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my~god 예수의 말씀.. 06편.. |
---|
51. 그의 따르는 자들이 그에게 여쭈어 가로되, "언제 죽은 자의 안식이 이루어지리이까? 그리고 언제 새 세상이 오리이까?"
그가 그들에게 가라사대, "너희가 기다리는 것은 이미 와 있노라. 단지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할 뿐이니라."
해석 - 도반들이 새로운 세상이 언제 올 것인지를 묻자, 바로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 천국이지만, 단지 우리가 매일 누리고 있어 그 가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단지 천국이 매일 대가 없이 주어짐으로써 매 순간순간이 천국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영혼 역시 어떤 수고와 노력이 없이 태어남과 동시에 존재하고 있던 것이어서 그것의 진짜 그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52. 그의 따르는 자들이 그에게 가로되, "스물넷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에서 예언하였나이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당신을 지목하여 말하였나이다." 그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면전에 있는 살아있는 자를 보지 아니하고, 죽은 자들만을 이야기하는구나!" 해석 - 살아 있을 때의 예수는 당시 유대인들의 유대교 경전인 율법 즉, 현재 성경의 구약부분에 저항감을 갖고 있었다. 52절은 율법에 대한 당시 예수의 감정이 잘 드러난 구절이다. 당시 유대인들이 믿는 율법을 기록한 선지자들은 오래전에 이미 죽어서 살아 있지 않았다. 예수는 살아 있는 자신의 설교를 듣고 깨달음을 구하려 하지 않고, 유대인들이 오히려 그의 설교를 과거에 쓰여인 율법을 정당화하는데 이용하는 것에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다.
53. 그의 따르는 자들이 그에게 가로되, "할례가 유용합니까, 유용하지 않습니까?" 그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만약 할례가 유용하다면, 그 아기들의 아버지가 그 아기들을 그들 엄마의 태 속에서부터 이미 할례 된 채로 낳게 하였으리라. 차라리 영 속에서의 진정한 할례야말로 온전하게 유용하리라."
해석 - 유대의 율법 속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려는 도반들을 꾸짖는 구절이다. 예수는 지속적으로 율법에 거부, 저항감을 드러내고 있다. 53절 또한 예수는 도반들이 살아 있는 자신의 가르침을 이미 죽은 선지자들의 기록인 유대인들의 율법을 정당화하는데 끼워 맞추거나 이용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는 구절이다.
54. 예수께서 가라사대, "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너희 것임이라.
해석 - 당시 예수가 활동하던 시대의 생활상을 54절에 대입한다면 이 구절에서 "가난한 자"는 세속적인 것을 탐하는 욕구가 없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떤 사람을 부자로 보았을까에 대하여 생각해볼 수 있게 되는데 110절에서 그 간접적인 예시를 찾아볼 수 있다. 예수는 110절에서 나라를 발견한 사람과 부자를 연결 짓고 있다.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 예수는 도반들에게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탐구하고 정진하는 것을 멈추지 않도록 끊임없이 가르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비추어 보면 예수는 54절에서 큰 부와 권력에 대한세속적인 욕구를 절제하면서 자신의 내면과 자신 주위에 있는 것들의 가치를 제대로 깨달음으로써 인간의 내면과 밖에 이미 존재하는 하늘나라 즉, 천국을 느끼게 될 것이라 하고 있다. 천국이 어디 하늘에 있을까... 예수는 3절에서 이미 그렇지 않다 하고 있다. 천국은 각자의 마음속에 있으며, 각자의 밖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하였다. 단지 우리가 세상의 욕구에 찌들고 탐욕에 눈이 먼 나머지 지금 이 순간의 가치와 내 눈으로 보는 세상의 아름다움과 나의 정신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여 여기가 천국임을 알아채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눈으로 새를 보고, 그 새의 소리를 듣고, 그 새가 날아가는 하늘을 보며, 그 하늘의 색을 보며, 그 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그것들이 존재하는 곳이 천국인지는 죽은 후에야 그 가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나라가 너희 것임이라"하는 것은 하늘나라를 소유하게 된다는 직설적 의미가 아니라기보다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빛의 소중한 가치를 알게 되고, 느끼게 된다는 의미라고 해석된다.
