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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my~god 예수의 말씀.. 07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69 2020-06-24 18:41:20

61. 예수께서 가라사대, "둘이 한 침대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다면 하나는 죽을 것이요, 하나는 살 것이니라."

살로메가 가로되, "남자여! 당신은 도대체 뉘시니이까? 당신은, 마치 누가 보낸 아주 특별한 사람처럼, 내 침대에 올라와 동침하고 나의 식탁에서 식사를 하시 나이다."


예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나는 분열되지 않은 전체로부터 온 사람이다.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서 몇 가지의 물건을 받은 사람이다."


살로메가 가로되, "나는 당신을 따르는 자이로소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기에 내가 너에게 말하노라. 누구든지 분열되지 않은 전체 속에 있으면 빛으로 가득 차게 되고, 누구든지 분열되면, 어둠으로 가득 차게 되나니라."


 

해석 - 61절은 29절, 48절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같다고 할 수 있는 구절로써,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둘이 한 침대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다면 하나는 죽을 것이요, 하나는 살 것이니라." 이 부분은 영혼과 육체가 하나 된 상태, 육체의 세속적인 탐욕의 욕망을 극복한 상태, 영혼의 모습이 육신을 통하여 드러나게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6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나의 신비로운 가르침을 듣기에 합당한 자들에게만 나의 신비를 드러내노라.

너의 왼손이 너의 오른손이 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라."

 

해석 - 55절에서 등장한 "합당하다"라는 단어가 62절에 다시 등장하였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자 즉, 예수 자신에게 합당한 자들만이 자신에게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고 하고 있으며, 그들에게만 설교를 할 것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예수는 자신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62절을 통하여 나는 다음의 두 가지를 떠올리게 된다. 우선 62절의 첫 번째 구절은 마태복음 18장 12~14절과는 다소 반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리고 62절의 두 번째 구절은 현대 교회에서 사실상의 교세 확장의 수단으로 전락한 전도를 당시 인간 예수가 보았다면 바람직하지 않게 여겼을 수 있다는 점이다.


 

63. 예수께서 가라사대,   "돈을 많이 지닌 부자가 있었다.

그가 말하기를, '나의 돈을 투자하여 뿌리고, 거두고, 심고 하여 나의 곡창을 곡물로 가득 채우리라. 그리하여 부족함이 없이 살리라.'

이것들이 바로 그 부자가 그의 가슴속에 간직한 생각들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밤 그는 죽었다.

귀 있는 자는 들어라.

 

해석 - 63절은 평범한 사람이 열심히 땀을 흘려 일하는 것이 세속적인 탐욕의 욕구가 아님을 매우 분명하게 예수가 제시하고 있는 구절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닮고 있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첫줄에 "돈을 많이 지닌 부자"라는 표현에서 매우 잘 드러나고 있다.

63절은 한 마디로 인간이 죽을 때까지 집착하는 큰 부와 권력에 대한 세속적인 탐욕의 욕구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세속적인 탐욕에 찌들어 있는 인간들을 시체로 표현했던 예수의 인생관이 매우 적나라하게 표현된 구절이다.

63절에서 예수는 누구든지 죽는 순간 그가 평행 탐욕의 결과로 쌓았던 부귀영화가 모두 부질없는 것이 됨을 말함으로써, 부활을 통한 죽음 후의 세계를 단적으로 부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3절은 "일장춘몽"이라는 한자성어를 떠올리게 하는 구절이다.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 예수가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영혼과 육체는 무엇인지, 왜 존재하는지, 무엇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무엇을 위하여 사용해야 하는지, 나의 영혼의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하여 끊임없이 탐구해야 하며,

그것들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때에(그것을 보는 눈을 갖게 될 때에, 성스러운 영혼이 빛으로 가득 찰 때에) 비로소 바로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의 내면과 밖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천국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천국을 찾는다면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내 안에 그리고 밖에 있음을 예수는 강조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현재라는 모든 순간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 전하고자 하고 있다.

 

63절은 기독교 교회가 2,000년 동안 천국과 부활을 대가로 십일조와 헌금을 요구해왔던 것이 얼마나 큰 사기인가를 보여주는 구절이다.

