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신 이오시프. 스탈린.독재의 최고봉. 24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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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침략으로 일어난 독소전쟁으로 소련은 또다시 잿더미가 되었으나 종전 3년 만에 경제를 전쟁 전 수준으로 회복시킨다.
그가 죽은 50년대에도 소련의 GNP 경제성장률은 평균 7%, 소련의 국민소득 대비 투자율은 28%로 아주 높은 수준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자세히 살펴보자. 60년대까지도 소련은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나 70년대부터 경제가 침체되기 시작한다.
(70년대 소련의 경제성장률은 3.7%였다.) …그래도 소련은 붕괴되기 직전(1990년)에도 한국보다 국민소득이 훨씬 높았다.
1990년 당시 소련의 1인당 GNP는 9300$ 대였지만 한국의 1인당 GNP는 5800$ 대였다. 지금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의 반밖에 안되는 러시아를 보면, 소련보다 얼마나 몰락했는지 알 수 있다.
(이걸 역으로 뒤집어 본다면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체제를 전환했을때 부작용이 심각했다는 얘기도 된다.) 덧붙여 저 당시 서방의 국민소득은 1만달러 ~ 2만달러였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도 나중에 국가 주도로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소련과 아시아국들의 성장에는 비슷한 면이 많지만, 아시아국들은 미국이라는 거대시장을 잘 이용한 반면, 소련의 경우에는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것이기에 이 시기의 소련의 경제성장은 더더욱 경이적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소련이 해외 시장이 봉쇄된 것은 사실이지만 많은 인구가 있었고 드넓은 땅에서 자원이 쏟아져 나왔다.
또, 소련은 혁명과 내전으로 잿더미가 되기 이전 제정시절에는 GDP만 따지면 프랑스보다도 더 높은 세계 5위였다.
유럽에 비해 떨어진 것은 사실이나 세계적으로 강대국 임에는 틀림없었다. 아예 식민지로 전락해버린 우리나라와는 넘사벽의 차이가 있다.
또, 내전으로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된 것은 맞지만 원래 역사적으로 그런 쑥대밭 국토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GDP 성장률은 높아지게 마련이다.
2차대전 이후 50~60년대의 전세계가 GDP 성장률이 쩔었던 것은 전후 수습의 탓이 크다.) 이후 신생 국가들의 산업화 모델이 되었다.
가령.. (김일성 역시 중공업화를 신나게 추진했다. 하지만 김일성의 중공업화 정책은 소련과 달리 실패하고 말았다.
소련의 공업화는 소비재 위주가 아닌 중공업이라 규모의 경제가 중요한데 북한 같은 작은 나라에서 수출목적으로 많이 생산하는 것도 아니고 수입대체로 자력화 목적인데 그런 생산력 수준으론 경제적 생산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 이건 소련-중국간의 갈등과 소련의 붕괴에 따른 석유 수입통로 봉쇄 등이 원인이긴 했다. 하지만 체제 내의 무능으로 동력을 잃은 것도 역시 사실.) 그리고.. (소련을 벤치마킹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이정우 교수의 일방적 주장으로 단순히 신문 기고일 뿐이므로, 타당한 근거가 갖추어져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은 일본의 일본 본토나 만주국에서 이루어진 민관 합동 개발 모델을 본땄지, 스탈린 식의 민간 기업은 없는 공산주의식 개발모델을 본따진 않았다.)
그것은 바로 1941년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을 당시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와 같이 우랄산맥 인근에 있는 공장들을 가동하여 독일군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에 필요한 탱크나 비행기 등을 대량 생산 할 수 있었다.
독소전쟁 시기 소련은 놀라운 성과를 달생했다. 무론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랜드리스라 하여 미국이 소련에게 상당한 물자를 제공한 것도 영향이 있었지만,
소련 경제는 1942년 후반 여섯 달 동안 독일이 그해를 통틀어 얻을 수 있었던 생산 수준에 도달했을 정도로 전쟁 수행에 성공적으로 헌신했고, 그 수치는 주목할만 했는데, 그 반년 동안 소련은 15,000대의 항공기와 13,000대의 탱크를 생산해냈다.
