 견해가 옳다」고 입장을 피력한 것으로 당중앙에서 얘기가 돌았습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협의회에서 박헌영의 얘기가 전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결론을 안내린 상태에서 「좌우합작에 미군정이 깊숙히 개입한 것은 틀림없지만 여운형이 미군정에 이용당할지는 두고보자」는 방향으로 의견이 기울어졌다.


29일 한차례 열린 협의회 외에 공식회의는 없었다.


모스크바 방문전 박헌영은 김일성과 한차례 밀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는 특히 박헌영이 5차회동후인 46년 7월 들어서 발표할 「미군정에 적극적이며 폭력적으로 대응하는 새로운 전술」,즉 「신전술」이 집중 토론됐다.


조선공산당이 46년 7월 발표한 신전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우리가 미군정에 협력해왔으며 미군정을 비판함에 있어서 미군정을 직접 치지 않고… 간접적으로 미군정을 비판하였으나 앞으로는 우리가 이런 태도를 버리고 미군정을 노골적으로 치자… 지금까지 미군정과 그 비호하의 반동들의 테러에 대하여 그저 맞고만 있었으나 지금부터는 맞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정당방위의 역공세로 나가자. 테러는 테러로,피는 피로써 갚자.』(「남로당총비판」,김남식의 『남로당연구』)


서씨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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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과 김일성의 밀담에서는 자유로운 의견개진이 있었습니다. 정판사사건,좌우합작,미군정 탄압공세에 대한 대응방안 등이 주제였지요. 미군정 탄압에 강력히 맞서겠다는 구상을 박헌영이 이때 처음으로 언급했습니다.


후에 발표되는 신전술이 그것이었습니다. 박헌영은 「이제 미군정에 대해 비 합법투쟁을 강력하게 전개해야 할 시점이 됐다」고 역설했습니다. 신전술에 대해서는 박헌영과 김일성의 견해차가 두드러졌다고 합니다.


「아직은 합법적인 투쟁을 해야할 때」라는 것이 김일성의 의견이었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박­,김 5차회담으로 미루어졌습니다. 박헌영은 다른 지도자들과도 현안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도 했습니다만 대개 비공식적인 회담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최창익이나 한빈 등 신민당측 사람들과는 현안문제에 대한 입장차가 상당히 컸답니다.』



이런 저런 의견을 교환한 뒤 박헌영은 46년 7월1일 김일성,허가이와 함께 모스크바 방문길에 올랐다.




            이상.     끝.   이어서 29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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