55. 예수께서 가라사대, "누구든지 그의 아버지와 그의 엄마를 미워하지 않는 자는 나를 따르는 자가 될 수 없나니라. 그리고 누구든지 그의 형제와 그의 자매를 미워하지 아니하고, 또 나의 길에서 그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해석 - 55절은 예수 자신과 함께 하고자 하는 도반들이 가져야 할 마음자세에 대한 구절이다. 예수는 내면에 존재하는 생명으로써의 빚의 존재를 알아보고, 진짜 천국을 발견하기 위한 탐구의 길을 가는 것이 매우 어려운 길임을 "가족에 대한 미움"과 "십자가를 짊어지는 행위"를 이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예수는 55절에서 자신과 함께 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려면 최소한 가족을 미워할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능히 짊어질 각오가 되어야 함을 선언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과거나 현재나 아버지와 엄마를 증오하고, 형제자매를 증오하는 것은 상상하기 쉽지 않을뿐더러, 마음먹기도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예수가 말한 '미워하다'의 의미는 자신에게 합당한 자기 되려면 부모형제를 진짜로 버리거나 미워해야 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내면의 빛(생명, 나라, 천국)을 발견하기 위한 탐구를 할 수 있으려면 부모와 형제에 대한 의지로부터 벗어남, 떠남, 홀로서기, 단독자가 되는 것을 능히 해내려는 마음가짐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로마의 지배를 받던 그 시대 최고의 형벌인 십자가에 처형을 당할 죄인이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으로 걸어가는 그 심정이야 말로 인간이 가장 최후에 느낄 수 있는 공포와 두려움의 감정일 것이다. 예수는 바로 이런 한계를 넘어서는 각오가 없이는 자신의 설교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자격이 없다고 하고 있다. 아무런 노력이 없이도 누구든지 자신의 내면과 자신 근처에 항상 존재하고 있는 천국을 느낄 수 있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면 예수는 굳이 55절의 말씀과 같은 것을 했을 리가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성경에 등장하는 십자가에 관한 부분이다. 예수가 생존하던 로마시대의 십자가형은 법정 최고형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이는 성경에 등장하는 십자가 처형을 오직 예수만이 당했던 형벌이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 성경의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것을 인류 구원으로 연결시키는 부분은 논리적으로 매우 지나친 비약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그 전에도 이미 시행되고 있었으며, 동시대에 행해지던 법정 최고형이었기 때문이다.
설사 십자가 처형 부분이 구약에 등장한다 하더라도 차이가 없다. 이는 예수는 살아 있을 때에 유대의 성경인 지금의 구약, 즉 모세의 율법에 계속해서 저항을 하였고, 지역적인 개념의 천국을 부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구약의 율법을 부정하고, 구약의 천국을 부정했던 예수가 구약의 율법에 맞추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처형을 자처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55절의 예수의 말씀에 비추어 본 즉, 현재 예수가 지금도 살아 있다면 오늘날 목사가 헌금을 언급하고, 십일조를 내고, 십계명을 지키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설교하는 목사와 교회들을 향해 "사기"라는 표현을 했을 것이라 짐작이 된다. 3절과 51절에서 예수는 천국은 바로 내 안에, 그리고 밖에 이미 와 있지만 단지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 하고 있다.
56.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세상을 알게 된 사람은 누구든지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재번역 -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세상을 이해하게 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시체만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시체를 발견하게 된 사람에게는 누구든지 이 세상이 합당치 아니하다."
해석 - 현재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을 때, 다르게 표현하면 해탈의 경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을 때 그러한 눈에 비친 세상은 죽음이 가득한 세상으로 보이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이는 세상 자체가 죽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탐욕의 아비규환의 상태에 빠져 자신과 세상의 진정한 가치를 모른 채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한 상태의 인간들의 눈에 그것이 아무리 가까이 있다 하더라도 천국이 보일 리가 없으며, 그들의 마음에 세상의 빛이 생명으로 느껴질 리가 없는 것이다. 예수와 같이 깨달음을 얻은 이의 눈에는 이러한 탐욕에 찌든 세상이 곱게 보일 리가 없는 것이다.
57.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의 나라는 좋은 씨를(심은 밭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도 같다. 그의 원수가 밤중에 몰래 와서 그 좋은 씨들 사이에 가라지(잡초 씨앗)를 덧 뿌렸다. 그러나 그 사람( 밭의 주인)은 종들을 시켜 그 가라지를 뽑게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들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내버려 두어라! 너희가 가서 가라지를 뽑으려 하다가, 가라지와 더불어 좋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왜냐하면 추수의 그 날에는 가라지는 현저히 드러나게 마련이므로 뽑히어 불사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해석 - 9절에서 말씀을 "씨"로 비유하고 있다. 57절에서는 "좋은 씨를 가진 자" 즉, 좋은 말씀을 들은 자, 혹은 말씀을 알고 있는 자를 '아버지의 나라'와 같다고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57절의 아버지의 나라는 예수의 좋은 말씀(복음)을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되겠다. 또한 29절의 "영혼이 육신으로 인하여 존재케 된 상태, 혹은 영혼과 육체가 하나가 된 상태를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는 곧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 계속 강조되고, 반복되고 있는 나라, 천국, 자기 자신의 내면과 밖에 존재하는 것의 가치에 대한 깨달음으로 표현되는 것들과 매우 밀접함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좋은 말씀(복음)을 들었거나 알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굳이 지금 시점에서 억지로 나누려 하지 말 것을 말씀하고 있다. 훌륭한 가르침을 받고 자신의 내면과 밖에 존재하는 것의 가치들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그때에 이르러 바르지 않은 소리를 들은 이들과 확연하게 그 차이가 드러날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57절에서 "좋은 씨"와 "잡초 씨앗"을 선과 악으로 비유한다면 예수가 선과 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예수는 어느 한쪽을 제거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때가 올 때까지 함께 공존하도록 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57절은 현재 기독교가 선과 악의 공존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는 매우 대비되는 구절이다.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고통을 겪기에 생명을 발견하는 자여 복이 있도다."
