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팩트)일 수 밖에 없는 북한 초기역사 증언..6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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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편 배를 젓고있는 오른쪽:김일성, 왼쪽: 홍명희
월북 소설가 이태준은 월북 후에도 늘 「순수문학가」라는 이유로 공격을 받았다. 정*진(鄭*進)이 그와 처음 만난 것은 1947년 8월15일 조소친선협회 주최 해방 2주년 경축연에서였다. 1948년 어느 날 이태준(李泰俊)은 소주 한 병과 안줏감을 들고 정*진(鄭*進)의 집을 찾아왔다. 이태준(李泰俊)은 『정(鄭)형, 언제까지 회의에서만 만날 것입니까? 이렇게 집에서 만나야 하고 싶은 말들을 주고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했다. 술이 좀 들어가자 이태준(李泰俊)은 하고 싶었던 말을 털어놓았다. 『순수문학이라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지금 내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순수문학을 반동 문학과 혼동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진(鄭*進)은 『선생님이 월북한 것으로 그 문제는 해결된 것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라며 이태준(李泰俊)을 위로했다. 『이태준(李泰俊) 선생은 「나는 될 수 있는 한 조선적인 아름다움을 더 선명하고 고상하게 보여 주려 힘썼다. 나는 이것도 하나의 애국사상이라고 굳게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일제 말기에도 끝까지 조선적인 것을 지키려고 애쓴 작가였습니다. 그런 그를 「순수문학가」라고 공격하는 데 앞장선 사람은 일제시대에 일본어 친일소설 「피」라는 작품까지 썼던 한설야(韓雪野)였습니다』 이태준 (李泰俊)의 처지는 1953년 남로당 숙청이 시작되면서 더욱 고단해졌다. 임화(林和)·김남천(金南天) 등이 숙청되는 와중에 이태준(李泰俊)은 창작금지를 당했다. ㅇ정*진(鄭*進)이 소설가 이기영(李箕永)을 만난 것은 1947년 5월 문예총 행사에서였다. 정*진(鄭*進)은 1935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있었던 조명희(趙明熙)의 문학강연에서 이기영(李箕永)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 이광수(李光洙)·최남선(崔南善)·김동환(金東煥)만 알고 있던 고려인 청년들 앞에서 조명희(趙明熙)는 카프문학의 동지였던 이기영(李箕永)을 극찬했었다. 이기영(李箕永)은 정*진(鄭*進)에게 포석(抱石) 조명희(趙明熙)의 소식부터 물었다. 『정률(鄭律) 동무, 포석(抱石) 조명희(趙明熙) 선생을 만나 본 적이 있습니까? 참 가까운 친구였으며, 진실한 전우였습니다. 포석(抱石)은 해방되면 꼭 귀국하실 분인데, 지금까지 소식이 없으니 좀 알고 싶어서요…』 그렇게 말하는 이기영(李箕永)에게 정*진(鄭*進)은 차마 「포석(抱石)은 1937년 체포되어 처형됐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조명희(趙明熙) 선생은 1938년경 병사 했다」고 둘러댔다. 이기영(李箕永)은 정*진(鄭*進)과 식사를 같이 하면서, 망명 전야의 조명희(趙明熙)를 회고했다.『1928년 늦은 봄 어느 날, 포석(抱石)이 불쑥 찾아왔습니다. 그때 우리 가족은 팥죽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포석(抱石)은 「내일 소련으로 떠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팥죽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며 밤을 새웠습니다.그때 우리에게 있어 소련은 빈부의 차이가 없는 자유의 나라, 꿈의 나라였고, 그런 소련으로 망명하는 포석(抱石)이 부러웠습니다』 이기영(李箕永)은 호주가(豪酒家)였다. 조소친선 협회장을 맡고 있던 그는 1947년 해방 2주년 축하를 위해 북한을 방문한 소련 태평양함대 가무협주단장과 술시합을 벌여 이겼다.
1952년 평양 교외의 소설가 이기영(李箕永) ○ 최승희의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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