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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피의 숙청 《 7 》 편. 마지막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1716 2022-05-11 00:02:27
7편 마지막편


많은 게릴라 조직원들이 얼어 죽거나 굶어 죽었다.사망자 수가 산 사람보다 훨씬 많았다. 전체적으로 김일성과 함께 북한으로 돌아온 게릴라 대원은 130명에 불과했다.

그만큼 운명을 같이했던 게릴라 대원들이 보여준 단합이 유난히 돋보였다. 연안파와 의용군도 작전 지역에서 활동하며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주로 적과의 선전전에 치중했기 때문에 활동 첫해 동안 전사한 대원은 전체의 10%에 불과했다.

연안파가 활동한 환경은 만주 유격대보다 훨씬 안전했다. 팔로군과 긴밀하게 연합작전을 펼쳤지만, 조선 의용군은 독립적인 군사작전을 거의 하지 않았다. 운명을 같이하는 연합은 더 안전한 환경에서 덜 두드러진다.

게다가, 게릴라 조직원들 대부분은 가난했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대부분은 함경도와 중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이의 국경 지역에서 유래되었다. 반면, 연안파는 조선의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과 중국으로 유배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또한 게릴라 파벌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교육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심지어 부잣집 출신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두 파벌의 통합에도 영향을 미쳤다.

두 번째 출발점은 정치적 투쟁 중에 적에 대해 사용된 잔혹함이었다. 김일성은 1930년대, 민생단 사건 등 수많은 정치적 투쟁을 겪었고, 적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자신을 사냥하기 위해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해방 후 김일성이 박헌영, 박일우와 같은 적들을 숙청한 것은 본질적으로 매우 잔인했다. 연안파는 잔혹성과 결단력면에서 김 위원장과 비교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1956년 6월 추앙익은 김일성이 조선로동당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소련의 충고를 받아들일 것으로 기대했으며, 이는 조선로동당 발전측면에서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당과 국가. 이것이 왜 최**이 김일성을 숙청하기
위한 어떠한 강압적인 조치도 고려하지 않았는지설명해 준다. 최씨는 또한 다른 파벌에 속해 있던박헌영이 숙청되었을 때 처형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세 번째 출발점은 유연성이었다. 김일성의 유연성과 정치력은 만주 유격대 투쟁의 장기 목표였던 '기본 교리'와 생존을 위해 매일 지켜야 했던 '행동 강령'을 분리해야 했던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환경과 생존 여건의 일상의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파벌은 사상과 행동 양면에서 그의 유연성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었고, 이는 결국 그가 복잡한 정치환경 하에서 당 국가 수립 당시 중요한 정치 권력을 모두 장악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결론적으로 중국 동북부에서 활동한 게릴라파와
중국 남부에서 활동한 연안파는 중국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해방 후에 분명히 다른 운명을 경험했습니다.

게릴라 파벌은 소련으로부터 원조와 작전 지원을받았고, 연안 파벌은 중국 공산당의 원조와 지도를받았다. 이러한 상황은 소련이 중국 동북부를, 중국 공산당이 중국 남부를 책임질 정도로 명확한 역할이 확립된 데서 비롯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연안파는 핵심 권력 구조에 접근하지 못하면서 정치 사다리의 2층에 머물렀다.이러한 상황은 냉전 초기 사회주의 진영의 구성방식의 결과였다. 중국은 주변 사회주의 진영에서 지도력을 다투기 시작했다.

한국 전쟁 시기 이러한 현실에 발맞춰, 마오쩌둥은8월 종파사건의 초기 단계에서 적극적인 접근법을 채택했다. 그 결과, 중-북 관계는 소련의 시각보다는 중국의 시각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북한 내정에 대한 간섭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고, 곧 김 위원장이 강한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양한 이유로, 중국 정부는 김일성과 사이가 나쁠 수 없었다. 이를 위해 연안파의 욕구는 긍정적인 남북관계 보존에 예속되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연안파의 필연적인 붕괴로 귀결되었다.

