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항일독립운동..!! 02편 시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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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과 만경대 김일성은 (양력)1912년 4월 15일 (음력) 2월28일 평안남도 (지금은 평양시) 대동군 만경대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성주 (金成柱)로, 그의 아버지가 나라의 기둥이 되라는 뜻으로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만경대 (萬景臺)는 원래 만 가지 경치를 볼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을 지녔으니 서울 북한산을 비롯해 만경대라는 이름의 봉우리가 더러 있는데, 북녘에서는 대동강을 발아래로 굽어볼 수 있는 산기슭에 자리잡은 최고의 성지다. 김일성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곳으로, 남쪽 사람들이든 외국인들이든 평양을 방문하면 꼭 들러보게 되는 곳이다.
그러나 그의 선조들은 전라북도 전주 출신이다. 김일성 일가는 전주김씨로 조상들이 전주에서 살았는데, 12대 조상인 김계상이 함경도로 이사했다가, 증조부인 김응우가 만경대로 이사했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우리 가문은 김계상 할아버지 대에 살길을 찾아 전라북도 전주에서 북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만경대에 뿌리를 내린 것은 증조할아버지 (김응우) 대부터였다. 증조할아버지는 원래 평양 중성리에서 태여나 어려서부터 농사를 지었는데 생활이 너무도 구차하여 평양에 사는 지주 리평택의 묘지를 보아주기로 하고 산당집을 한 채 얻어가지고 1860년대에 만경대로 이사해왔다.
김일성의 조상에 관한 얘기는 남쪽에서 손석우가 1993년 펴낸 풍수지리에 관한 책 ***터와 강준식이 1998년 펴낸 ***김씨의 뿌리 같은 책자들에도 잘 나와 있다. 전주김씨 시조인 고려시대 문장공 김태서의 묘소가 전주와 김제에 걸쳐 있는 모악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데, ***터를 쓴 육관도사 손석우에 따르면,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잘 갖추어진 천하 대명당으로, 후손 가운데 49년 동안 절대권력을 누릴 사람이 배출될 땅 기운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 후손이 32대손 김일성이었으니 1945년부터 1994년까지 정확하게 49년을 통치했던 것이다. 이 책이 1993년 출판되었는데, 김일성의 죽음을 예언했다고 해서 손석우는 '도사'로 더욱 유명해지고 책은 불티나게 팔렸다는 얘기가 나돌기도 했다. 이와 관련하여 우스갯소리도 몇 가지 전해오고 있으니 그 가운데 하나는 앞으로 혹시 남북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도 전주는 피해를 보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김일성의 시조가 묻혀있는 전주에 북녘의 미사일이나 포탄이 떨어지겠느냐는 뜻이다.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는 소작농으로 일하다가 더 잘 살아보기 위한 수단으로 만경대로 옮겨 당시 가장 천한 직업 가운데 하나였던 산당지기가 되었다. 남의 묘를 지켜주기 위해 만경대로 이사했다는 뜻이다. 그는 1878년 서른 살의 나이로 죽었는데, 얼마 뒤 지주 아들이 나타나 산당집을 팔아 치우겠다며 당장 집을 비우라고 했단다. 이에 증조할머니가 삯바느질로 모은 돈과 머리털을 잘라 받은 돈으로 17냥을 겨우 마련해 그 오두막집을 샀다고 한다. 그 집에서 손자 김형직과 증손자 김일성이 태어났으니 '엽전 17냥으로 마련한 산당집'이 뒷날 '혁명의 요람 만경대 고향집'으로 된 것이다.
이러한 만경대와 관련하여 내가 잘알던 사람이 직접 겪었던 일화 한 토막 털어놓는다. 1998년 9월 [북한사회의 이해]라는 교양강좌 시간에 김일성에 관해 강의하며 내가 만약 다음 달에 평양을 방문하게 되면 그가 태어났다는 만경대도 찾아보고 싶다는 말을 덧붙였다. 며칠 뒤 통일부관리가 집으로 전화하여 방북일정을 확인해주며 만경대는 절대 방문하지 말라고 경고 섞인 부탁을 했다. "높은 곳의 지시"라는 것이었다. 그 때는 제 1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기 전으로 방북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평양에 들어간다는 자체가 뉴스거리여서 난 이미 관계당국과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었는데 일부에서는 대학본부에 나의 신상을 캐묻기도 하고 학교수업 내용까지 엿듣는 모양이었다.