그리고 기독교 교회와 목사들이 부활과 원죄를 팔고 받은 헌금과 십일조는 모두 그들의 안락한 삶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헤아릴 수 있는 중요한 구절이다.


 

64. 예수께서 가라사대,   "한 사람이 손님을 받고 있었다. 그가 만찬을 준비한 후에 손님들을 초청하기 위하여 종을 내보냈다.

그 종이 최초의 사람에게 가서, 그에게 말했다: '저의 주인께서 당신을 초청합니다.'

그 사람이 말하였다: '몇몇의 상인들이 나에게 빚을 지었습니다. 그들이 오늘 밤 나에게 오기로 되어 있습니다. 나는 가서 그들에게 상환의 지시를 해야만 합니다. 죄송하지만 만찬을 사양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 종은 다음 사람에게 갔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말하였다: '저의 주인께서 당신을 초청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종에게 말하였다: '나는 방금 집을 하나 샀습니다. 그래서 하루 동안 볼 일을 보러 가야 합니다. 저는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종이 또 한 사람에게 가서, 그 사람에게 말하였다: '저의 주인께서 당신을 초청합니다.'

그 사람이 종에게 말하였다: '나의 친구가 결혼합니다. 제가 그 피로연을 마련해주기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갈 수가 없을 것 같군요. 죄송하지만 만찬을 사양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 종이 또 한 사람에게 가서, 그 사람에게 말하였다: '저의 주인께서 당신을 초청합니다.'

그 사람이 종에게 말하였다: '나는 최근 큰 농장을 하나 샀습니다. 그래서 소작료를 거두러 가야 합니다. 저는 갈 수가 없을 것 같군요. 죄송하지만 사양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 종이 돌아와서 그의 주인에게 아뢰었다: '당신께서 만찬에 초청하신 분들은 모두 사양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주인이 그의 종에게 말하였다: '길거리로 나아가서 네가 만나는 누구든지 만찬에 올 수 있다고 하면 데리고 오라.'

거래인들(비지니스맨)과 상인들은 나의 아버지의 자리들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라. "


 

해석 - 64절은 도마복음과 비교해 볼 때 현재 성경의 신약이 얼마나 변질되어 있는가를 매우 명확하게 보여주는 대표적 구절이라 할 수 있다.

64절은 55절과 62절, 63절의 내용과 연결되는 구절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듣기에 합당한 자는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는 자라고 예수는 두 구절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64절 또한 그러한 예수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64절은 세속적인 부에 대한 관심과 세상사에 눈이 멀어 현재 바로 이 순간의 진정한 가치 혹은 인간 내면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이들을 탓하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초청을 받을 때에 그 초청에 응할 상황에 있지 아니하거나, 준비가 되지 아니한 사람은 만찬에 올 수 없다고 하고 있다.

이를 예수의 설교에 비추어 바꾸어 보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예수 자신으로부터 설교를 듣는다고 하여 모두가 자신의 현재의 삶과 영혼의 가치(나라, 천국)를 느끼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응당 그때에 그 가르침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는 자들에게만 자신의 신비로운 설교를 들을 자격이 있으며, 천국을 발견할 자격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64절은 예수가 천국운동을 함에 있어 강권하지 않았으며, 자발적으로 듣고자 하는 이들을 상대로 하였음을 알 수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이는 현재 기독교의 전도활동과는 매우 배치되는 모습이다.


 

65. 그가 말하기를,   "포도원을 소유한 한 사람(고리대금업자)이 있었나니라.

그 사람이 포도원을 소작농부들에게 빌려주어, 그들이 포도원을 경작하게 하고,

그리고 그는 그들로부터 소출을 거두려 하였다.

그는 그의 종을 보내어, 소작농부들이 종에게 포도원의 소출을 주도록 하였다.

그들은 그의 종을 붙잡아, 그를 때리고, 거의 죽일 뻔하였다. 그 종이 돌아와 그의 주인에게 아뢰었다.

그의 주인이 이르기를, '아마도 그들이 너를 알아보지 못한 것 같구나' 하였다.

그는 또 다른 종을 보내었다. 그러자 소작농부들은 그 종까지도 마찬가지로 구타하였다.