즉 탱크와 항공기 생산에서 엄청난 성과를 올려 독일군의 침략을 상대했던 것이다.
독소전쟁 당시 소련의 대량 군수물자 생산은 1930년대 공업화가 기반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인민을 갈아넣어 만든 공업화.
그러나 저런 초고속 성장을 밀어붙이기 위한 인민들의 희생은 너무나 어마어마했고, 인민들의 희생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특히 농업 정책에서는 저 닥치고 밀어붙이기가 잘 통하지 않았고, 집단화의 부작용 때문에 결국 소련은 망할 때까지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뭐, 그래도 국가가 안정된 다음에는 식량을 수입해서라도 국민들이 식량부족에 시달리지 않게 하기는 했다. 집단화 직전의 소련의 농업상황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이는 블라디미르 레닌과 니콜라이 부하린이 강력히 추진한 신경제정책(NEP)에 의해 농업부분에서 자본주의적 요소가 상당히 도입되었기 때문이었다. 부하린은 실제로 농민들에게 "농민 여러분, 부자 되시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스탈린도 처음엔 부하린의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그러나 물론 이후에 부하린은 농업정책에 대한 이견으로 숙청되었다.) 농민들은 고무되어 부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고, 그래서 농업생산량도 증대하고 부농(네프만(NEPman)/쿨라크)도 생겨났으나,(쿨라크는 단순히 부농이란 뜻보단 계급의 적으로 통했다. 스탈린 시대에 생겨난 건 아니고, 제정 러시아 시대 때에도 반동적인 성향의 농민들을 칭했고 적백내전 당시 붉은 군대에 식량을 숨기거나 병력 제공을 거부하거나 백군과 내통하는 부농들을 뜻한다. 쿨라크 판정 기준도 한심한 게 잘산다는 기준이 자기땅에 도와 줄 일꾼을 둘 이상 쓰거나 가축이 3마리 이상이면 부농이다.(1927년 소련 재무부 기준) 나중엔 소수민족에 대한 편견으로 폴란드인이면 반드시 쿨라크다란 소리도 나왔다.) 문제는 다른 부문에 비해 그 속도가 더딜 뿐만 아니라 그 부산물로 생긴 부농들은 정권의 위험요소였다. 사회주의 이론상 부농들을 그냥 놔두는 건 모순되었고(실제로 부하린도 집단농장화 자체는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속도 조절을 하자는 것.) 자연스럽게 추진하면 50년이 될지 100년이 될지 모르는 공업화 추진을 위해선 "내가 아니면 안된다." 생각한 스탈린은 1929년 계급의 적 쿨라크 박멸을 선언한다. 농촌에서 만들어지는 잉여를 모조리 공업생산에 투입할 목적으로(여기서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농촌의 잉여 역량을 도시로 흡수하는 과정 자체는 공업화 과정을 거친 모든 나라가 겪은 과정이다. 공업 지역에 밀집한 대규모의 노동력을 부양할 식량이 필요한 동시에, 농업 구조를 개편해서 농업의 노동력 효율을 높임으로써 생기는 잉여 노동력으로 공업 노동력을 충당해야 하니까... 멀리는 인클로저 운동이 이러한 공업을 위한 농촌 착취의 효시로 꼽히고, 가까이는 60~80년대의 한국에서도 추곡수매의 저가정책을 통해 농촌 착취는 일어났다. 다만, 초고속 공업화로 인한 농촌 공동화가 지극히 격심한 것으로 평가받는 한국에서도 스탈린 당시의 소련같은 대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 전국의 모든 농토를 소프호스와 콜호스라는 집단농장으로 재편하는 강제적인 농업집단화가 행해진다. 해당 지역마다 농민집단의 상위 4~5%의 쿨라크를 때려잡으라고 할당량(?)까지 내려온다. 실제론 상위 15%~20%에 해당하는 필요 이상의 중농까지 때려잡았다. 