결론적으로 8월 종파사건은 김일성이 서로 다른 파벌들을 결집시킨 '연합' 구조를 해체하고 이를 '단일지도자 체제'로 대체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치열한 권력투쟁이었다.

8월 종파 사건의 여파로 김일성은 국내적으로는 '단일지도자 체제'를, 국제적으로는 소련과 중국의 영향력을 없애기 위해 '주체' 체제를 구축하기위한 '반(反)파벌 투쟁'의 일환으로 연안파를 포함한 야당을 철저히 숙청했다.

연안파의 붕괴는 북한의 통일화를 향한 결정적인발걸음을 내디뎠다.

<추론>

'8월 종파사건'과 연안파의 운명

중국 내 한인 독립운동은 중국 북부(만주)에서 활동하는 게릴라파와 중국 본토에서 활동하는 독립동맹으로 크게 나뉜다.

연안파는 중국 공산당과 가장 긴밀한 유대를 자랑했으며,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과 연계된 조직적 관점에서 활동했다. 연안파의 핵심 멤버는 원래 조선의용군이나 동북항일연합군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다른 이들은 중화민국 국민혁명군의 부대로 복무한 팔로군 장교였다.

1943년 발발한 내부 투쟁에서 분명히 드러났듯이통일전선의 특징을 지녔던 연안파는 게릴라파만큼 통일된 적이 없었다. 김일성이 이끄는 유격대와 김두봉과 무정이 이끄는 연안파 모두 해방 후 북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북한의 새 정권이 소련군의 지원을 받아 수립되었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옌안파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김일성 정권을 지탱하는 데 도움을 주는 배후세력 역할을 하고 있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냉전 초기 소련 주도의 사회주의 진영 내에 존재했던 내부 관계의 직접적인 결과였다.1956년 8월 연안파와 소련파 일부 당원들은 김일성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노동당으로부터 숙청되었다. 연안 일파의 구성원들 중 일부는 중국으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9월 18일, 마오쩌둥은 아나스타스 미코얀이 이끄는 소련 대표단과 회담을 가졌다.

북한. 마오쩌둥은 김일성이 이번 대표단 파견을 내부 간섭으로 볼 가능성을 점치고 지원군 철수까지고려했다. 마오쩌둥은 주영건이 이끄는 조선로동당 대표단과의 회담에서 박일우와 박헌영의 숙청을 비판하고, 의견이 다른 동지들과 대화를 개시할것을 요구했으며, 체포된 동지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는 또 한국측에 중-소 대표단의 파병이 임박했음을 통보했다. 중국은 한국전쟁 발발 전후로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 극동 문제의 최전선에 있었다. 이와 같이, 마오쩌둥은 1956년 '8월 사건'의 초기 단계에서 적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당시 중-북 관계는소련의 행동이 아니라 중국의 당면한 문제와 중국이 제시한 해결책에 의해 결정되었다.

북한은 지난 9월 열린 인민대회 당시 중국과 소련의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회의 때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럼에도 '8월 종파사건' 주동자에 대한 사면을 거부했다. 중-소 대표단의 간섭도 '8월 사건' 이전의 상황을 되돌릴 수 없었다.

1956년 10월 이후 김일성은 위기를 극복하고 연안과 소련 파벌을 숙청하기 위한 '반(反)파벌 투쟁'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간섭이 별 도움이 되지 않았던 마오쩌둥은 이 상황을 김일성의 강한 독립 행보를 부각시킨 것으로 해석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중국은 김일성과 거리를 둘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유배된 옌안파 조직원들의 침묵은 북-중 관계의 지속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회주의 진영, 그리고 불필요한 간섭으로 인식된중국 북-중 관계의 악화를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북한에서 지도력을 장악하고 군사력을 장악하지 못하면서 생긴 단결의 부재가 결국 연안파 몰락의 주원인으로 판명되었다.

연안파가 몰락하면서 북한은 획일화를 향한 결정적인 발걸음을 내디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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