그러자 그 주인은 그 아들을 보내며 이르기를, '아마도 그들은 나의 아들에게는 충분한 존경심을 보일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그 소작농부들은 그가 이 포도원의 상속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붙잡아 죽여버렸다.

귀가 있는 자는 누구든지 들으라!"

 

해석 - 65절은 부재지주들과 소작농들의 대립관계에서 나타나는 무모하고 세속적인 탐욕과 재물에 대한 집착에서 발생하는 상황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예수의 비유가 잘 나타난 구절이다.

그리고 세상사에 대한 탐욕과 세속적인 욕구를 극복하여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과 자신의 내면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도록 탐구해야 함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예수의 가르침과 그 맥이 닿아 있는 구절이다.

성경의 공관복음서들은 도마복음 65절의 원형을 변질시켜 매우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66. 예수께서 가라사대,   " 집 짓는 자들이 버린 바로 그 돌을 나에게 보여다오. 그것이야말로 모퉁이의 머릿돌이로다."


해석 - 큰 부와 권력에 대한 세속적인 욕구를 극복하고 끊임없는 탐구를 통하여 빛과 내면(영혼)의 가치(의미)를 깨닫는 것이야 말로 사람이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많은 일들 중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생명이 살아 숨 쉬고 있는 현재 이 순간을 세속적인 탐욕에 속박되지 않고 살아가는 자가 나라(천국)를 알아볼 수 있다.

현재 자기 영혼의 의미를 탐구하는데 삶을 바치는 것이야말로 인생을 가장 지혜롭게 살아내는 것이다.

66절을 통하여 끈임 없는 탐욕과 세상에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을 할애하느라 자신이 지금 누리는 모든 것들과 영혼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죽어서 천국을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어리석은 일일 수 있음을 새삼 느끼게 하는 구절이다.


 

67. 예수께서 가라사대,   "누군가 모든 것을 안다 해도, 자기를 모르면, 모든 것을 모르는 것이다. "


 

해석 - 67절은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을 알아볼 때 진정 강한 자가 될 수 있으며, 자신의 영혼(자아)의 세계와 그 가치를 깨닫는 자가 진정 위대한 자라고 할 수 있다...

혹은 원초적으로 탐욕적 존재로써의 자신에 대한 인정과 그 세속적이며, 물질적 욕구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구절이다.

 

인류 역사에 있어 4대 성인이라 하면 석가모니, 예수, 공자, 소크라테스를 흔히 말한다.

이들은 장관도 아니었으며, 총리도 아니었으며, 기업가도 아니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죽은 자들 가운데서 현재까지도 살아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영향력을 인류사회에 끼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부활이며, 영생이 아닐까...

그런데 이들은 왜 성인이라 불리고 있을까...

그들이 단지 매우 많은 지식을 겸비한 인물들이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학자들은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들만 유독 성인의 반열에 오른 인물들로 인류가 인정하는데 주저함이 없게 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지식 탐구의 가장 마지막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또한 중요한 영역일 수도 있는 자기 자신의 내면적 가치 또는 내면의 세계에 탐구의 완성도가 보통의 인간들이 다가서기에는 어려울 만큼의 경지에 오른 인물들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는 영원한 휴식에 들어서는 순간까지 자신과 함께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정신세계의 가치를 알아본다는 것이 쉽게 이룰 수 없는 영역일 것이라는 것과 그 맥이 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6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미움을 받고 박해를 당할 때에 너희는 복이 있도다.

너희가 박해를 당하는 그곳에는 아무 자리도 발견되지 않으리라."


 

해석 - 재물과 높은 직위에 대한 탐욕으로부터 마음을 멀리 할 때에 진정한 복을 얻을 수 있다는
근원적해탈에대한말씀의구절이다.

 

개인적으로 68절을 나는 이런 의미로 받아들인다.

일단 박해의 의미를 말 그대로 "개인이나 조직의 의하여 집단적 또는 조직적으로 학대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면, 이러한 박해는 육체적인 박해와 정신적인 박해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로마제국에 의하여 지배를 받고 있던 당시 상황을 볼 때, 예수를 따르는 도반들이 유대교나 로마제국에 의하여 많은 육체적 핍박과 박해를 받았을 것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도반들이 육체적인 박해를 받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예수가 계속해서 강조하는 자기 밖과 안에 존재하는 빛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복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외면의 빛과 내면의 빛의 진정한 가치에 눈을 뜨게 된다면 재물과 높은 지위에 대한 욕구가 차지할 자리가 없게 됨을 의미한다.

