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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팩트)일 수 밖에 없는 북한 초기역사 증언..6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555 2022-04-03 00:32:07


06편

배를 젓고있는 오른쪽:김일성, 왼쪽: 홍명희



창작 금지당한 이태준


 월북 소설가 이태준은 월북 후에도 늘 「순수문학가」라는 이유로 공격을 받았다. 정*진(鄭*進)이 그와 처음 만난 것은 1947년 8월15일 조소친선협회 주최 해방 2주년 경축연에서였다.


1948년 어느 날 이태준(李泰俊)은 소주 한 병과 안줏감을 들고 정*진(鄭*進)의 집을 찾아왔다. 이태준(李泰俊)은 『정()형, 언제까지 회의에서만 만날 것입니까? 이렇게 집에서 만나야 하고 싶은 말들을 주고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했다.

술이 좀 들어가자 이태준(李泰俊)은 하고 싶었던 말을 털어놓았다.

『순수문학이라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지금 내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순수문학을 반동 문학과 혼동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진(鄭*進)은 『선생님이 월북한 것으로 그 문제는 해결된 것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라며 이태준(李泰俊)을 위로했다.

『이태준(李泰俊) 선생은 「나는 될 수 있는 한 조선적인 아름다움을 더 선명하고 고상하게 보여 주려 힘썼다. 나는 이것도 하나의 애국사상이라고 굳게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일제 말기에도 끝까지 조선적인 것을 지키려고 애쓴 작가였습니다. 그런 그를 「순수문학가」라고 공격하는 데 앞장선 사람은 일제시대에 일본어 친일소설 「피」라는 작품까지 썼던 한설야(韓雪野)였습니다』

이태준 (李泰俊)의 처지는 1953년 남로당 숙청이 시작되면서 더욱 고단해졌다. 임화(林和)·김남천(金南天) 등이 숙청되는 와중에 이태준(李泰俊)은 창작금지를 당했다.

『1955년 10월, 내가 남로당계 작가·예술인들을 비호했다는 이유로 숙청당해 집에 있을 때, 이태준(李泰俊)선생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정()형도 숙청됐으니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 외로워서 찾아왔다.

늘 정(
)형을 믿고 의지했는데…」 했습니다. 그날 우리는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우리가 술 한잔 나누지 않고 식사만 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습니다.

1957년 소련으로 떠나올 때 그를 찾지 않았습니다. 그랬다가는 안전기관(정보기관)에 불려 다니며 시달렸을 테니까요. 그는 내 마음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조명희(趙明熙)의 안부를 묻던 이기영(李箕永)


   ㅇ정*진(鄭*進)이 소설가 이기영(李箕永)을 만난 것은 1947년 5월 문예총 행사에서였다. 정*진(鄭*進)은 1935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있었던 조명희(趙明熙)의 문학강연에서 이기영(李箕永)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 이광수(李光洙)·최남선(崔南善)·김동환(金東煥)만 알고 있던 고려인 청년들 앞에서 조명희(趙明熙)는 카프문학의 동지였던 이기영(李箕永)을 극찬했었다.


이기영(李箕永)은 정*진(鄭*進)에게 포석(抱石) 조명희(趙明熙)의 소식부터 물었다.

『정률(鄭律) 동무, 포석(抱石) 조명희(趙明熙) 선생을 만나 본 적이 있습니까? 참 가까운 친구였으며, 진실한 전우였습니다. 포석(抱石)은 해방되면 꼭 귀국하실 분인데, 지금까지 소식이 없으니 좀 알고 싶어서요…』



그렇게 말하는 이기영(李箕永)에게 정*진(鄭*進)은 차마 「포석(抱石)은 1937년 체포되어 처형됐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조명희(趙明熙) 선생은 1938년경 병사 했다」고 둘러댔다. 이기영(李箕永)은 정*진(鄭*進)과 식사를 같이 하면서, 망명 전야의 조명희(趙明熙)를 회고했다.『1928년 늦은 봄 어느 날, 포석(抱石)이 불쑥 찾아왔습니다. 그때 우리 가족은 팥죽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포석(抱石)은 「내일 소련으로 떠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팥죽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며 밤을 새웠습니다.그때 우리에게 있어 소련은 빈부의 차이가 없는 자유의 나라, 꿈의 나라였고, 그런 소련으로 망명하는 포석(抱石)이 부러웠습니다』


이기영(李箕永)은 호주가(豪酒家)였다. 조소친선 협회장을 맡고 있던 그는 1947년 해방 2주년 축하를 위해 북한을 방문한 소련 태평양함대 가무협주단장과 술시합을 벌여 이겼다.


토지개혁 이후 이기영(
李箕永)은 토지에 대한 농민들의 열망을 담은 소설 「땅」을, 1950년대에는 우리 민족의 고난을 다룬 「두만강」을 내놓았다.


『1957년 소련으로 망명하기 전, 이기영(李箕永) 선생에게 전화로 작별인사를 올렸습니다. 「정률(鄭律) 동무, 부디 소련에 가서 건강하시고 새로운 것을 많이 배워 가지고 귀국해서 다시 좋은 사업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동무를 믿습니다」 하더군요』


1952년 평양 교외의 소설가 이기영(李箕永)


○   최승희의 의문




 정*진 (鄭*進)이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崔承喜)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원산에서 교육부 차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이후 최승희(
崔承喜)의 남편 안막과 함께 문예총 부위원장으로 일했고, 김일성종합대 노문학부 시절에는 그의 조카 최로사를 가르친 적이 있어 최승희(崔承喜)와는 가깝게 지냈다.

최승희(崔承喜)는 김일성(金日成) 정권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열었다. 1948~1949년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동독·루마니아·헝가리 등을 순회공연하고 돌아온 그는 정*진 (鄭*進)에게 동유럽에서 받은 인상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런데 왜 동유럽 사회주의 나라 인민들은 소련을 미워하는 거죠? 특히 독일·헝가리가 심하더군요. 상점에 들어가서 러시아말을 하면 판매원들이 돌아서서 상대도 하지 않더군요』

최승희(崔承喜)는 지방공연을 다녀온 후에는 이런 말을 했다.

『해방된 지 3년이 지났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우울한 표정이에요. 해방된 느낌은 어디에서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어요. 왜 그럴까요?

일제시대에 나는 22개국을 돌면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유롭게 창작사업을 했어요. 그런데 북조선에 와서는 당과 정부의 넉넉한 지원을 받고 있고, 어떠한 억압이나 제한도 없지만,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늘 내 생활, 내 활동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것 같아요』

최승희(崔承喜)는 1948년, 일제시대에 중국 북경에 사두었던 집을 팔았다. 정*진(鄭*進)은 최승희(崔承喜)가 이 집을 파는 서류를 작성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최승희(崔承喜)는 집을 팔면서 정*진(鄭*進)에게 말했다.

『남루한 옷차림의 인민들이 내 공연을 보기 위해 피땀으로 지은 쌀을 팔아 극장표를 산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정말 울고 싶었어요. 미국이나 서구 사람들처럼 좋은 옷차림을 하고 활기 있는 모습의 인민들을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최승희(崔承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최승희(崔承喜)는 1954년 장편 무용극 「사도성의 달밤」을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아마 조선무대예술사상 첫 무용극이었을 이 작품은 아쉽게도 실패작이었다.

무용극은 최승희(
崔承喜)의 영역이 아니었다. 정*진(鄭*進)은 『이 무용극에서는 최승희(崔承喜)씨, 아니 무용가 최승희(崔承喜)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비평했다. 최승희(崔承喜)는 크게 화를 냈고, 이후 그와는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다음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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