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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독립운동이여.!! 01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54 2020-08-11 03:43:08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봐야 하는 이유는.!!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  국경을 맞댄 만주에서 벌어진 항일무장투쟁의 여파

 

만주사변·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중국 관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대(군)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다면,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동북항일연군으로 대표되는 항일무장무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중국 충칭과 옌안은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기에 조선인들이 그곳 소식을 전해듣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만주와 연해주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다가 그 지역의 정세는 바로 조선의 치안상황과 직결되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등 국내 신문들에도 국경의 치안상황은 바로 보도되었고, 국경을 중심으로 한 만주 등지의 소식은 국내 민중의 입을 통해서 대중들에게 널리 전파되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1930년대 말부터 해방 전까지 국내에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 바로 ‘김일성’이었다.

 

변은진의 연구에 의하면 1930년대에 조선과 국경을 접한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김일성은 이 시기 청년학생들이 중심이 된 소규모 비밀결사에서는 거의 ‘신화적’ 존재였다.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인물들은 많았으나 그 가운데서도 유독 김일성의 이름이 두드러졌던 것은 무엇보다도 국경지대에서 직접 일본 군·경과 전투를 자주 벌여 이름이 신문에 자주 오르내렸던 영향이 컸다. 특히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전투’ 소식이 알려진 이후 김일성이란 이름은 만주의 항일무장투쟁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고, 그 때문에 일제 말기 김일성은 여운형과 함께 청년들에게 가장 관심을 끌었던 인물이 되었다.

[ 참조 : 자세한 내용은 변은진, 『파시즘적 근대체험과 조선민중의 현실인식』(선인, 2013), 5장 3절을 참조할 수 있다. ]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인물들은 많았으나 그 가운데서도 유독 김일성의 이름이 두드러졌던 것은 무엇보다도 국경지대에서 직접 일본 군·경과 전투를 자주 벌여 이름이 신문에 자주 오르내렸던 영향이 컸다. 특히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전투’ 소식이 알려진 이후 김일성이란 이름은 만주의 항일무장투쟁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고, 그 때문에 일제 말기 김일성은 여운형과 함께 청년들에게 가장 관심을 끌었던 인물이 되었다. ※ 참조 《변은진, “1932?1945년 여운형의 국내활동과 건국준비”, 한국인물연구 21(한국인물사연구회), 2014.3,


▲ ‘김일성비단’의 월경 함경북도 삼장면 습격 소식(동아일보, 1940. 5. 18.). ‘보천보 습격사건’(1937.6.4.) 외에도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사이에 ’김일성부대‘가 국경을 넘어 들어와 일본군경과 전투를 벌인 사실들이 국내 언론에 자주 보도되었다.



지금은 김일성의 항일운동 사실을 부정하거나 ‘가짜 김일성’을 주장하는 사람은 없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김일성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없지 않다.

 

특히 한국전쟁이라는 예민한 주제 때문에 김일성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다루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적어도 학계에서는 항일무장투쟁과 관련해서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아직도 동북항일연군의 활동과 관련해서 이견이 있는 부분들이 남아 있고 해석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역사적 해석을 두고 남북 사이에 여전히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부분은 남북이 공동 연구를 통해 논의를 진전시켜 가야 할 부분이다.

 

한국 사회에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해 오랫동안 금기시 되었다면, 반대로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항일빨치산 활동만을 이른바 유일한 ‘혁명전통’으로 보고 그 외의 국내외 사회주의운동과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평가를 하지 않거나 극단적으로 폄하한 측면이 있었다.

 

아직도 북한의 공식 입장이 바뀌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가 출간되면서 과거와는 상당히 달라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도 사실이다. 

 

김일성은 회고록을 통해 자신을 도와주었던 오동진, 양세봉, 손정도, 현익철 등 국민부 계열의 민족주의자들을 비롯해 임시정부, 여운형의 건국동맹이나 이재유 등의 국내 사회주의재건운동 등에 대해서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 1920년대 만주에서 독립군총영을 이끌며 무장투쟁을 벌였던 맹장 송암 오동진. 오동진은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과 ‘조선국민회’를 함께 한 동지였고, 길림시절 양세봉, 손정도 등과 함께 김일성의 중요한 후원자 중 한 사람이었다.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오동진, 손정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과거 종파단체로 규정해 거의 인정하지 않았던 한인사회당이나 상해파·이르쿠츠크파 등 초기 공산주의운동에 대해서도 그 역사성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1925년에 결성된 조선공산당과 그 후의 재건 활동에 대해서도 여전히 비판적인 관점을 취하지만 당 창건의 합법칙성을 그것대로 인정하고 있다.

자신과 대립하며 ‘종파주의’로 낙인찍혔던 인물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적이지만 종파나 분파 문제에 대해서는 그것이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나아가 국내 공산주의운동의 핵심이었던 경성콩그룹의 인물들인 김삼룡과 이현상이 김일성이 이끈 조국광복회의 국내 책임자였던 박달과 서대문형무소에서 만나 연계를 모색했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북한의 ‘반종파투쟁’ 과정에서 북한의 역사서에서 사실상 완전히 사라졌던 연안계열의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대해서도 일정한 평가를 하고 있다.



이처럼 김일성은 회고록을 통해 만주에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항일민족운동을 포용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회고록이라는 형식을 빌린 것이기는 하지만 ‘수령’이 남기고 간 항일운동에 대한 포용적 시각이나 열린 관점을 북한의 공식 역사가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처럼 북한에서 항일투쟁에 대해 새롭게 정리할 수 있는 유연한 상황이 마련된 것은 통일시대를 열어가는 상황과도 맞물려 중요한 의미가 있다. 


어찌 보면 김일성의 회고록은 “냉전해체 이후 위기 속에서 남긴 ‘마지막 유훈’”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동안 “‘주체사관’으로 인해 제약되었던 역사인식”을 김일성의 권위를 빌어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세기와 더불어』)은 북한이 향후 변화하는데 있어서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근거로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지적은 타당해 보인다.


동북항일연군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해서는 김일성의 회고록과 북한의 공식 연구뿐만 아니라 남한에서도 적지 않은 연구 성과를 이루었다. 여전히 남북 간에 간극은 존재하지만 역사적 사실의 규명이라는 차원에서는 상당한 접근이 이뤄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접근은 이제는 과거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벗어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말할 수 있게 된 셈이다.

 

0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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