당시 그 강좌 수강생들이 400명쯤 되었는데 다음 주 강의시간마다 호소했다. "이 자리에 형사들이나 그 끄나풀들이 있으면 잘 들어라. 내가 만경대를 방문하고 싶다는 것은 김일성을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어떻게 우상이 되고 신 같은 존재로 떠받들여지는지 확인해보기 위한 취지라고 하지 않았느냐. 내 강의를 염탐하려면 제대로 듣고 똑바로 보고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국가정보원의 북녘담당 고위관리에게 팩스를 보냈다. "나는 북녘에 관해 공부하고 강의하는 학자로서 방북하게 되면 북녘 사람들이 보여주는 곳뿐만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곳을 될수록 많이 찾아보고 싶다. 교회와 절을 비롯한 종교시설, 학교와 박물관, 만경대뿐만 아니라 금수산기념궁전까지.... 그것들은 나의 연구대상일 뿐이다. 북녘에 이용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 허락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국가정보원에서는 학자로서 연구목적으로 방문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겠다는 회답을 주었다. 내 스스로 깜짝 놀랄 만큼 의외였다. 그래도 아내는 옥바라지 할 자신이 없다며 말리고, 동료교수들은 내가 감옥에 가면 교수 한 사람 새로 뽑는 게 번거롭다는 농담으로 우려를 전했으며, 통일부관리는 내가 평양으로 떠나는 날 아침까지 내 뒷일을 걱정해주었다. 그러나 북녘 방문 1주일 동안 황해남북도까지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가운데 평양에서나 묘향산에서나 김일성 동상 앞에 서보고, 만경대에서는 김일성의 조부모 묘까지 둘러보았으며, 북녘 관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까지 방문함으로써 김일성을 몇 차례나 만날 수 있었다. 남북 당국의 배려, 특히 국가정보원의 열린 자세 덕분이었다.
그러나 나와 달리 만경대와 관련하여 엄청난 곤욕을 치르며 구속까지 당한 사람이 있다. 강정구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다. 2001년 8월 평양에서 열린 민족통일 대축전에 참가했다가 만경대를 방문하여 방명록에 "만경대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는 글 한 줄 남겼다가 감옥살이를 했던 것이다.
앞에서도 소개하고 이미 널리 알려져 있듯이, 만경대는 김일성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며 '혁명의 큰 뜻'을 키운 고향집이다. 그러나 그가 1925년 '조국광복의 길'에 오르기 위해 집을 떠난 뒤에는 거기에 살지 않았으며, 1994년 죽어서도 조부모와 부모가 묻혀있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고, 금수산기념궁전이라고 이름을 고친 과거의 주석궁에 누워있을 뿐이다. 따라서 김일성이 일제 식민지시대인 1925년까지 만경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품었다는 '혁명의 큰 뜻'은 그가 1930년대 펼쳤던 항일 빨치산투쟁에서 나타나듯, '민족해방'과 '조국광복'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강 교수가 쓴 '만경대정신'이란 '항일투쟁 정신' 또는 '반제국주의 자주독립 정신'이라고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아직도 남쪽에서는 김일성이 가짜라고 주장하거나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듯한데, 항일독립운동이 오래된 일이고 대단한 것도 아니라며, 6.25남침이나 반세기의 독재에 초점을 맞추어 김일성을 평가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만경대와 결부시킬 수는 없다. 그가 1910-20년대 고향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20-30년 뒤의 남북분단까지 내다보고 이른바 남침을 통한 적화통일을 꿈꾸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경대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는 말은 우리가 몸서리치는 적화통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항일정신 또는 반제국주의 정신으로 통일하자는 뜻일 테니 처벌은커녕 오히려 지지와 성원을 보내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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