어쨌든 자기 땅을 잃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이 부분은 카를 마르크스도 농민의 소 부르주아지적 특성이라고 규정한 바 있는데, 공장 노동자야 어차피 공장은 자기 것이 아니었고,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월급 받으면서 일한 것이니 국유화가 되건 말건 큰 불만이 없지만 농업은 가족이 소유한 땅을 가족 단위로 경작할 수 있으니 집단농장화를 곧 자기 땅을 빼앗긴다고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저항할 수 밖에 없다는 것. 농민들에게 자신이 농사지을 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야 러시아 최초의 인민주의자 조직 이름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땅과 자유.) 초기에는 자기 땅을 잃은 농민들이 항의를 하였고, 그게 통하지 않자 아예 종자를 태우거나 혹은 세마리 이상 가축을 가지면 어차피 쿨라크로 몰리거나 몰수되니 가축을 굶겨 죽이거나 도축해서 숨기는 등의 태업을 하였다. 그 결과로 농기계 역할을 하는 가축과 퇴비의 부족으로 다음해 흉년크리로 이어졌고 심지어는 이판사판이라 생각한 대규모의 농민 반란이 일어나서 군대가 출동하여 잔인하게 진압하기도 했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일어났고, 1932년~33년 기근은 절정에 달해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소비에트 연방에서 50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인구학적 타격은 2차대전 전에도 통계치에 수정을 가할 정도였다. 1937년 소련의 공식 인구 집계는 1억 5600만이었는데 경악한 담당자 쿠르만은 사망자, 군인, 탈소련자들의 통계를 갖다붙혀 1억 6830만으로 허위보고했다. 그리고 그 조작된 자료를 보고 대기근의 여파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 서방에서 1930년대 후반 소련의 기존 인구 증가 속도론 1억8천800만이 넘어야 되는데 2천만 명 정도가 모자르자 희한하네~라고 생각할 정도였다.참고로 니얼 퍼거슨(하버드 교수) 著 <증오의 세기>를 참고 하시라.. 기존의 이에 대해 정권을 잡았던 스탈린의 책임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으나 그것이 농민반항을 억압하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었는지 혹은 그저 자연재해와 행정적 문제로 인한 불가피한 것이었는지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대체로 서방측 학자들은 전자라고 주장하지만, 러시아인들은 대체로 후자를 주장한다. 스탈린과 소련 체제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도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스탈린이 아니라 자연재해가 원인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우크라이나 대기근 이전 1921년 적백내전 직후 기근에 이은 발진티푸스로 500만명 이상 죽은 참사가 근거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도시에서 굶어죽었고 우크라이나 기근은 농촌에서 굶어죽었다. 강제 공출로 도시는 상대적으로 멀쩡하고…(이 당시 농담으로 '볼셰비즘(20년대)와 공산주의(30년대)의 차이는 볼셰비즘은 도시에 식량이 없고 공산주의엔 지방엔 식량이 없는 것'이란 소리도 나왔다.) 1932년 곡물 생산은 1930년보다 20%가 감소한걸로 추정하고 가축수는 1929년 기준으로 1935년엔 절반에 불과 했다고 한다. 명백한 인재다. 이러한 삽질은 이념상 이유로만 단순히 농업집단화를 추진한게 아니라 공업화 추진으로 기계류 등을 수입하는데 모자라는 외화를 식량 수출로 땡기기 위해서 농촌에 공출량을 늘리는데 개인적으로 갈취하기보다는 집단농장에서 공제하기 편한 사정도 있었다. 자주 그러했듯이, 다가오는 재앙의 최초 신호는 소련 경제에서 가장 불우한 부문인 농업으로부터 왔다. 