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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역사를 지켜보면서..08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41 2020-01-25 13:54:29

07편에 이어서~~

 

 

늘 그래왔지만 글을 쓰는 시간만은 모든 잡념을 걷어내고 편안한 마음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면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의사에게 잠약을 날마다 주문했고, 의사는 수면제를 계속 복용하면 건강에 좋지 않다면서 약을 주기를 꺼렸다. 하지만 나는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바라건대 1년만 살면 된다면서 의사를 졸라 수면제를 얻어내고는 했다.



북한은 나와 덕홍을 강제로 탈환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중국정부의 공식발표로 납치가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지자 2월 17일, ‘변절자는 갈테면 가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래서 나는 민족을 배반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김정일과 그 추종자들이라고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공교롭게도 북한이 나를 갈테면 가라고 한 날은 나의 74회 생일이었다.



대사관측에서 생일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걸 안 나는 곧 중지해줄 것을 부탁했다. “성의는 고맙지만 가족들이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데 무슨 파팁니까. 파티준비를 그만 두십시오. 생일잔치를 벌이면 더 괴로울 뿐입니다.” 그러자 덕홍이 내게 말했다. “형님이 그토록 사랑하시던 가족까지 희생시키며 내리신 결단에 존경을 표하며 저는 관포지교의 정신으로 이 몸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고맙네 덕홍이. 자네의 그 말은 어떤 화려한 생일파티보다도 나를 기쁘게 해주는 것 같네. 기왕에 왔으니 우리가 바라던 일은 기필코 성사된다는 신념을 갖고 마음을 굳게 다지자구.” “형님.....” 그때까지 나는 망명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내가 북한체제를 지지할 때는 북한을 주체로 하여 조국을 통일할 것을 꿈꾸었지만, 그때도 나는 북한만이 아니라 남북한 전체를 조국으로 알던 사람이다.



그런데 하물며 북한통치자들과 그 체제를 반대하고 남한으로 넘어온 지금, 남한을 주체로 하여 전 조선을 내 조국으로 알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문제는 북한을 주체로 하여 전 조선을 내 조국으로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남한을 주체로 하여 전 조선을 내 조국으로 생각할 것인가 하는 데 차이가 있을 뿐이지, 전 조선을 내 조국으로 생각하는 데는 우리 민족 누구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내 조국의 북쪽 땅으로부터 남쪽 땅으로 넘어오는 걸 왜 하필이면 망명이라고 해야 하는가, 내게는 그게 불만이었다.



자기 조국을 배반하고 다른 나라로 가야 망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제법상으로 남북이 두 개의 주권국가로 되어 있는 까닭에 망명이라고 해야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하여, 나는 몹시 불만스럽지만 내가 망명했다고 하는 걸 수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덩샤오핑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덩샤오핑이 중국의 흐루시초프 같은 변절자라고 못마땅하게 여기며 욕을 해대었지만, 나는 덩샤오핑이야말로 소련과 같은 길을 가는 중국을 구원한 위인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나는 국상을 당한 중국의 친한 벗들과 슬픔을 같이 나누지 못해 유감스러웠다. 내가 국제비서로서 평양에 있었다면 어떻게 달래든 김정일을 중국대사관으로 조문 보냈을 것이다.

 

며칠 후 들리는 말로 김정일은 조문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김정일이 분별없고 도리도 모르는 굴레 벗은 망아지 같다고 생각했다.

 

3월 7일, 첸치천 중국외교부장이 우리 사건의 진상을 조사한 후 국제법과 국제관련에 따라, 그리고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에 도움이 되도록 처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이어 한국정부는 나와 김덕홍을 1개월 이상 제3국에 체류시킬 것이라고 중국측에 통보했다. 3월 14일, 중국의 리펑 총리는 기자회견을 갖고 우리 사건과 관련한 중국의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피가 마르는듯한 시간이 계속되었다.



밥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았고 잠을 자도 자는 게 아니었다. 3월 15일, 한국정부와 중국정부의 협상팀이 우리를 필리핀으로 이송하는 데 합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사관 직원들이 우리를 위로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입니다.” 그 말은 물론 옳다. 나도 그걸 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되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한국정부의 적극적인 노력과 중국정부의 배려로 나와 김덕홍은 1997년 3월 18일 필리핀으로 떠나게 되었다. 베이징에 있으나 필리핀에 있으나 가족과 떨어져 있는 건 마찬가지였으나, 이상하게도 내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베이징에 있을 때는 내 사랑하는 가족들, 생사도 알 길 없는 가족들이 평양과 그리 멀지 않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다소나마 위안을 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바다 건너 먼 필리핀으로 떠나야 한다고 하자,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더욱 간절해져 마치 온몸을 면도칼로 그어대는 것 같았다. 그런 고통 속에서 나는 두 번 죽더라도, 가족을 모두 희생시키더라도, 인민을 무참히 굶겨 죽이고 자신의 더러운 권력욕에 사로잡혀 민족의 운명을 마음대로 우롱하는 김정일과 그 추종자들을 반드시 타도해야 하며, 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던 지난날들과 달리, 처음부터 뭔가 잘못되지 않았는지 하는 우려가 생기기 시작했다.



맏딸은 내가 개척한 사상을 가지고 역사에 길이 남을 근사한 문학작품을 쓰고 죽겠다고 늘 말해왔고, 둘째딸은 면역학 연구에서 혁신을 일으키고 있었다. 앞날이 유망한 그들의 희망을 짓밟은 채, 그들 모두가 이룰 수 있는 일을 합친 것보다 더욱 소중한 일을 내가 과연 해낼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내 행동은 도덕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으며, 평양에서 목숨을 끊는 것보다도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짓눌러왔다.



게다가 민족을 위한 소임도 다하지 못하고 목숨을 끊는다면 죄는 더 커지지 않겠는가 하는 따위의 잡다한 생각들로 나는 줄곧 괴로웠다. 그 괴로운 시간 속에서 나는 이 말을 자주 되뇌었다. ‘그렇다. 기왕에 김정일의 마수를 피했으니 살아서 그가 망하는 걸 보자.’ 마음을 정리하고 나서 우리는 필리핀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는데도, 나는 곧 안절부절못한 채 어쩔 줄을 몰랐다.



이렇게 무거운 내 마음을 과연 비행기가 실어 나를 수 있을까. 그러면서 문득 이 마당에 무슨 시라도 쓰겠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나는 부끄러운 기분으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상..  09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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