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피의 숙청 《 6 》 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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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편 연안파 몰락의 원인 '공산주의자'라는 공통의 칭호를 가진 조선 혁명가들은 조선 독립을 위해 활동한 지역과 그 파벌의 구조와 관련이 있는 서로 다른 파벌을 형성하였다. 이 선언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 고수하는 민족 국가의 개념과도 관련이 있었다. 중국 내 조선독립운동은 소련의 지원과 지도를 받았던 중국 동북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게릴라파와 그동안 활동했던 연안파로 나눌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의 지지와 지도를 받았다. 유격대가 소속된 동북항일연합군은 중국공산당이 조직한 항일투쟁에 참여했지만, 중국인이든 조선인이든 소속 대원들은 소련의 지지와 명령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은 전쟁이 전개된 방식과 그들이 활동한 지역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렇듯 연안에서 중국공산당과 직접적인 연계를 맺기가 어려웠다. 중국공산당은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 소련의 지도력을 인정했기 때문에 연안파는 미래 계획을 실행할 수 없었다. 그 대신, 북한은 심각한 반대 의견을 제기하지 않고 조선에 배치된 소련의 영향을 받은 정치 구조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후 한국전쟁 등 다양한 문제를 놓고 중국과 한국(조선) 사이에 많은 갈등이 발생했지만, 소련과 중국의 관계의 기본 구조는 스탈린 치하에서 대체로 그대로 유지되었다. 한마디로 김 위원장이 이끄는 게릴라 진영의 구성이 가능했던 것이다 김일성은 연안 일파의 멸망을 성공적으로 추구한다. 그러나 연안파가 몰락한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원인은 사회주의 진영의 구조였다. 연안 파벌의 붕괴의 두 번째 원인은 : 중국의 적극적인 간섭이 없었기 때문이다. '8·8 사건'과 '반(反)파벌 투쟁' 이후, 많은 고위층의 중국으로 유배는 중·북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1957년 7월 평양의 노동당 간부들을 포함한 많은 중간 간부들이 중국으로 망명하려다 체포되었다. 1957년 10월 또 다른 단체도 중국으로 탈출하려 했다. 중국 국경절을 맞아 평양 주재 중국대사관에서 열린 경축대회와 연회에 김일성이 불참할 정도로 북-중 관계가 냉랭해졌다. 마오쩌둥은 대표단을 파견해 북한 내정에 간섭했지만 그럴 필요성은 없었다. 이후 악화일로로 치닫던 중북관계에 해빙기를 조성하다. 1956년 10월 헝가리 혁명이 일어나면서 사회주의 진영 내 패권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은 김일성을 더 이상 피할 여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1957년에 일어난 중-소 관계의 미묘한 변화는 또한 중-북 관계가 '8월 종파사건'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중국이 1957년 9월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로동당 경제사절단을 환영했을 뿐 아니라, 1년간 미뤄왔던 북한의 경제지원 요청에도 응하면서 중북관계가 해빙되는 첫 신호가 나왔다. 김일성은 이에 호응하여 인민해방군의 한국전쟁 참전을 기념하는 성대한 집회를 조직하고 마오쩌둥에게 감사의 전보를 보냈다. 마오쩌둥과 김일성도 1957년 11월 모스크바에서 회담을 가졌다. 마오쩌둥(毛澤東)은 회담에서 김일성 주석에게 북한 내정에 간섭한 데 대해 사과하고 "양자간 우호관계 구축과 상호 이해의 달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회담 후, 마오쩌둥은 김 위원장이 헝가리인 임레나기와 유사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따라서, 마오쩌둥은 김일성이 '주체' 철학을 바탕으로 '독립'의 길을 열 수 있는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간단히 말해서, 중-소 관계의 악화는 두 나라의 북한 지원을 확보할 필요성을 증가시켰다. 정치적 관점에서, 어느 쪽도 북한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여유가 없었다. 