소련 농촌은 불균형한 경제 정책과 늘어나는 정부 지출을 지탱하기 위해 새로운 세금 부담의 타격을 고스란히 받았다. 비효율적인 집단농장 체제 하에서 농업은 침체되었고 나라를 먹여 살릴 능력이 없었다. 축산업의 상황은 특히 나빴다. 심지어 소련 공식 통계로 보아도 1953년 초 전국의 가축 두수는 1939년보다 늘어나지 않았고,이는 1928년보다 3분의 1이 더 적은 수였다. 1953년의 돼지 수는 1928년과 동일했다 전국의 농촌에서 모스크바로 쏟아져 들어온 수많은 민원에는 절망적인 상황이 묘사되어있다. 이런 외침 중의 일부는 스탈린의 귀에까지 닿았다. 1952년 10월과 11월에 접수되어 스탈린에게 전달된 편지 중에는 소련의 다양한 지역에서 집단 농장의 고초를 토로한 불만들이 담겨 있다. 수의사인 홀로도프는 사실상 무보수 강제 노동을 하고 있는 집단농장 노동자들에게 일할 의욕을 복돋을 동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썻다.우리 언론에 따르면, 우리는 농업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실제로 현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호밀 수확량이 보잘 것 없습니다. 추수 과정에서 막대한 낭비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감자는 어느 정도 수확되었지만,과연 감자 수확이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공장에서 동원된 노동자들이 감자를 캡니다 이 기간에 그들은 평소 임금의 50퍼센트밖에 받지 못합니다. 이 일에서 얻는 이득이 없기 때문에 감자를 빠짐없이 캐내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최대한 빨리 일을 끝내려고 맨 위에 있는 것들만 대충 걷어낼 뿐입니다. 이제 축산업을 보겠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말하는 것조차 창피스럽습니다. 연간 우유 생산량은 사료를 먹인 젖소 한 마리당 1,200~1,400리터를 넘기지 못합니다. 한 마디로 우스울 뿐입니다. 이는 보통 염소 한 마리에서 나오는 양입니다. - 올레* *레브*크의 「스탈린」(삼*출판사-유*영 분 옮김) 503p~504p 불만이 만연한 근본 원인은 소련의 낮은 생활수준이었다. 집단화로 생산성이 심하게 저하된 농업은 위기와 침체 사이에서 휘청거렸다. 스탈린 정부는 1931년~1933년과 1946년~1947년처럼 국토의 상당 부분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부 특정 지역이 기근이나 식량 곤란을 겪고 있음을 매년 인정해야 했다. 심지어 가장 호시절에도 평균 식사량이 빈약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로 빵과 감자에 의존해 살았다.스탈린 사망 직전에 소련 시민은 주로 밀가루 음식(주로 빵)약 500그램 소량의 곡물 감자 약 400~600그램 우유나 유제품 약 200~400그램을 소비했다. 이 식품들이 전형적인 식단의 대부분을 이루었다. 그 이외의 식품, 특히 고기는 특별한 때에만 먹을 수 있었다. 일인당 육류 및 육가공품 소비량은 하루 평균 40~70그램, 지방(동물성,식물성 기름,마가린,돼지비계) 소비량은 15~20그램이었고 여기에 설탕 몇 티스푼과 약간의 생선을 더하면 끝이었다. 평균적인 시민은 달걀을 6일마다 1개꼴로 먹을 수 있었다.이런 식단은 수용소 수감자의 표준 식단과 거의 동일했다. 이는 중앙통계국에서 산출한 기관인데 이 기관은 항상 정치적 압력을 받고 있었으므로 현실을 장밋빛으로 착색했을 가능성이 높다. - 올레* *레브*크의「스탈린」(삼*출판사-유*영 분 옮김) 544p 공산품의 공급 사정 역시 마찬가지로 나빴다. 공장에서 제조한 물건의 가격은 전통적으로 특별히 높게 매겨졌다. 사람들은 단순하고 상대적으로 값싼 물건을 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물건을 살 형편이 되는 사람도 드물었다. 