해석 - 55절은 도반들이 예수 자신을 따르고, 자신의 가르침을 받기에 합당한 자가 되려면 어떤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지를 매우 절실하게 보여주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58절을 통하여 예수는 55절의 고통을 감내하고 세속적인 욕구를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천국(유여 열반의 상태, 육체를 지배하는 영혼의 영역)을 알아본 도반들은 복이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또한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도 있다. 세속적인 탐욕을 극복하고, 끊임없는 탐구를 통하여 내면의 빛인 영혼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 느끼게 되는 고통을 겪는 자는 복이 있다. 여기에서 고통은 영혼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됨을 통하여 세속적인 탐욕에 빠져 살아왔던 지난날 자신의 시체와 같은 삶을 돌아보면서 느끼게 되는 정신적 고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56절에도 "시체"라는 표현 등장하고 있다.)
5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살아있을 동안에 살아있는 자를 주의 깊게 보라. 너희가 죽어서는 아무리 살아있는 자를 보려고 하여도 그를 볼 수 없을 터이니. "
해석 - 인간 예수는 철저하게 부활을 부정하였으며, 종교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음을 매우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 구절이다. 인간 예수는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자신의 설교를 들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 이유는 죽는 순간 이 세상과는 단절되어 더 이상은 자신이 해줄 것이 없음을 그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60. 예수께서 유대지방으로 가실 때 양을 들고 가는 사마리아 사람을 보시게 되었다. 그는 그의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 사람이 양을 메고 가는구나!" 그들이 예수께 가로되, " 분명 저 자는 그 양을 죽여서 먹을 것 이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저 자는 저 양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먹을 수 없을 것이다. 반드시 죽여서 그것이 시체가 된 후에야 먹을 것이다." 따르는 자들이 가로되, "딴 수가 없겠지요. 산 채로 먹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렇다면 너희 또한 그러하다. 자신을 안식 상태에 있도록 노력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도 시체가 되어 먹히우리라."
해석 - 60절의 마지막 부분의 한글해석을 영어원문에 충실하게 했다. 56절에 등장하는 "시체"가 60절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예수는 이전 구절에서 안식의 상태를 의미하는 천국 또는 나라는 각자의 밖에 혹은 그 내면에 이미 존재하고 있으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60절에서 예수는 내면과 외면적으로 인간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생명을 지속하게 해주는 빛과 영혼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을 갖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고, 항상 이러한 것들을 깨달은 상태에 있도록 노력해야 빛과 내면의 가치를 제대로 알게 될 것이며, 탐욕의 아비규환에 빠져 시체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게 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상.. 07편에서 계속~~
신고 0명
게시물신고
|
오늘 지금 이시각도 나의 고향이 있는 북한에서는 나의 친척들과 추억을 함께 쌓은 소싯적친구에서 학창의 친구들, 힘들었지만 활기에찼던 군복무시절에 우정을 쌓았던 친구들 그리고 한동네에서 같은 삶의 터전에서 스쳐간 수많은 인연들이 돌통이 색퀴가 흠모하여 칭송하고 빨아대는 김일성과 그 자손들에 의하여 현대문명을 향유하기는 고사하고 인간의 초보적 권리인 하루 세끼 끼니조차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또한 김일성과 그의 후손들의 사리사욕과 이기심으로 말미아마 핵전쟁의 위협속에 늘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상황이다.
이러한 인간쓰레기들을 빨아대는 돌통이의 행위는 그러지않아도 충분히 어려운 북한사람들의 삶에 보다 더 큰 고통을 가증시키는 행위이며
그러지 않아도 김정은의 핵위협속에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삶에 더큰 고통을 가증시킨다
이 쓰레기색퀴는 이런 김씨 인간백정들을 항일영웅이라 추앙한다
이 쓰레기 새퀴는 탈북자들이 이런 쓰레기같은 김씨일가들보다 못하다고 지꺼렸다
이러한 연고로 아스피린은 돌통이를 인간쓰레기, 바퀴벌레색퀴라고 부른다
나의 댓글 내용 중에 네놈이 한 짓이 아닌것이 있으면 정정당당히반박을 해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