중소 관계의 악화로 마오쩌둥은 김일성을 더욱 필요로 했다. 1958년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마오쩌둥은 중국이 북한에 대해 똑같이 하기 전에 한국 전쟁 동안 북한이 중국에 식량을 제공했다고 언급했다. 이후 중국 정부의 기본 노선은 6·25전쟁 당시 북한에 물자를 지원했던 중국이 중국을 위해 지원했던 북한으로 바뀌었다. 중국도 평양의 선례를 맹목적으로 따랐다. 김일성 주변에서 전개되고 있는 인격 숭배에 대한 보도 마오쩌둥 시대 중-북 관계의 기본 구조가 확립된 것은 이때였다. 마오쩌둥과 중국은 사회주의 진영 내 패권 경쟁에서 북한의 지지가 절실히 필요했고 불필요한 간섭이나 연안파의 보호 때문에 중-북 관계를 깊은 동결에 빠뜨릴 이유가 없었다. 셋째, 확실한 지도자를 결정하지 못한 것은 구심력의 부재를 초래했다. 예를 들어 최용건, 김책 등 유격대원들은 김일성보다 10년정도 연상이었고 경험도 많았다. 그러나 1945년 7월 조선공작단[공작단]이 창설된 이후 김일성을 지도자로 삼는 일은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고, 해방 전에 김일성을 지도자로 추대하여 귀국 후에도 이 결정을 계속 지키게 된다. 중진들이 후배를 지도자로 받아들일 수 있고 '김일성'을 중심으로 단결할 수 있다는 점은 해방 당시 북한의 다른 정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강점이었다. 게다가, 김일성은 한국(조선)에서 다른 두 인물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었고, 그는 조선민족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반면 연안파에는 확실한 지도자가 없었다. 중국이 신뢰하는 두 인물 중 한 명이었던 "무정"은 6.25전쟁 때 숙청됐다. '박일우'는 1955년에 숙청되었다. 비록 이 두 인물이 숙청되지 않았더라도, 연안에 있는 동안 이 집단을 괴롭혔던 내부 갈등은 주앙익과 다른 사람들이 무정이나 박일우를 그들의 확실한 지도자로 선택했을 것이라고 믿기 어렵게 만든다. 예를 들어 마오쩌둥(毛澤東)이 8월 종파사건 직후 김일성의 연안파 조직원 박일우(朴一 faction) 등 연안파 조직원들에 대한 잔혹한 처벌을 강하게 비판하자, 연안파 조직원 하앙춘(河 ang春)은 박일우가 자유주의와 파벌주의의 중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김일성을 옹호했다.. 김일성 편을 들어 연안파를 배신한 김창만이 또 다른 예이다. 그런 점에서 최창익은 국내 유일의 저명한 인물로 떠올랐다. 김일성 반대 진영 그러나 주외는 능력에 관한 한 김일성과 비교할 수 없었다 즉 능력이 떨어졌다. 김두봉은 지도자로서 그의 지위에 있어서 주외보다 한 단계 낮았다. 사실, 주앙기가 지도자로 등장한 것은 연안파가 확실한 지도자를 선출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증명한다. 넷째, 연안파는 군부를 장악하는 데 실패했다. 의용군 출신 장성들은 북한으로 돌아간 뒤 군 최고사령부 구도에 진입하지 못했다. 조선의용군 최고 사령관인 무정은 군 지휘부(조선인민군 중장) 내에서 2계급에 불과했다. 조선인민군에 대한 통제는 김일성과 유격대가 장악했다. 북한 건국의 공로를 인정받아 표창을 받은 개인들의 명단을 보면 김일성유격대가 어느 정도까지 군을 장악했는지 알 수 있다. 모두 31명의 유격대원이었지만, 연안파 출신은 15명뿐이었다. 한국 전쟁 이후 유격대의 군내 진출은 더욱 두드러졌고, 연안파는 거의 사라졌다. 연안파는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장평산을 포함한 소수의 장군만이 숙청될 정도로 군부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다. 다섯째, 연안파는 통일성, 잔인성, 유연성 면에서 게릴라파와 비교할 수 없었다. 조선독립동맹 내 주요 인사들을 살펴보면 연안파 내부의 결속도가, 게릴라파 내부보다 훨씬 낮았음을 알 수 있다. 연안파가 게릴라파보다 더 많은 수를 가졌지만, 통일성 면에서는 비교할 수 없었다. 이것이 계파 싸움의 결정적 요인으로 판명되었다. 만주의 열악한 생존 환경은 김일성과 유격대에 세 가지 측면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첫 번째는 집단 화합이었다. '동북항일연합군'은 통일이 되지 않고서는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에 유격대의 단합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쟁터에서 사상자를 내는 것 외에도~~ 7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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