예를 들어 1952년에 가죽 신발을 구입할 수 있는 농민은 4명 중 1명꼴이었다. 가장 간단한 신발과 옷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소련 인민의 고난을 초래한 또 다른 요인은 공업과 농업 부문의 지극히 열악한 노동 조건이었다. 물질적 보상 체계가 제대로 수립되지 않아 작업장에는 폭압이 만연했다. 노예 노동은 물론 굴라크 내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행해졌지만, 자유롭다고 하는 산업 및 농업 노동자들도 흔히 강압적인 환경에서 중노동을 했다. 일부 산업의 작업장, 특히 가장 임금이 낮고 위험한 곳에서는 청년들을 강제 동원하여 작업이 수행되었다. 동원을 회피할 경우에는 노동 수용소의 징역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1940년부터 1952년까지 약 1700만 명이 지각, 근무지 근무이탈, 동원 회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여기에 작업장 규율 위반 건수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 엄청난 숫자는 소련 노동자들의 이타적 열정을 과시하는 의기양양한 선전이 거짓이었음을 폭로한다 1930년대처럼 스탈린은 재난이 발생하고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빵 부족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된 '파괴자들'과 '투기꾼들'을 비난하는 쪽을 택했다. 크렘린 지도자에게는 전시에 쓰기 위해 인정사정없이 비축했던 엄청난 '전략적' 곡물이 있었다. 이제 그는 이 곡물을 소비용으로 방출하기를 거부했다. 스탈린은 또 외국에서 식량을 구매할 수 있는 금 1500톤도 국고로 갖고 있었다. 몰로토프와 미코얀은 나중에 스탈린이 금의 매각을 금지했다고 회고했다. 심지어 스탈린은 국제연합의 국제부흥국이 러시아에 보내려 한 식량 지원도 마다했다.(우크라이나와 백러시아에 대한 일부 지원은 허용했지만), 그와 동시에 스탈린은 소련 식량을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들뿐만 아니라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게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스탈린은 산업 재건과 재무장에 돈을 쓰기 위해 소련 인민들, 특히 농민과 노동자들을 피폐화하는 전전의 정책으로 돌아갔다. 1946년과 1948년 사이에 농민들에게 물린 세금은 30% 증가했고, 1950년까지 150% 급증했다. 국가는 또 소련 인민들로부터 '빌렸다'고 하지만 사실은 몰수한 수십억 루블에 이른 전쟁 공채를 상환하는 것도 거부했다. 대신 새로운 재건 공채가 생존을 우해 발버둥치는 시민들에게 강요되었다. 블라**라프 M.주**의 「**한 제국」(**넷-김*섭 분 옮김) 163p~164p 베리야가 체포된 후 흐루쇼프는 재빨리 지휘자의 자리로 진입했다. 하지만 말렌코프가 눈에 잘 띄는 직책인 각료회의 의장 자리를 여전히 차지하고 있었다. 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그를 스탈린의 후계자로 계속 여겼다. 1953년 8월 8일 최고 소비에트에서 연설하면서 말렌코프는 '향후 2-3년' 내에 소련 인민들의 생활 수준을 급진적으로 개선시킬 깜짝 놀랄 만한 몇가지 정책을 발표했다. 1928년 이래 처음으로 국가는 군산복합체와 기계제작 부문을 희생하고 농업 및 소비재 관련 경제에 대한 투자를 증가시키기로 약속했다. 말렌코프는 또 농가와 개인 부속지의 크기를 늘릴 뿐만 아니라 질식할 것 같은 농업 세도 반으로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이 조치들은 1년 내에 농민들의 가처분 소득을 거의 배가시켰다. 심각한 식량 문제가 계속 소련을 괴롭혔으나, 적어도 농민들은 터무니없는 재산세를 모면하기 위해 과수원을 줄이고 소를 도살하는 짓을 그만두었다. 대신 그들은 고기와 우유를 시장에 다시 팔기 시작했다. 