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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풀이 북역사 스토리) 숙청당한 연안파(조선의용대) 하 편. 마지막
Korea, Republic of 돌통 0 341 2021-05-13 16:01:28
 (하)편.             마지막편

 

 

● 한반도 입국 후 정치세력화 하는 연안파(조선 신민당 결성)

이렇게 무장해제를 당하는 치욕 속에 입국한 김두봉, 무정 등 이른바 조선의용군은 연안파가 되어, 조선신민당을 결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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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파의 김두봉과 김일성, 김두봉은

북조선로동당 위원장이 되지만....

 

 

그리고 1946년 김두봉은 북조선로동당의 위원장 직(김일성은 부위원장)에 오르는 등

북한 정권 수립 시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들의 가장 큰 자산은 비록 무장해제를 당했지만

조선의용군과 김무정, 방호산 등 연안파 출신 장성들이 조선인민군 내에서 요직을 맡았다는 점이 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즉 연안파라는 집단을 하나로 묶어 줄 구심점 이 없었다는 점이다. 김두봉을 이 연안파의 리더로 보기는 하지만

사실 김두봉은 정치인 보다는 학자 스타일(초대 김일성대학 총장)로 그다지 권력의지가 강한 인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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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헌영과 윤예나의 결혼식 장면

 

그래서 실질적인 연안파의 리더를 무정 이라고도 하지만 조선의용군이 원래 김원봉의 조선의열단에서 최창익의 조선의열대 화북지대를 거쳐 조선의용군이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팔로군 출신으로 가장 늦게 합류한 무정은 사실 그다지 연안파 전체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하나의 예로 연안파 간부들에게 무시당해 단체로 무정이 뺨을 맞는 구타를 당한 일화도 존재한다. 이렇게 김일성의 빨치산파에 비해 수장들이 엘리트 집단(최창학은 심지어 와세다 대학 출신) 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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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 북한내각

 

 

무력(조선의용군)도 있었음에도 연안파는 이러한 이유로 김일성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가장 큰 이유는 소련이 김일성을 간택했고 연안파의 지원세력인 중국공산당은 내전으로 연안파의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 김일성의 보천보 습격이 과장되게 한반도에 퍼졌다.

사실 조선의용군의 항일운동은 치열했고 많은 성과를 냈지만 한반도에서는 이들의 활약을 알 길이 없었다.(그들의 활동지역이 양쯔강에서 연안 일대 였기에)

 

그에비해 김일성은 보천보 전투(사실은 습격이 맞다)라는 별 것도 아닌 일이 너무 한국에 퍼저서 공적에 비해 고평가 된 것도 컸다.

 

사실 김일성의 여러 무장투쟁 중 보천보 전투는 그규모가 제일 작은 전투였는데도 불구하고 대표적인 전투로 내세우는건 한반도 땅안에서의 전투였고 무엇보다 당시 어떤 무장투쟁이나 독립운동이 없던때 아무 희망도 없던 때에 빛같이 나타난 전투라 그 파급력이 엄청났다. 그를 단번에 유명하게 만들었다.

언론매체에서도 연이어 내보냈고 해외의중국,일본은 물론 소련의 파라우다 언론매체에서도 2번이나 내보낼정도로 파급력은 대단했다.

어떤 학자는 이때 이미 스탈린이 김일성을 염두에 두었다는 설도 주장하는데 이는 확인 안된 추측이다. 이렇게 때와 시기 운빨이 제일 중요한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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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낡은 일본의 주재소(파출소)도 습격했다

 

 

 

 보천보 전투 아니 습격은 1937년의 조선인 항일세력이 완전히 소멸했다고 생각되던, 1937년 독립운동 세력 내에서도 패배감과 비관주의가 심각하던 시점이었다.

그런데 당시 김일성 이란 애송이가 혜산의 보천보 주재소(파출소)를 공격을 한다. 김일성 휘하 동북항일연군 90여 명과 조국광복회원 80여 명 등 항일세력 170여 명이 동원되었다.

김일성이 습격한 보천보 주재소에는 일제 경찰은 극 소수였고 나머지 무리들은 도망갔다.

또한 보천보 습격당시, 주재소에 보관된 총과 총알 들을 탈취했다.

김일성은 보천보를 점령 한 후, 불을 지르고삐라등을 뿌리고  한시간만에 일본 토벌군이 오기 전에  보천보를 빠져나갔다.

빠져나가는 도중 토벌대와 마주쳐 전투 중, 일본 측은 사상자 21명을 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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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아일보의 호외로 김일성은 한반도에서

네임드적 인물이 된다.

 

 

동아일보에 의해서 김일성에 대한 소문이 한반도에 퍼져나갔다.

당시 동아일보는 호외기사 까지 내보낸다. 비록 김일성 세력을 '비적'으로 칭했지만, 김일성이란 이름을 호외제목에 박아버려, 겉으로는 비적떼라고 알리면서

조선인들에게는 소멸된 줄 알았던 조선인 항일세력이 여전히 만주에 존재함을 알린 셈이었다. 이 사건으로 김일성의 이름은 조선 전역에서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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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의 (보천보 습격)

 

 

스탈린도 박헌영과 김일성 사이에서 고민을 하다가, 이 보천보 사건의 이야기를 듣고 김일성을 간택해 대위 계급장을 주어 북한에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 연안파에 대한 숙청과 김일성 수령체제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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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종파 사건으로

연안파는 제거되고...

 

 

◇  김무정의 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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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안파의 간부들(앞줄에 김두봉과 김무정)

 

한국전쟁 중 김일성은 눈엣가시로 생각하던 연안파의 거두 김무정을 낙동강 전선 패배와 평양 방어 실패의 책임을 씌워서 중공군이 참전 직전(무정이 팔로군 출신 인지라)에 숙청한다.

무정은 평양방어는 무리라고 했지만 김일성은 억지로 평양 방어를 무정에게 떠맡긴 후, 평양이 함락당하자 방어사령관이 책임져야 한다고 하면서 무정을 실각시켰다.

 

●  8월 종파사건과 최창익의 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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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세대 대학 엘리트

최창익은 김일성의 중공업 우선

정책을 비판하다 숙청당한다.

 

무정 이후 연안파의 수장이 된 와세다 대학 엘리트 출신의 최창익도 중공업 우선 정책을 주장하는 김일성에 맞서서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김일성을 실각시키고 본인이 조선로동당 위원장이 되려는 했고,

이 과정에서 중국, 소련과 긴밀히 접촉하기도 했다. 그러나 8월 종파사건이 실패로 끝나면서 1957년 감옥에서 병사한다.

●  김두봉의 숙청과 연안파의 소멸

 

6.25 전쟁 중 중공군의 참전으로 연안파의 김두봉의 입지가 높아져서 김일성 대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자격으로 신년사를 발표할 정도까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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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광복10주년 기념식의 김두봉과 김일성 사진 퍼레이드(그 후 3개월 뒤 김두봉은 숙청된다)

 

 

그러나 김일성이 연안파를 배제하고 독재 체제를 구축하려고 시도하자 김두봉은 이에 반발하여 김일성에게 계속적인 비판을 했다.

1956년 8월 연안파의 최창익 및 소련파 등 각 계파가 김일성의 독재를 비판하고 집단지도체제 구성을 시도한 '8월 종파사건'이 발생할 때 김두봉은 이를 묵인하였고 김일성은 그것을 이유로 김두봉을 실각시킨다.

 

1958년 김두봉은 조선로동당에서 출당되었고 농민으로 강등되어 1961년 합작 농장에서 홧병으로 사망한다.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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