 

나머지 하나는 정신적으로 자신의 내면에 대한 박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박해를 일종의 정신적인 갈등이나 고통으로 놓고 본다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재물과 지위에 대한 탐욕을 느끼는 감정과 그것을 억누르는 감정이 공존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러한 소유의 욕구를 억제하거나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탐욕을 느끼는 내면의 자신에게는 일종의 정신적인 고통으로 이해될 수가 있다.

자신에 대한 이러한 내면적인 고통이나 핍박을 극복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진정한 가치의 세계들을 알게 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이 아닐까 한다.

내면적 박해의 부분은 다음 69절에서 직접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와 같은 면에서 68절은 66절의 모퉁이의 머릿돌과 67절의 자신을 알게 되는 것과 일정 부분 그 맥이 닿아 있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69.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슴속에서 박해를 당하는 그들이여, 복이 있도다! 그들이야말로 아버지를 참되게 알게 되는 자들이로다.

굶주린 그들이여, 복이 있도다! 배고파하는 자의 배가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로다."

 

해석 - 68절에서의 박해가 다시 등장하고 있다.

69절을 통하여 68절의 박해는 육체적, 외면적 박해에 관한 것이며, 69절의 박해는 정신적, 내면적 박해에 관한 것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내면적 박해를 당하는 것이라 함은 달리 표현하면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영혼의 굶주린 고통을 겪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미 68절 후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69절의 "박해"와 관련한 구절은 큰 부와 권력에 대한세속적인 욕구와 탐욕의 욕구를 극복하기 위한 내면적인 고통(갈등, 박해)을 감내할 수 있어야 예수가 앞부분에서 언급한 3절의 "나라"와 51절의 "새 세상"을 알아볼 수 있으며, 또한 24절과 50절에서 언급한 "빛"을 알아볼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있다.

그리고 69절 후미에서 예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배고픔을 참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고 있다. 이는 곧 정신적인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는 구절이다.

 

69절을 통하여 교회 자체의 부의 축적에만 관심을 갖고, 교회를 목사의 소유물로 이용하며, 굶어 죽는 이가 매년 수를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많은 북한 동포를 외면하는 일부 한국 기독교가 얼마나 변절된 종교관의 집단인가를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70. 예수께서 가라사대,   만약 너희가 너희 내면에 있는 것을 끊임없이 산출해낸다면, 너희가 가지고 있는 그것이 너희를 구원하리라.

만약 너희가 그것을 너희 내면에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너희가 너희 내면에 가지고 있지 못한 그 상태가 너희를 죽이리라."

 

해석 - 70절은 24절의 "빛" 그리고 56절, 60절의 "시체"와 관련된 구절이다.

외면의 빛은 천국이나 다름없는 세상이 살아 숨 쉬게 해주는 생명과 같은 존재다.

인간의 내면은 영혼의 세계다. 그 영혼이 계속해서 그리고 끊임없이 활동함으로 인하여 인간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내면을 또 다른 자신만의 세계, 나라, 천국이라 표현할 수 있다.

밝게 빛나는 빛이 인간의 외적인 생명이라면 영혼은 인간 내적인 생명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인간 내면의 빛이라 할 수 있다.

외면의 빛과 내면의 빛은 인간의 존재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거나 태어남과 동시에 함께 존재하게 되는 것들이라는 것은 엄연한 진리이며,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간이 얼마나 무지한 존재 인가하면 그 외면의 빛과 내면의 빛이 늘 항상 존재하고 있으며,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져 왔기 때문에 그 소중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70절에 등장하는 "인간 내면에 있는 것"이라 함은

예수는 이러한 외면과 내면의 빛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도반들의 내면으로부터 끊임없이 우러나와야 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세속적인 탐욕과 세상사에 온전히 시간을 할애한 채 살아가는 시체와 같은 인간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내면에 이러한 가치에 대한 탐구의 의지가 없이 삶을 살아간다면 이는 곧 살아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시체와 같은 삶이 되는 것임을 예수는 말씀하고 있다.



이상..                          08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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