말렌코프는 러시아 전역의 무지크(러시아어로 농부, 촌놈을 뜻하는 단어)들이 농촌의 밀주로 가득 채워진 술잔을 그의 건강을 위해 건배하는 등, 레닌 이래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이렇듯 집단농장에 종속된 농민들에게 지불되는 극도로 낮은 수매가로는 국가에 생산물이 모조리 몰수되었다는 뜻이다. 농촌을 착취함으로써 중공업과 무기 분야에만 집중 투자하고 공업부문 또한 무보수 강제노동이 만연하여 스탈린식 산업화는 국민에게 고통을 주었다. 소련 지도자들은 스탈린이 죽은 즉시 오랫동안 과제로 남아있던 경제 개혁에 착수하였다. 농축산물에 대한 수매가를 인상하고 농민에 대한 세금을 인하하여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농민들의 숨이 트였고 농업생산성이 개선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삽질로 인해 반세기 뒤인 80년대 소련 농업인구는 전체의 20~22%, 미국 농업인구는 전체의 4~5%인데도 미국은 수출 잘하는데 소련은 자기 수요도 안되었다라는 참혹한 이야기도 있다. 물론 기후 탓도 있다. 러시아의 최남단이 미국의 북쪽 지역이다(...). 그러나 러시아도 추운 나라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남쪽 지대에 농사가 매우 잘 되는 비옥한 땅이 있고(그리고 또한 2010~2011년에 아랍권의 민주화 운동 이유도 있다.) 소련은 유럽에서도 가장 풍요로운 곡창지대라는 남캅카스 지역,(북캅카스는 러시아의 영토이고 남캅카스는 현재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구성되어 있다.)이어서~ 나름대로 농사 잘 되고 자원도 풍부한 흑토지대인 우크라이나도 가지고 있었던 점을 보면 결국 당시 소련 정부가 농업 계획을 잘못 수립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그러나 하나 알것은 이점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데, 소련의 경우 미국이나 중국과는 달리 농업하기 좋은 풍부한 곡창지대는 러시아 남부와 우크라이나 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두 나라에 비해 조건이 좋지 않았다.) 어쨌든, 스탈린 시대 소련 인민들의 엄청난 희생은 헛되지 않아서 1960년대부터는 소련도 그럭저럭 살기 괜찮은 나라가 된다. 냉전 이후 미국에 비해 딸리는 경제력으로 미국과의 군비경쟁을 하면서 국가 재정의 태반을 군사부분에 밀어 넣기는 했어도 국가가 퇴보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여기서 우리 한반도의 사정과 비교해보면 사실 한국에서는 공산국가 가운데 북한이 제일 유명하여 북한과 자주 비교를 하기는 하나, 사실 북한이 이상할 정도로 막장인 거다. 소련은 물론 다른 동유럽 국가들도 그런 대로 무난하게 사는 편이었다.이와 반대로 북한 또한 경제적으로 무난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1960~1980년대의 소련 노동자들의 삶을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제도적으로 보장받았다. 무상의료, 무상교육, 1년에 3주간의 유급휴가, 그리고 차례를 꽤 오래 기다려야 하지만.(신혼부부들은 꽤 오랜 시간을 단독주택을 배정받기 위해 기다려야했고, 배정받기 전에는 한국처럼 여러 가구가 단칸방에서 같이 지내기도 했다.) 월봉급 10%가 넘지 않는 임대료를 받는 국영 임대 주택. 그리고 소련 전체에서 최저/최고 봉급차는 6배에 불과했다. 참고로 현재 미국의 경우는 수천배가 넘는다. 당시 소련은 보건의료도 무상이었고 약도 국가보조금이 나와서 매우 저렴했다. 괜히 냉전시대 서구 좌파들이 스탈린을 찬양했던 건 아니라는 얘기. 이상... 25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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